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결산 코멘트

Yellow Pen Club은 2017년을 마무리하면서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해를 돌아보기로 했다. 멤버들이 공통적으로 관심을 갖고 유심히 살펴본 것으로 두 가지 주제를 선정했다. 첫째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을 비롯한 국공립 기관 전시에 관한 단상이다. 2016년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도 멤버들은 국공립 기관 전시에 대한 불만을 표했었다. 그 후 일 년간 기관 전시를 어떻게 봤는지 각자의 경험을 돌아보고 기록했다. 둘째는 미술계의 여러 대안적 플랫폼에 관한 단상이다. 올해 새롭게 열린 <취미관>과 <PACK 2017 F/W>, 9회를 맞은 <언리미티드 에디션>,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퍼폼 2017>과 <더 스크랩>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각자의 의견을 개진한다. 이에 더해, 각자 기록할 만한 풍경을 선정하여 그 단상을 정리했다.



국공립 기관 전시에 관하여

총총: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다섯 편의 전시를 봤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세 편의 전시를 봤고, 아르코미술관에서 세 편의 전시를 봤다. 올해는 편향적으로 시립미술관의 전시를 많이 봤다. 횟수로는 큰 차이가 안 날지라도, 얼마나 전시를 열심히 봤는지 따져보면 그렇다. 국현 전시는 서울관에 한 번 가서 그때 하고 있는 전시 세 편을 휘리릭 본 게 다였다. 시립에서 본 전시는 최고로 좋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봤다. 연초에 본 SeMA Gold<X: 1990년대 한국미술>과 <SeMA 전시 아카이브 1988-2016: 읽기 쓰기 말하기>는 지나간 시간을 정리하는 전시이면서도 박물관처럼 과거의 유물을 전시하는 방식이 아니라서 좋았다. 여름에는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전: 하이라이트>를 봤다. 이 전시는 기획이 분명하지 않게 느껴졌는데, 여름방학을 맞아 많은 이들이 시립미술관을 찾은 풍경을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날 전시를 보고 와서 “남는 건 사진뿐”을 생각했다. 겨울의 문턱과 한 해가 끝날 때쯤에 각각 <불협화음의 기술: 다름과 함께 하기>와 <미래과거를 위한 일>을 봤다. 두 전시 모두 다른 지역의 작품을 우리의 시공간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흥미로웠다. 아주 매끄럽지는 않지만(영국의 저항문화가 우리의 광장으로 이어질 수 있나?) 오히려 약간 어긋나면서 이어붙여보는 지점이 재밌었다. 시립미술관 전시는 전시에 주어진 조건들―이를테면 한영 상호교류의 해―로 인해 생기는 제약이 적지 않을 것 같은데, 기획자가 이를 영리하게 잘 이용하면서 전시를 풀어나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저런 조건에서 전시를 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조건을 최대한 잘 이용하고 빠져나가면서 좋은 전시를 보여준다는 생각을 했다.

루크: 기관 전시를 많이 보지는 않았다. 시립에서 약 4개, 국현에서 3개의 전시. 그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비한국인 작가나 작품의 전시가 많았다. “뉴타운 고스트”에서 이미 한 번 소희를 담았던 적이 있지만 연초에는 베를린에 다녀왔다. 한때 꽤 오랜 기간 머물렀던 베를린은 당시에는 가장 살고 싶은 곳이자 가장 나와 잘 맞는 곳이라고 여겼던 도시이다. 본격적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고 좀 더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이 도시에서의 미술경험들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험은 조금 달랐다. 독일의 갤러리에서 비독일인의 작품들을 많이 보게 되어서였을까? 전시에서 어떤 비-1세계성, 비주류성의 단면으로 ‘내’가 디스플레이되었을 때의 대상화되는 느낌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독일인이 비유럽성을 다룰 때, 베를린에 비유럽인의 작업이 전시될 때 또 다른 레이어에서 소외당한다는 기분을 느낀다. 내가 이 공간에 관람객으로 상정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그렇다. 당시 느꼈던 배제감이 올해의 많은 판단 속에서 머물렀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한국이 아닌 것을 전시할 때 상정하는 관객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돌이켜보면 한국의 경우에도 스스로 소외를 자처하거나 대상을 소외시키거나, 그러한 전시가 많았던 것 같다. 올해 시립에서 본 <불협화음의 기술>과 <미래과거를 위한 일>은 상대적으로 이러한 소외감이 덜했던 것 같다. <불협화음의 기술>은 영국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유쾌하면서도 언캐니한 대중성이 드러나는 작품들이 재미있었다. 무언가 거창한 말들로 가득하지만 역으로 애매하게 흩어져버린 기획의 말들에 비해 작품들은 탄핵 전후의 한국사회와 교차하고 어긋나며 나름의 의미를 생산하고 있었다. <미래과거를 위한 일>은 보다 진솔한 작품들이 많았고 미감적으로도 지적으로도 자극이 많이 되는 전시였다. 비-1세계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작품들에 많은 감흥을 받는 한편으로 어떤 ‘라틴아메리카적’임을 작품에서 꺼내오려고 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면서 씁쓸했다. 다 가보지는 못하였지만 올해의 기관전시는 비-1세계 관련 작가와 기획들이 많았던 것 같다. 기관이라서 할 수 있는 규모가 긍정적으로 발휘되기를,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되기를.

김뺘뺘: 기관에서 규모 있게 진행하는 개인전들이 동시대 미술 작가의 전시라기보다 회고전의 형식을 띠는 점은 다소 아쉽다. 회고전에 해당하더라도 작업을 마치 유물처럼 그것의 실물을 확인하는 데에 의의를 두어야 할 것 같은 혹은 관객으로 하여금 학습 모드에 돌입하도록 하는 방식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 전시로 작동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특히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엘름그린&드라그셋 등의 작업을 전시다운 전시로 풀어냈던 플라토를 상실한 이후에 그 공백이 더 크게 다가왔다. MMCA 서울관에서 열린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개인전: 기구, 기념비, 프로젝션>은 작가의 초기 작업부터 신작까지 폭넓게 망라하는 개인전이었다. 전작을 보여준 공간은 주어진 면적을 효율적으로, 그러니까 빡빡하게 사용하여 이전 작업들을 나열해두어서 흥미롭다기보다 유익했다. 어디선가 배웠고 사진으로만 봤던 작업을 실물로 보았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는데, 이로써 조금은 괴로운 낙차―분명 동시대 미술인데 어째서 이걸 실물로 봤다는 점을 전시의 의의로 꼽아야 하는가―를 느껴야 했다. 그리고 대규모 프로젝션 신작은 동원된 리소스에 비해서 다소 피상적으로 느껴졌다. 김구라는 인물을 동시대에 어떤 상징과 의미를 갖는 인물로 해석했기에 그가 동성애자, 세월호 유가족 등 우리 사회의 주변화된 인물들의 신체가 되어줄 수 있는 건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마리 관장이 추진했던 대형 개인전-회고전의 내적 논리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훌륭한/유명한 외국 작가의 작품을 한국에서 실물로 볼 수 있다- 혹 작가가 살아있다면 그(여기서 중요한 건 어김없이 ‘그녀’가 아니라 ‘그’라는 것)가 내한하여 오프닝 때 그의 살아 숨쉬는 현전을 드러낼 것이다!- … 그런 점에서 같은 기관에서 열린 <불확정성의 원리>는 썩 재미있었다. 물론 서문이 정확하게 쓰여졌다고 보긴 어려웠으나 네 참여 작가들―권하윤, 왈리드 라드, 재커리 폼왈트, 호 추 니엔―의 작업을 국내 관객들에게 소개한다는 태도를 취하기 보다 적절한 작업을 선택하여 완성도 있게 설치되어 있었다(특히 재커리 폼왈트의 <파라노마와 법인의 탄생>은 작업과 설치 모두 훌륭하여 기관의 규모에서 가능한 경험이 어떤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대안적 플랫폼에 관하여

총총: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더 스크랩>에 다녀왔다. 올해 처음 열린 <취미관>과 <PACK 2017 F/W>에도 다녀왔다. <퍼폼 2017>에는 사전 행사로 준비된 프로그램 하나에만 다녀왔다. <굿-즈> 이후를 상기시키는 두 행사 <취미관>과 <PACK 2017 F/W>은 언뜻 볼 때는 굉장히 다른 것 같았지만, 결정적으로 둘 다 작품을 투명하지만 만질 수 없는 유리관에 넣었다는 것이 같았다. 유리관 안에 담겨있는 굿즈는 친근한 취미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유물처럼 느껴졌다. 작가들이 각자 매대를 열고 굿즈를 늘어놓고 팔던 <굿-즈>가 시장에서 물건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들어보고 사는 경험에 가까웠다면, 올해 열린 두 행사는 점원에게 유리관 속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번 볼 수 있을까요’ 하고 청해야 하는 명품을 사는 경험과 비슷했다. (유리관은 신중히 생각해보고 정말 사고 싶은 마음에 가까워졌을 때 열어야 한다. 한번 살펴보고 싶을 때마다 유리관을 열어달라고 하고 도로 넣기를 반복하는 것만큼 민망한 일도 없다.) 굿즈를 미술품보다는 작고 가벼운 것으로 생각한다면 전자의 형식이, 굿즈를 전통적인 미술품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후자의 형식이 적합했을 것이다. 오히려 <더 스크랩>이 사진을 다루는 태도가 <굿-즈>와 가까웠다. <더 스크랩>은 사진을 빠르게, 가볍게, 싸게 판다. 에디션 몇 번을 부여받아 애지중지 하는 고가의 사진이 아니라 작고 얇은 인화지에 출력된 사진 프린트를 부담 없이 구입하게 한다. 그 점에서 <더 스크랩>이 판매할 상품과 판매의 방식이 잘 맞아떨어진 행사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들 행사는 어떤 굿즈를 염두에 두고 있는가? 그 굿즈의 구매자로는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는가? 그들은 굿즈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정확하고 솔직하게 답을 해야 알맞은 형식을 찾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2018년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이들 행사가 열릴지, 어떤 행사에서 나는 또 무얼 사며 돈을 쓰고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루크: 신생공간이라는 개념은 잘 몰랐지만 코믹월드를 집처럼 드나들던 오타쿠에게 <굿-즈>의 풍경은 익숙한 것이었다. 부담없이 굿즈를 사모으고 그 분위기를 즐기다 돌아왔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신생공간의 끝이나 세대교체를 말하는 한편으로 굿즈적 예술을 통해 수집-관객을 확장하려는 시도들은 올해도 이어졌다. <취미관>과 <PACK 2017 F/W>은 둘 다 유리케이스라는 공간성을 가지고 새로운 전시/판매폼을 구축하려고 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공간성은 매우 달랐다. <취미관>은 이름 그대로 ‘취미’를 내세우며 만다라케의 렌탈케이스를 벤치마킹하였다. 코믹월드를 따온 <굿-즈>처럼 오타쿠적 공간성을 참조함으로써 최대한 가볍고 평면적인 오브제의 디스플레이를 추구하고 소비지향적 태도를 극대화하고자 한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오타쿠 시장의 수억가지 매뉴팩쳐 생산물들 사이에서 소비자가 자신의 취향을 취사선택하여 채우는 렌탈케이스와 작가가 직접 제작하거나 자신의 컬렉션으로 하나하나 채워넣는 <취미관>의 박스가 가지는 무게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각각의 케이스는 중고샵의 렌탈케이스가 공유하는 취미적 공통성(만다라케의 경우 모태가 되는 작품, 나아가 서브컬쳐의 모에-데이터베이스)이나 산업 내에서 합의된 가격체계가 없이 서로 유리된 공간으로 치부된다. 때문에 이 공간에는 역으로 작가의 진중한 오리지널리티나 컬렉터즈 에디션의 아우라가 부여되고 선뜻 손대기 힘든 무게를 담지한다. 한편 <PACK 2017 F/W>의 라이트박스는 어떤 환경에도 독립적인, 동일한 퀄리티의 전시환경을 보장하고자 하는 시도, 즉 최소한의 크기의 화이트큐브를 확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겉모습부터 상점의 모습을 따온 <취미관>과는 달리 <PACK 2017 F/W>의 전시물들은 더욱 ‘작품’과 ‘갤러리’의 외연을 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스의 이동가능한 성격은 유동적인 컴팩트 예술시장의 시장의 형성을 추구하며 이 점에서는 <굿-즈>와 맥락을 같이할 것이다. 그러나 칸칸이 쌓여 장식장의 모습이 된 금속제의 상자와 이를 굳게 잠근 자물쇠는 쉽게 접근하지 못할 압박감을 준다. 열쇠를 받아 소유권을 양도받는 절차는 컴팩트와는 거리가 먼 엄숙한 의식의 집행이 된다. 유리 디스플레이의 도입은 전시와 판매를 동시에 추구하고 작가가 그 자리에 없어도 대리 판매가 가능한 미술시장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미술시장의 소비층을 자처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만다라케에 들르는 것은 오타쿠만이 아니다. 렌탈케이스와 그 소비층이 만드는 풍경을 단지 구경하러 가는 경우도 많다. 유리장 안의 장식물들을 선뜻 사겠다고 나설 수 있는 소비층을 현재의 미술계는 얼마나 많이 만들어냈는가? 유리장 안과의 거리감은 얼마나 쉽게 극복 가능한가? 그런 고민이 아직은 더 필요한 때인 것 같다.

김뺘뺘: <언리미티드 에디션 9>(이하 언리밋)이 유난히 붐볐는데, 너무 복잡해서였는지 새로운 창작자를 발견하고 만나는 장소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미 들르고 싶은 부스나 만나고 싶은 사람을 정해놓지 않는 이상 지나가다가 흥미로워서 “이건 뭐예요”하기는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려웠다. 그보다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출판물을 포함한 보다 넓은 의미의 제작물을 만들어 유통하고자 하는 창작자들의 시계가 언리밋에 맞춰진 것 같이 느껴졌다. 쉽게 말해 다들 언리밋이 열리는 기간을 데드라인을 걸어놓고 달려야 한다는 압박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독립출판계의 대목이니만큼 놓칠 수 없는 것은 사실이고, 어쨌든 연말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행사가 새로운 창작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는 부분도 크다. 하지만 기금도 1년 단위로 돌아가서 다들 특정 기간에 부랴부랴 전시하고 책 만들고 기금 집행하랴 정신이 없는 걸 늘 보게 되는데 굳이 독립출판 시장도 동일한 사이클로 달려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니 결국 하반기가 되면 책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모든 과정을 조급하게 진행해아 하는 상황으로 귀결된다. 어쩌면 이러한 촉박한 시간 감각은 언리밋 행사 자체가 만들어낸다기보다 매년 성실하게 찾아와주었기 때문에, 즉 예측가능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새로운 책을 발간한다, 어디에서 처음 선보이고 판매할 것인가? 올해도 찾아올 언리밋! 물론 선뜻 이러한 사이클에 대한 구조적인 대안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렇게 성실하게 돌아와주는 행사도 드물다 보니 정이 드는 것도 같고. 그 와중에 자기 자신이 설정한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듯한 작가들이 자신의 출판물이자 작업인 생산물을 소개하거나 이웃 나라들에서 건너온 부스들에 눈길이 갔다.
        <퍼폼 2017>은 꽤 과감한 시도들을 펼쳤다. 라인업, 장소, 시스템 등에서 1회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 이질감 때문이었는지 작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퍼폼 2016>이 티켓 부스와 대기실, 공연장 모두를 한 공간(우정국)에 두고 마치 북적이는 연말 미술인의 밤 같은 분위기를 냈다면 아라리오 소극장, 퍼폼플레이스, 보안책방 등 여러 공간을 사용하고 공연예술계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작가군들을 섭외하여 꾸린 <퍼폼 2017>은 지난해와는 다른 관객층을 호출했던 것 같다. 퍼폼2017센터(갤러리 호아드)에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행사 및 참여 작가들의 굿즈를 팔고 있었지만 이외에도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사용할 수 있는 (퍼포먼스 기록) 영상 (작업) 링크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시도를 했다. 센터와 공연장 간의 거리가 멀어서 관객들이 불편을 겪었던 점이나 진행한 행사들의 밀도에 편차가 있었던 것 등 진행상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설정한 과제―“비물질 시각 예술 장르의 작품을 전시하고 유통”―가 명확했고 몇몇 공연은 예상을 뛰어넘었던 점에서 지속가능한 플랫폼으로 정착했으면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총총: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식

2017년은 연말에 좋은 전시들을 여럿 보면서 약간은 희망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특히 신민 개인전 <No>와 <W쇼-그래픽 디자이너 리스트>가 의미있었다. 2016년의 ‘미술계 내 성폭력’ 고발 이후로, 2017년에는 크고 작은 의미있는 움직임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두 전시는 특별히 긍정적이었다. 페미니즘이 화두가 된 이후로, 미술계에서도 페미니즘을 주제로 전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을 때 상상할 수 있는 익숙한 혹은 손 쉬운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공간 가변크기에서 열린 신민 개인전 <No>는 유토로 만든 작은 인물 조각의 전시와 관객이 그것을 가져가는 퍼포먼스로 구성되었다. 작가는 그동안 커다란 인물 조각을 주로 해왔는데, 자신의 방법론을 역으로 이용하여 조각의 속재료로 사용되던 유토로 한 손에 쏙 들어가는 작은 크기의 군상을 만들었다. 단호하게 “아니오”를 외치는 작고 강한 사람들이 관객의 손에 들려서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갔고, 그 모습들은 SNS를 통해 사진으로 공유되었다. 여성의 외침이 음성언어나 문자언어가 아니라 어떤 조형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W쇼>는 그동안 한국 디자인계에서 활동한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를 조명한다. 2015년의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은 서울의 그래픽 디자인을 다루면서, 마치 괄호 안에 여성을 표시하지 않으면 디폴트값은 남성인 통념처럼 남성 위주의 목록을 꾸렸다. <W쇼>는 그렇게 가려졌던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의 명단을 불러내고 그들의 역사를 기록한다. 언젠가 일상에서 탁월하다고 생각했던 여러 디자인을 전시장에서 여성 디자이너의 이름과 함께 다시 만났고, 전시장에서 처음 알게 된 여성 디자이너의 눈에 띄게 좋은 디자인을 보고 그 이름을 기록해뒀다.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던 여성 직업인들을 발견하는 것은 값진 경험이었다. 서문에서 말하듯이 그 명단이 “꾸준히 갱신되고 반박”되면서 여성 창작자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활발하게 생산되기를 바란다.



루크: 아트 선재의 두 모습

3월 28일과 6월 1일, 올해 아트 선재에 두 차례 갔다. <기업보고서: 대우 1967-1999>라는 이름의 대우 그룹 회고전이 열렸던 2017년 3월은 대우 조선이 정부에 거액의 지원금을 받으며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던 시기였다. 2-3층 전시장은 단정하고 세련된 ‘미술’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근로자들의 기름때 낀 작업복과 기구들이 유물처럼 놓여있고 이제는 ‘힙’해보이는 과거의 광고들이 연신 브라운관 TV에서 반복재생되었다. 대우는 미술의 예쁜 옷을 입고 한때 한국 사회의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을 새기고자 필사적이었다. 약 두 달 뒤 노순택 작가의 <비상국가 II – 제 4의 벽> 전시 오픈 전날의 아트 선재 2-3층 플로어는 기름때 낀 투쟁조끼를 입은 노동자들이 점하고 있었다. 괴물의 옆모습 같은 용산 참사 컨테이너의 불탄 잔해, 방패, 진압복, 쓰러진 노동자들, 그리고 촛불의 승리. 날선 폭력을 담는 프레임은 담담했지만 그 어느 현장에서나 렌즈 뒤에 서 있는 작가의 존재감은 진정성이나 기만적 심미화 같은 트집을 쉬이 허용하지 않는다. 노련한 독일인 기획자는 전시에 방해가 많아 외국인 큐레이터의 이름을 내세워서야 전시를 할 수 있었다며 웃었다.
        두 달 사이 선재의 정경은 우스울 정도로 달랐다. 대우 자동차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I would really like to have such a car”라고 말하는 외국인의 모습을 담은 앨범 대신 목이 잘리고 다시 기워진 이재용 부사장의 사진이 걸렸다. 그 두 달 사이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바뀐 덕분에 생긴 변화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택시운전사>는 천만 관객을 달성했고 <1987>에는 유명 배우들이 앞다투어 출연을 자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명량>이나 <인천 상륙작전>과 같은 “국뽕”영화들이 윗선의 지시에서 비롯되었다는 고발도 들려왔다. 민주의 승리는 세대적 집단 경험이 되었고, 이제 집권계층이 된 이들의 위인전기가 다양한 매체로 재생산된다. 사회의 집권 이념이 이동하면서 ‘저항’의 범주는 달라졌고 몇 개월 전까지 소리 높이던 가치들도 한 끗 차이로 이데올로기로 화할 수 있는 시점에 서있다. 노순택의 사진들이 그 자리에 걸린 것은 예술의 정치적 풍토가 변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정치적 승자에 대한 발빠른 대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진들을 쉬이 승자의 범주로, ‘촛불시민’의 가치로 뭉뚱그리는 것은 위험하다. 예술이 정치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하는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한 번 더 고민할 시기가 아닐까.



김뺘뺘: 기획전에 대하여

기획전은 간단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주제였는데, 응원하게 되는 전시가 반드시 (감각적으로) 좋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힘을 실어주고 싶었던 전시는 주로 긴 시간의 리서치가 겹겹이 쌓여있는 걸 보게 되었거나 기획자의 색깔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던 기획들―<그라운드후드>(기획: 이현인), <리드 마이 립스>(기획: 성지은, 이진실), <두 도시 이야기: 서사적 아카이브>(기획: 오선영)―이다. <그라운드후드>의 서문은 전시를 “일시적인 연대를 형성함으로써 자신이 설 곳, 자신의 땅을 찾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소개하는데, 이 서술을 읽기도 전에 전시 기간 동안 몇 차례 장소를 옮겨 다니거나(옮길 때마다 한 참여 작가가 본인의 리어카 집을 끌고 따라온다) 들어가자마자 온몸을 복실복실한 (가짜) 이끼로 뒤덮은 사람이 앉아있고(기념사진도 찍어준다), 자꾸 인절미 떡을 먹으라고 권한다거나 하는 분위기에서부터 벌써 무얼 하려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리드 마이 립스>와 <두 도시 이야기>는 각각 퀴어 정치학과 한국-인도네시아의 평행적인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는데, 각각 다른 이유로 전시로서는 아쉬움이 있었지만(전자는 전시가 서문이 제시하는 바를 힘겹게 따라잡으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후자는 한국 파트가 인도네시아 파트에 비해 갑자기 밀도가 떨어져 불균형을 이루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각 기획자의 다음 스텝을 기대하게 했다. 이외에도 특정 매체를 적극적으로 다룬 전시들도 있었는데, 기획자의 지속적인 리서치의 맥락이 없을 때는 매체를 단지 전시를 성립시키기 위한 손쉬운 알리바이로 삼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다른 한편 ‘젊은’ 작가들을 소환해서 열렸던 몇몇 갤러리 그룹 전시들은 전시마다 편차가 있긴 했지만 예상보다 재미가 없었다.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린 <직관의 풍경>은 특히 실망스러웠는데 출품작들이 묶어야 하는 당위성을 인위적으로나마 설득시킬 시도조차 하지 않은 듯 들쭉날쭉했다. 회화 작업들은 개별적으로 좋은 작업이었느냐의 문제는 별개로 그저 지루하게 반복되는 느낌으로 나열되거나 인테리어 소품처럼 소비되는 인상을 주었다. 특히 가설된 공간과 연동하여 특수한 상황 속에서 작동했던 작업들의 경우(김웅현의 작업이 특히 그랬다) 그 공간에서 매력이 반감되었다.
        무엇이 충족되야 좋은 기획전이 되는 걸까? 기획자의 리서치와 선택들, 텍스트, 공간, 각 작가의 작업, 전시를 둘러싼 제도와 구조 등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관점은 치열한 가치판단의 영역에 해당한다. 그에 비해 기획전의 가치에 대한 촘촘한 논의는 미진했던 것 같다. 짝수 해가 다가왔고 대형 비엔날레와 관련된 소식들이 들려온다. 이 이벤트들이 긍정적인 지지체가 되어줄지 부정적인 전거가 될지 당장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기획에 대한 치열한 논의들이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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