관객이라는 물음표

모든 예술 작품에는 창작자뿐만 아니라 수용자가 필요하다. 책은 독자가 필요하고 영화는 관객이 필요하고 미술 전시에도 관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수용자 집단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주로 어떤 이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얼마나 적극적인지, 비평적 관점을 갖고 있는지 등의 지표들에 따라서 그 대상 장르의 현재와 전망 또한 평가할 수 있다. 그 수용자 집단이 건강하지 못할 경우, 이를테면 그 수가 너무 적거나 소비가 지속적이지 않거나 혹은 숫자는 많더라도 작품에 대한 비평적 감상이 없을 경우, 우리는 그 장르의 현재를 위기로 파악한다. 예컨대 시집을 출간하면 초판도 다 팔리지 않는 상황을 두고, 시집이 시인들 사이에 주고받는 팸플릿이 되었다는 과장된 자조는 시를 향유하는 집단이 빈약함을 위기로 파악하는 데서 나오는 말일 것이다. 한 장르의 창작자가 동시에 수용자가 되어 그 내부에서 공회전하는 구조에 있다면, 그 장르는 분명 건강한 상태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장르의 입지를 넓히고 토대를 더욱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더 새로운, 더 적극적인 관객을 불러모아야 한다.

소위 ‘신생 공간’(이 명칭이 지시하는 대상이 명확하지 않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2013년 말부터 등장한 소규모 공간들과 그와 연관된 일시적 미술 행사들을 통칭한다)이라 불리는 공간의 관객은 누구였을까? 그것이 대부분 다른 동료 작가나 비평가 등의 미술계 내부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은 장점으로 여겨졌었다. 제도권 미술계에 진입하기 어려운 젊은 작가들이 동료를 만나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로, 그러한 장으로 여겨졌다. 반면 신생공간의 관객 중에 ‘미술계 외부의 관객’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먼저, 신생공간의 낮은 접근성 때문에 미술계 외부의 관객이 알고, 찾아가기 어려웠다. SNS, 특히 트위터를 통해 그 존재 사실을 알리는 신생공간에 대해서 미술계 외부의 관객이 정보를 얻고, 공간에 방문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것은 배타적인 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들 청년 예술가들이 미술계 외부의 관객까지 고려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며, 마땅한 공표의 창구가 없었던 탓이기도 하다. 또한, 신생공간이 친밀도가 높은 공간이라는 점이 관객의 진입을 어렵게 했다. 신생공간에서의 모든 전시와 행사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은 경우에 그곳은 익명의 공간이 아니다. 매우 좁은 공간에 한시적으로 모인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신분을 밝히게 된다. 이는 그곳이 폐쇄적 공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밝힐 신분이 없는 미술계 외부의 이들에게 진입장벽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이상적으로는, 비록 작가, 비평가, 기획자가 아닐지라도, “저는 회사원이지만 관심이 있어서요”라고 말을 하면 될 일이지만, 현실은 이상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당위적 이상과 실천적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직함이 없는 관객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작가들에게는 어땠을까? 열린 공간이라고 해서 아무런 진입장벽이 없는 공간이었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신생공간에도 작가도 기획자도 비평가도 아닌 외부의 관객이, 그 수는 적을지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신생공간을 통로로 새로 미술 관객이 되었거나, 기성의 미술 전시에서 찾지 못했던 재미를 새로운 미술씬에서 찾았을 것이다. 제도화된 미술관에서는 볼 수 없는 젊은 작가들의 작업에 매료되었을 수도 있고, 궁금증을 유발하는 장소에 위치한 공간적 특성에 흥미를 느꼈을 수도 있고, 미술과 타 장르가 협업하는 점에 관심을 가졌을 수도 있다. 미술작품이기도 하고 ‘굿즈’이기도 한 것을 구입하면서 미술품을 소장하는 경험에 모종의 감동을 받았을 수도 있고, 작가가 직접 전시를 지키는 전시장에서 나눈 대화가 더 큰 관심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이외에도 관객에게 신생공간이 선사한 선물은 가지각색으로 무수히 많을 것이다. 신생공간은 분명 기성의 미술 전시가 주지 못했던 다른 무언가를 제공해주었고, 그것은 새로운 관객을 흡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였는지, 앞으로도 미술을 보러 올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잘 알지 못한다.

미술계에서 관객이라는 자리에 누가 있는지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사실 제도권 미술관을 찾는 관객들의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신생공간의 관객을 말하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관객 집단의 구성이 곧 장르의 현재와 직결되어 있다면, 외부의 관객에게 그토록 불친절한, 내부에서 공회전하는 구조에 가까웠던 신생공간에 기어코 찾아가는, 그것도 멀고 험난한 길을 스마트폰 지도에 의존해가며 찾아가는 이들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또한 어떤 지점들이 그들을 계속해서 전시장에 오도록 하였는지, 그리고 어떤 지점들이 그들을 차마 전시장에 갈 수 없게 하였는지 아는 것 또한 중요할 것이다. 이제는 신생공간의 시간이 모두 끝나버린 것처럼 회고되고 있는 이 시점에, 그곳에 왔던 이들은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들은 어떤 관계 속에서 그 공간들에 드나들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외부에 있던 이들을 적극적으로 내부로 들이고자 하는 것이며, 다른 관점에서 내부의 성질을 알아가기 위한 노력이다. 그렇게 그들을 알고, 우리를 아는 것이 그들을 다른 미술 공간 어딘가에서 또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보러, 어디로 갈까? 그들을 미술 공간 어딘가에서 또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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