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일기

바깥 일기
Journal du dehors

강혜민 사박 이서윤 이하령 한윤진
기획: 권정현

기간: 2022. 5. 13. – 6. 12.
시간: 오후 1시 – 7시 (월요일 휴무)
장소: YPC SPACE(서울시 중구 퇴계로 258 4층)

오프닝: 5. 13. 오후 5시

《바깥 일기》는 YPC SPACE에서 진행된 워크숍 〈창작자의 책 읽기 – 자기 고백의 서사〉에서 연계된 전시다. 워크숍에 참여한 다섯 명의 창작자는 한 달간 두 편의 책을 읽으면서 나의 경험과 창작의 관계를 고민하고 의심하고 강화했다. 우리는 자기 경험과 창작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했고,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관계여야 하는지,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내는지 이야기했다. 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편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정체성과 작업을 분리할 수 있을까? 작업에 실존하는 타인을 등장시키는 것의 윤리적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가 가진 소수자성은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전시의 제목은 아니 에르노의 책 제목을 따온 것이다. 『바깥 일기』(1993)는 에르노의 첫 번째 일기 작업으로, 자신의 경험을 담담하게 서술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과 상황을 드러낸다. 에르노 연구자들은 미셸 루르니에가 제시한 ‘외면 일기’라는 개념으로 『바깥 일기』를 설명한다. 외면 일기란 개인의 내면을 기록하는 일반적인 일기와 달리,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세계를 보기 위해 쓴 일기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번 전시는 맥락을 빌려 일기가 내면에 침잠하는 것으로서 감성적이라는 부정적 의심에서 벗어나 자기 경험의 표현이 사회적인 것으로 거듭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워크숍에 참여한 다섯 명의 창작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기 고백의 언어를 사용하는 예술가는 대개 여성(혹은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여성의 말하기 방식은 오랜 시간 폄하되어 왔다. 정체성과 작품을 분리해야 한다는 오랜 강령은 자신을 드러내는 여성의 언어를 ‘일기장’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사회적 소수자일수록 정체성은 작품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러한 정체성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강혜민은 과거의 일상에서 남은 자잘한 기억을 작업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그 기억에는 개인적인 경험과 자신이 나고 자란 한국의 사회적, 문화적 요소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그는 그러한 기억의 파편 속에 현재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고 믿고 지속적으로 그 기억을 들춰본다. 그가 반복해서 들춰보는 기억은 마치 항상 끼고 다니는 ‘애착 인형’처럼 그에게 붙어있다. 그의 작업에서 같은 소재를 반복적으로 겹쳐서 그려서 만들어진 텍스처는 닳도록 끼고 다녀서 손때가 묻은 인형을 연상시킨다. 

사박은 자신의 삶에서 발견한 순간을 작업의 소재로 삼는다. 시들어 가는 꽃,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성냥개비, 꺼내놓은 알약 같은 가까운 사물들은 직업인이자 생활인으로서 삶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발견되는 작은 파편들을 기록하는 그의 작업은 말 그대로 일기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나아가 사박의 그림은 단순히 대상을 묘사하는 대신 특유의 선과 색의 사용을 통해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가까운 것을 이질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럼으로써 사박의 사물은 일상의 공간에서 떨어져 나와 회화의 표면에 완전히 달라붙어 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서윤은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그림을 그린다. 그는 창작자의 작업이 결코 창작자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이 속한 시대를 반영하는 그림을 그린다. 그의 작업에서 시대는 직접적인 묘사나 재현으로 등장하는 대신에, 작가의 붓질에 의한 흔적으로 표현된다. 대신 친구와의 대화, 뉴스의 멘트, 책의 구절 등 시대를 반영하는 언어의 파편들이 그림과 함께 유기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인 것이고, 특수한 것이면서  동시대적인 것이다. 그는 캔버스 앞에서 붓을 움직이는 것이 사회로부터 손쉽게 떨어져 나오는 것인 동시에 사회에 대한 자신만의 투쟁이자 맞섬이라고 믿는다. 

이하령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것들에 기반한 작업과 글쓰기를 병행하면서, 둘 사이의 긴장과 충돌에 집중한다. 그는 작업하는 과정에서 선망하는 사람들에게 받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한 영향은 작업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동시에,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 되기도 하는 양가적인 것이다. 이번에 전시하는 입체 작업은 팬데믹 기간에 해외에 체류하면서 만든 것이다. 작업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밀가루, 포장지, 라텍스 등 주변에 있는 재료로 만든 조각들에는 그 시간을 보내는 작가의 감정과 생각이 질감과 형태로 그 표면에 쌓여있다. 

한윤진에게 창작 작업을 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곧 삶의 태도이자 방식이다. 그는 작업을 하는 시간에 지금 딛고 있는 곳에서 빠져나와 완전히 그 안에 몰입하는 경험을 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에게서 작업에서의 자기 고백의 자신이 겪은 특별한 경험이나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업에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을 그대로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변용’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은 상태가 변화함에 따라 달라지는 자신의 감정을 담고 있다. 

YPC SPACE는 전시 공간과 프로그램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초 워크숍의 결과물은 텍스트의 형태로 온라인에 공개될 예정이었지만, 전시와 프로그램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기를 바라는 의도에 부합하고자 이를 전시 형태로 확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시는 참여작가들이 워크숍의 과정에서 쓴 글과 워크숍의 주제를 확장하여 사유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을 같이 보여준다. 전시장에서 나누는 글은 워크숍을 마무리하면서 각자의 작업에서 자기 고백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쓴 것이다. 글쓰기가 본업이 아닌 창작자들의 글은 아주 빼어나거나 완벽하지는 않지만, 진심을 눌러 담아 쓴 글 사이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통찰은 우리끼리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었다. 워크숍의 시간이 다시 한 번 전시로 확장된 것처럼, 전시에서의 관객의 경험이 또 다른 형태로 확장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