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PC (Reboot) Show] 『자본주의 리얼리즘』 리뷰

조주현, 『자본주의 리얼리즘』 리뷰

방 안에서 돌을 굴리며 놀고 있다. 그런데 자꾸만 돌이 굴러 들어가 끼는 틈새가 있다. 그 틈이 신경 쓰여 더 이상 놀지 못하고 틈새만 쳐다본다. 그런데 계속 쳐다봐서일까? 그저 기분 탓인가? 그 틈새가 점점 커지는 것 같다. 돌을 가져다 대본다. 끼일락 말락 자리를 맴돌던 돌이 틈새에 끼는 것 같다. 이제 틈새에 딱 맞게 끼어있는 돌. 돌은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킨다. 나머지 벽이 눌러와 부스러질 것 같아도 계속 틈새에 끼어있다. 끼인 돌은 곧 잊힌다. 그래도 돌은 벽과 땅 사이, 틈새에 계속 끼어있다.

<젤다의 전설>에서 게임 속 세상은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플레이어가 가는 곳마다 세계는 새롭게 펼쳐지며 플레이어는 자유롭게 게임 속에서 모험을 계속하지만, 게임이 설정해두지 않은 곳으로 떠날 수는 없다. 보이지 않고-개발자의 모니터에서는 그 끝이 보이지만-, 넘어갈 수 없는 경계가 존재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어떤 만연한 분위기-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있는 감각-에 가까운 것으로,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작용한다고 마크 피셔는 말한다.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말은 우리가 이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땅 위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으며 넘어갈 수 없는 경계 안에 살고 있다. 이 경계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틈새를 계속 쳐다본다. 여전히 돌은 벽과 땅 사이에 끼어있다. ‘미래는 어떻게 올 수 있을까?’ 하는 새로운 의문을 가진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언제 죽을 수 있을까? 멈춰진 죽음. 아직 현재에서 더 얻을 것이 많은 사람들은 현재를 멈춰둔다. 반복 재생되는 현재.

  반복되는 죽음.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 미믹이라는 외계종족의 침략으로 지구는 위기에 처한다. 미믹의 중심인 ‘오메가’는 시간을 역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오메가가 짜놓은 반복되는 전투 속에서 인간은 절대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인류는 열심히 싸우고, 주인공 케이지는 자살 작전이나 다름없는 전투 속에 던져진다. 그곳에서 알파 미믹의 피를 뒤집어쓴 채 사망한 케이지는 미믹으로 인식되어, 전투를 시작하는 날에 다시 깨어난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수 없는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케이지는 스테이지 클리어(오메가의 죽음)를 위해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반복되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복되는 죽음- 늘어난 현재 속에서 케이지는 더욱 강해진다. 하지만 현재 스테이지에서는 보스몹(오메가)을 죽일 수 없다.
반복되는 죽음으로 계속되는 전투. 아이러니하게도 오메가를 무찌르는 상황은 주인공이 리셋 능력을 상실한, 루프 플레이에서 벗어나 죽으면 끝나는-정말 죽게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멈춰놓은 현재를 깨고 나면 나오는 다음 스테이지에는 미래가 있을까?

마크 피셔는 빈틈없어 보이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실질적인 저항은 자본주의의 표면적인 ‘리얼리즘’에 리얼리즘이 없다는 것을 드러낼 때만 그것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항하는 한 가지 전략은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현실의 기저에 있는 실재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현실이 억압하려 하지만 자꾸만 비집고 나오는 실재를 마주할 때, 단단해 보이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틈새를 발견한다.

오랫동안 끼어있던 돌은 힘을 가진다. 자신을 둘러싼 벽의 틈새를 조금씩 넓힌다. 점점 커지는 벽의 균열. 돌은 벽의 균열을 환기시킨다. 미래가 두려운 벽은 틈새를 숨기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돌은 미래가 두렵지 않다.

 

이미정, 『자본주의 리얼리즘』 리뷰


다이어리 꾸미기에 열광했었던 어린이는, 스케줄러를 빼곡히 채우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고교시절에 사용했던 스케줄러를 펼쳐 보면, 아주 작은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쓴 흔적들이 보인다. 지금과는 사뭇 다르지만 낯익은 글씨체로, 하루에 순수하게 공부한 시간의 양과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어떤 것을 어느 정도로 기뻐했고, 어떤 것에 그 정도까지 낙담했었는지- 까지. 조금 가여울만큼 치열했던 청소년기의 시간은, 목표했던 대학의 합격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그 스케줄러는 성취의 역사가 기록된 나의 첫 유물이 되었다.

2011년도부터는 핸드폰과 노트북에서 연동되는 아이 캘린더를 쓰고 있다. 얇고 반듯한 선들로 그려진 네모 칸들, 놓여야 할 자리에 정확히 적혀있는 숫자들을 보면 어쩐지 안심이 됐다. 손가락을 가볍게 밀어올리면 보장되지 않는 ‘내일’들이 끝없이 펼쳐졌고, 반대로는 살아내온 ‘어제’들이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마치 가장 중요한 날인 것처럼 빨간 동그라미가 박혀있다. 오늘의 첫 번째 일정은 ‘외부 출강 (OO 복지관, 9명)_ 오전 10시’ – 밝은 녹색의 작은 동그라미, 두 번째 일정은 ‘YPC 책 읽기 모임 4회차_ 오후 6시 30분’ – 밝은 파란색의 동그라미다. 아이 캘린더에서의 ‘나’는 다섯 가지 색의 동그라미들로 칸칸에 들어차있다. 녹색과 파란색이 가장 많고, 검은색과 분홍색, 노란색 순으로 분포되어 있다.

 


세계의 유구한 역사는 잘 알지 못하지만, 지금의 내가 박탈당한 세대라는 것은 안다. 과거에 젊었던 사람들만큼 큰 것을 가질 수 없기에, 많은 것들이 쪼개지고 점점 작아지는 것을 체감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가질 수 있는 – 가지고 싶은 혹은 가지고 싶어 해야 할 – 대상이 아니라, 그 주체인 ‘나’까지 쪼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모양으로 잘 쪼개져야만, 조금이라도 더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이것은 나의 경제였고, 정치였다. 그러는 동안 세계는 무심히도 점점 더 편리해져갔다. 나도 조금은 능숙해졌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때는 깃발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멀리, 하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 어디쯤에 꽂혀있는 그럴싸한 깃발이다. 그 깃발은 충분히 멋져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 깃발로 향하는 길이 안전해 보였기 때문에 내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직선이었다고 생각했던 길이 언제부턴가 물컹거리고, 때로는 막혀있음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나는 뭔가가 필요했다. 그 땅 위에서 우아하게 도망쳤다가 결국은 다시 복귀할 수 있는, 안전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을 찾아 헤맸다. 문장은 무기이자 방패, 때로는 휴식이었다.

 


문장은 점을 찍으며 이어졌다. 이어진 문장들은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나는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로 수많은 나를 이해하고 싶었고, 그것이 즐거웠다. 피셔가 진술하는 세계, 미시적인 사례들에서 수많은 나를 대입해 볼 수 있었다.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받기 원하고, 지독히도 자기를 감시하는 엄격함,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무기력함에 공감했다. 어떻게든 할 수 있으면서도 어찌할 줄 모르겠는 ‘나’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특성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세계와 시대의 양상과 맞물리게 될 때, 나는 작은 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상한 안도감이다. 아주 무심한 친구가 건네는 “어쩔 수 없었잖아” 같은 – 위로 같아서.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언젠가부터는 ‘호기심’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궁금하기 때문에, 이 많은 것들을 하고 있다고. 아직 살아보지 못한 40대의 삶이라든가 (40대가 되면 고양이와 살고 있을까?), 아직 그리지 않은 그림이라든가, 가보지 못한 도시, 먹어보지 못한 음식 같은 것 – 현재 피부에 밀착되어있는 감각들이 미래에도 여전할 것인지, 내가 딛고 있을 땅의 형태가 어떤 모양일지 궁금하다. 궁금하기 때문에 인간은 궁리하게 된다. 삶에서 봉착하게 되는 위기나 한계 또한 매일, 매일 업데이트되겠지만, 나도 조금씩은 (어쩔 수 없이) 변할 것이다.

 


‘새로운 고행’으로 ‘모종의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는가?라는 질문에 어느 누구도 쉽게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아주 높은 확률로) 매일, 매일 ‘내일’이 온다.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는 것, 무례한 부탁은 잘 거절하는 것, 돈을 버는 것만큼이나 시간을 확보하는 것에 기뻐할 줄 아는 것,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옳은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 – 이처럼,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은 사실 아주 작은 것들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들이야말로, 피셔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말한 ‘구멍’이라 믿고싶다. 피셔의 마지막 문장을 빌린다. “가장 사소한 사건들도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서 가능성의 지평을 표지해 온 그 반동의 회색 장막에 구멍을 낼 수 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다시 한 번 무엇이든 가능해지는 것이다.”
구멍을 통해 엿볼 수 있을, 장막의 너머를 상상해보자. 투명해진 깃발은 무슨 색이든 될 수 있지 않을까. 땅은 끊임없이 흔들거리겠지만, 흔들리는 땅 위에서 출 수 있는 춤을 추고 싶다.

 


(참, 내일은 분홍색이다.)

 

정구원, 좋은 이야기를 찾아서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 / 때로는 사막에 내던져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시나요’ 단출한 어쿠스틱 기타 스트로크에 이어 이랑의 첫 노랫말이 “신의 놀이”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 어쩌면 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강력하고 비밀스럽게, 혹은 ‘자연스럽게’ 작동하고 있는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내적 파열을 음악의 형태로 느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은 2016년,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되기 2년 전의 일이었고, 아직 나는 이랑의 가사가 어떤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을지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좋은 이야기가 있어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 좋은 이야기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나요”라는, 뒤이은 노랫말이 의미할 수 있는 바에 대해서도.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다루고 있는 이야기 –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쓰는 시대에 자본주의가 ‘대안 없는 유일한 체제’라는 이데올로기적 자연화를 공고하게 만들고, 거기에 ‘대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움직임마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하나의 스펙타클로 포섭당하며, 새로운 문화적 동력이나 담론이 등장하는 대신 과거의 문화가 데이터이자 스타일로서 혼성모방의 과정을 겪고, 사람들이 네트워크로부터 흘러들어온 쾌락적이지만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지는 자극을 소비하며 우울증적 쾌락에 빠져 있는 일 – 는 나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정도는 다를지언정 부분적으로나마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가져오는 문제적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10대들의 집중력에 대한 근엄한 비판은 그런 국소적 문제의식이 가장 흔하게 드러나는 영역이 아닐까).

 피셔가 이 책을 통해 달성하는 것은 그러한 파편적 문제의식을 자본주의라는 구조 자체에 대한 탈자연화,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적 체제를 추구한다는 목적을 지닌 방향으로 향할 수 있도록 마치 깔때기처럼 돌려놓는 동시에 집중시킨다는 점, 그것도 매우 유려한 방식으로 집중시킨다는 부분이다. 그것이 ‘설득력 있다’고 함부로 단정하고 싶진 않지만 (일원론적 설명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분명 빈틈이 많다고 여겨질 것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그 유려함으로서 책을 읽는 사람의 의식에 생동감 있게 개입한다. 역자가 ‘학자 본연의 태도로 의도된 책이라기보다는 고전적인 팸플릿 혹은 위대한 정치 에세이의 전통에 더 가깝다’고 책을 평한 것은 그 점에서 매우 적절하다.

 다만 그가 “새로운 것이 없다면 하나의 문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13쪽)란 질문을 던지면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힘은… 자본주의가 이전의 모든 역사를 포섭하고 소비하는 그 방식에서 나온다” (15쪽)고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새로움’과 거기에 동반되는 사회적 상상력의 고갈을 논할 때, 나는 그가 일종의 모더니스트적 입장에서 현재과거적 시점의 혁신에 여전히 천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진다. 자본주의가 만연해진 상태에서 그러한 ‘회귀’가 파열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만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새로운 문화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있어서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문화적 논리로 정의된) 반복과 재조합이 과연 어떤 가능성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인가에 대한 반문이다. 여기에는 반복과 재조합이란 행위가 그 내부에 필연적으로 역사적 이해에 따른 상호작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가정하면서, “현재적인 것과 즉각적인 것만을 특권화하는 문화” (101쪽)에 저항적인 관념을 내포할 수 있다는 기대가 담겨 있다 (피셔가 “사이버공간의 모든 특징이 자본주의와 필연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150쪽)라고 말한 것이 이 반문과 연결되고 있다고 생각해도 괜찮을까?).

 조금 씁쓸하게도, 이러한 가능성을 떠올릴 때조차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반복과 재조합이 어떤 균열의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사례보다는 그것이 자본에 잠식당한 전형적인 반례, “회고에만 몰두하며 어떤 진정한 참신함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문화” (101쪽)를 가져오는 경우다. 나는 최근 10년간 대중들이 가장 지속적으로 열광했던 음악적 경험인 <나는 가수다>, <슈퍼스타 K>, <불후의 명곡>, <복면가왕> 등의 TV 프로그램, 과거의 명곡을 자신의 핵심 콘텐츠로 활용하는 동시에 경쟁 체제를 도입한 리얼리티 쇼들을 떠올리고 있다. 이들은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케이팝이나(그것은 팬덤의 열광이란 본질적으로 크지 않은 반응에 미디어가 과잉된 관심을 보이는 것에 가깝다) 몇몇 ‘성공적인’ 인디 음악의 사례보다(장기하나 볼빨간 사춘기는 말 그대로 ‘사례’일 뿐이다) 대중의 폭넓은 관심을 꾸준히 사로잡으며 피셔가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불모의 느낌’이라 표현한 의식을 확산시킨다.

 이들 프로그램은 ‘차트’로 대변되던 음악 시장 내의 기존 자본주의적 시스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티스트와 아티스트 사이의 ‘경쟁’이라는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탈락에 대한 불안정성을 자극하는데, 그 탈락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방청객 또는 시청자의 투표에 의한 것이라는 건 소비 주체가 지닌 어떤 거짓된 권력의 감각 – 직접 행동에 대한 환상부터 이들에게 부여된 상호 수동성의 함의에 이르기까지 – 을 불러일으킨다. 더불어 이들이 부르고 있는 것은 과거에 자신들이 지녔던 생동감이나 역사적 맥락을 상당 부분 거세당한 채 경연의 재료로서 호명당하는 ‘명곡’들이다. 극도로 보수적인 성격을 띠는 대중음악(경연에서 불리는 곡들의 상당수가 음악적 모험과는 거리가 먼 발라드라는 것 역시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조차 그 음악이 만들어질 당시 일말의 창조성을 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2010년대의 시점에서 과거의 음악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지체된 형태로 반복되며 새로움 대신 노스탤지어적 회고만을 재생산하게 된다. 사람들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영토에서 상상력에 대한 동력을 잃고 ‘과거’에 천착하게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 상황이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책들이 그렇듯이 『자본주의 리얼리즘』 역시 (시도는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날카로운 진단에 어울리는 확실한 대안을 만들어내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 하지만 ‘확실한 대안’이라 불릴 만한 뭔가를 제시하는 대부분의 책들이 내놓은 제안이 실상 ‘확실해 보였던 대안’만을 제공하는 데 그쳤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마크 피셔가 유려하게 펼치는 진단을 토대로 포스트-자본주의에 대한 상상을 펼치는 것은 결코 허무하거나 무력한 행위가 아닐 것이다. “신의 놀이”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이랑은 끊임없이 하나의 노랫말을 반복한다.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손혜빈, 책에 대한 작은 리뷰

 나는 산책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걸으면서 할 수 있는 잡다한 상념들을 좋아한다. 상념의 주제는 보통 ‘삶은 무엇인가’와 같은 터무니없는 것들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삶 속에서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딘가와 같은 답도 없는 우울을 핥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보면 언제나 이곳은 지옥이고 나는 전생에 큰 죄를 지었으며, 따라서 고문을 받는 중이라는 도피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최근 굿 플레이스를 보고 이런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신도 믿지 않는 나에게 삶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알고 싶은 무언가이다.

 6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깨달은 것은 이런 덧없는 상념에도 학교에서 배운 습관이 끼어든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훈련한 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물성 없는 생각이나 개념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겉멋이 중요했던 저학년 때는 쿨하고 세련된 이미지가 전부인 줄 알았지만, 훈련을 거듭할수록 결과물보다는 작업 이전에 선행되는 개념 내지는 기획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작업에 담긴 논리체계가 얼마나 단단한지, 전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그것이 매체와 잘 부합하는지 등에 마음이 움직였다(혹은 구린 결과물에 대한 합리화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가시화된 결과물을 보고 역으로 생각이나 개념을 추적하려는 습관이 자리 잡은 것이다. 학교를 벗어난 지금, 나는 산책을 취미 삼아 ‘삶은 무엇인가’와 같은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며 삶을 추적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담고 있는 이 현실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의 뿌리를 알고자 하는 시도들은 비록 적극적이지도, 생산적이지도 않은 단순한 상념에 그치는 데 안주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삶을 읽어내려는 나에게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방식을 제시한다. 그는 더 나은 삶에 대한 가능성을 거세당한 채 우울과 냉소에 빠진 우리와, 그 이면에 자리한 실체도 인격도 없는 국가, 그리고 국가의 음모를 실행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읊고 있다. 두루뭉술하게만 보이던 현상의 이면을 냉철하게 언어화한 이 책은 쳇바퀴 같은 삶에서 유체이탈하여 불합리한 구조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길 호소한다. 마크 피셔가 말하듯 세상에 대한 우울과 냉소만 남은 나에게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세상을 읽어내는 일종의 제안서로 작용한다. 삶을 추적하기에 아직은 미미한 내 사고의 근육이 이 책을 계기로 벌크-업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동시에, 책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커다란 비관을 읽은 듯한 무기력에 다소 기운이 빠지기도 했다(이 점은 저자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에서 극대화된다). 삶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생각하고자 하는 나의 시도들이 허망해지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세상에는 희망이 남아있는 걸까? 앞으로의 산책에 어떤 상념들이 자리하게 될까. 이해할 수 없는 이 세상을 읽을 수 있길, 그리고 이 책이 그 이해의 좋은 시작이 되길 기대한다.

 

총총, 우리 모두가 자본주의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를 원천적으로 비판하면서 혁명을 주장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가 최선의 체제임을 인정하면서 그 체제 안에서 이를 비판하면서 사회적 모순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수정자본주의적 입장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는 점점 더 발달하면서 전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순진하거나 시대착오적인 소리 취급을 받았고, 후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그나마 합리적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전자의 입장, 즉 자본주의를 원천적으로 비판하는 입장이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거의 잊혀져갔다. 그러나 피셔는 후자의 입장은 결국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지속하는 것이며, 그 자체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말한다.

 피셔는 결코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새로운 집합적 정치 주체’에 의해 이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그들은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철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상상력’이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설 수 있다. 이러한 피셔의 말은 근원적인 진리를 이야기 하는 철학자의 말만큼이나 추상적이다. 그러나 철학자의 말이 현실 언어의 층위를 벗어나 있다고 하여 진리가 아닌 것이 아니듯이, 피셔의 말 또한 구체적이지 않다고 해서 비현실적인 말로 치부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말의 구체적, 현실적 방안을 찾아가는 것이 그와 같은 의견을 가진 독자들의 역할일 테다. 공고한 자본주의 세계에서 개인으로서 우리가 할 일이 과연 아무것도 없을까? 모든 개인이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는 데 걸림돌이 되기로 마음먹는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이를테면 자본으로 자본을 불리는 일에 동참하지 않거나, 개인의 자본을 사회와 공유한다면, 그렇게 각자가 조금씩 다른 방식을 실천해본다면, 우리 사회의 모양도 달라지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었던 시절이 모두 사회주의 체제는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떤 하나의 체제를 선험적으로 이상향으로 설정하는 대신에,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것이 ‘사회적 상상력’을 키우는 일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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