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착 상태: 아카이브적 여정

교착 상태: 아카이브적 여정
DEAD END: Archival Journeys


김보경, 남화연, 다크-다크투어리스트, 류혜민, 이의록, 파트타임스위트 
기획: 유지원

기간: 2022. 7. 8. – 8. 7.
시간: 오후 1시 – 7시 (월요일 휴무)
장소: YPC SPACE(서울시 중구 퇴계로 258 4층)

오프닝: 7월 8일(오후 8시까지 연장 오픈)

《교착 상태: 아카이브적 여정》은 2022년 4월 YPC SPACE에서 진행한 세미나 “미술 아카이브 세미나 – 모으고, 분류하고, 기술하기”의 연계 전시다. 참여자는 다양한 형태의 미술 자료가 어떤 과정을 통해 아카이브로 정착하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다시 분류하거나 직접 콜렉션을 구성해보는과제를 수행했다. 《교착 상태》는 이러한 수행의 연장선상에서 아카이브가 형성되는 시간과 그것이 재배치되는 시간을 나란히 맞붙여 영구적으로 멈춰있는 아카이브의 상태가 어떻게 동적이고 상상적인 여정을 촉발하는지 보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아카이브는 19세기에 정립된 “퐁 존중의 원칙(Respects des Fonds)”과 역사주의 실증사학의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 19세기 초까지 프랑스의 국립 기록원은 이용자가 문서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해 기록물을 주제별로 재분류했다. 하지만 이는 막대한 노동력을 요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사건에 대한 문서 군이 각기 쪼개져 분류되는 문제를 양산했다. 이는 “나 자신을 지우고 사물만이 말하도록 하고 싶다”며 역사는 직접적인 증거의 조합으로 써내려가야 한다고 믿은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Ranke)로 대표되는 실증주의 역사관이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에 1841년, 출처가 다른 기록물을 혼합하지 않는다는 출처별 원칙과 기록의 원래 분류 체계를 임의로 수정하지 않는다는 원질서 존중의 원칙을 골자로 한 퐁 존중의 원칙이 도입된다. 1881년 막스 레만(Max Lehmann)은 프로이센 국립 비밀 기록원 아카비스트 회의에서 출처주의의 원칙을 보다 철저하게 적용하여 기록원 체제를 재정비했다. 유럽 곳곳의 기록 관리 원칙 및 실무 경험이 축적되어 19세기 말, 『네덜란드 매뉴얼』로 집대성되었고, 이로써 출처주의는 기록관리의 보편적인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상과 디지털 자료의 출현으로 기존의 질서가 도전을 받았으나, 출처주의는 여전히 기록관리의 대원칙으로 지켜지고 있으며 미술 아카이브도 이러한 자장 안에서 형성되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자료가 아카이브의 몸체를 갖는다는 것은 원칙상 본래 상태대로 고정된,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는 교착 상태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록물이 생성되는 당시에는 그것이 체계적인 질서에 의해 분류되어 영구 보관되는 상황을 예상할 수 없다. 동료와 대화를 나누며 끄적인 메모, 오직 자신만을 위해 출력해 본 원고의 초고, 출처 불명의 선물과 엽서, 훼손된 수기 주소록 등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 사물들은 시간이 흘러 어떤 시대의 부름에 의해 컬렉션, 시리즈, 아이템의 위계로 묶인다. 확인 불명의 자료를 반환하고, 희미했던 맥락 정보가 추가되고, 전문가의 자문을 덧붙이고, 자료별 접근 가능 여부와 방식을 결정하면 무질서했던 사물 군집은 마치 언제나 그랬다는 듯 가지런하게 정렬된 아카이브로 탄생한다. 이렇게 형성된 아카이브는 ‘그때 그곳’ 혹은 ‘그의 육성’에 다가가려는 이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정돈된 대체물을 제공한다. 이로써 아카이브를 통해 과거의 시점으로 탐험하려는 이들은 막다른 골목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처럼 자료와 탐구자에게 교착 상태로 다가오는 아카이브는 역설적으로 미래를 향한 기대로 부풀어 있다. 18세기 프랑스 형사사건에 대한 필사 자료를 집요하게 읽어낸 역사가 아를레트 파르주(Arlette Farge)는 자료가 언제나 불충분하게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아카이브가 지닌 “베일을 찢는 감각. 앎의 투명함을 헤치고 나아가는 감각. 불확실했던 긴 여행을 거쳐 드디어 존재들과 사물들의 본질에 가닿는 감각”에 집중한다. 파르주가 서술한 아카이브의 질감과 그 매혹은 다름 아닌 아카이브의 교착 상태에 기대고 있다. 기록물이 기원 그대로의 질서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신뢰와 미래의 연구자를 위해 원칙대로 기술되어 있다는 확신은 아카이브의 결핍을 비약적인 여정의 출발점으로 전환한다. 벽은 단단해야 박차고 나갈 수 있는 법이다. 정교하게 짜인 직물 사이 구멍은 오히려 상상적 계기가 된다. 무표정해 보이는 질서는 오히려 그것을 비집고 들어가 흐트러트리려는 욕망을 자극한다.이 전시는 국공립 기관 주도 미술 아카이브가 형성되는 과정을 경험한 류혜민, 확대할수록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점을 노출하는 과거 건축물의 이미지를 엮어 투명하고 반사하는 물질로 재구성한 김보경, YPC SPACE가 자리 잡은 퇴계로 258 건물에 남겨진 흔적과 체계적으로 수집, 관리되고 있는 서울시의 자료를 재료 삼아 이 공간을 다시 쓰는 다크-다크투어리스트, 실물 자료를 접근할 수 없게 되자 이를 오히려 비물질적이고 비선형적인 여정의 계기로 삼은 남화연, 민중미술의 유산을 동시대 시각 경제에서 소화하며 변혁적 동력을 찾고자 한 파트타임스위트, 일관된 서사와 진행의 대가로 남겨진 데이터를 그러모아 이미지, 텍스트, 사운드가 미끄러지는 재배치를 도모한 이의록과 함께한다. 참여자의 행적을 따라가며 동전의 양면과 같은 아카이브의 교착 상태와 이로부터 출발하는 여정을 만나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