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전시를 하나 보았다

– 김대환x이준용의 <네 눈동자 속에 누워있는 잘생긴 나> (2017.5.27-6.24 @코너아트스페이스)에 대하여

 

0.

고쳐 쓰기도 하고, 숭배하기도 하는 것. 판단하는 시선을 받고, 그 시선을 그대로 돌려주거나 꿀꺽 삼켜 버리기도 하는 것. 얼굴이 그렇다. 특히 압구정에서는 얼굴이 (재)생산하는 시선의 경제가 집약되어 있다. 지하철 역사의 광고판에는 큼지막한 얼굴들이 납작하게 반짝인다. 아크릴 표면이 너무 반들반들하여 거울의 역할까지 자처한다. 내 키만큼이나 큰 아이돌 멤버의 흠결 없이 반짝이는 얼굴이나 날렵하게 조각된 여성의 얼굴에 겹쳐 투사되는 뿌연 내 얼굴. 끊임없이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직간접적으로 상기시켜주는 반사체들 사이를 뚫고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성형외과의 입구로 들어가야 전시를 볼 수 있다. 그저 전형적인 병원의 외관을 입고 있어서 기억에 남는 특징 같은 건 없었다. 바닥도 벽도 가볍게 매끄럽게 빛을 반사하되 무거운 재질이었던 것 같다.

 

1.

갤러리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작은 공간이 있고, 우글우글 울어버린 드로잉들이 프레임을 걸쳐 입고 벽에 걸려 있다. 이 드로잉들은 얼굴을 마주하거나 전시하는 여러 상황들을 보여준다. 타인의 눈동자에서 안락하게 웅크려 코를 파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거나(<네 눈동자 속에 누워있는 못생긴 나>), 머리를 하는 동안 거울을 통해 끔찍한 꼴을 강제로 보고 있어야만 하는 한편(<미친이발사>) 뒤통수를 너무 세게 내리친 얼굴이 뜯겨 나간 자멸의 일상을 셀카로 찍는다(<어용노조원의 일상>). 타인의 시선, 거울, 혹은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승인 받는 장면 속의 얼굴은 주로 귀엽게 못 생겼거나 자글자글하게 우울하다. 자기 것이면서 자기가 볼 수 없는 많은 것들 중에 가장 보고 싶어하는 것이 얼굴이 아닐까. 굳이 못난 얼굴을 들이밀고 거울이나 카메라 같은 수단 혹은 타인의 눈치를 살핀다.

이처럼 얼굴을 본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반사체에 비친 얼굴은 그 얼굴 자체는 물론 반사체에 대해서도 말해주는 바가 있다. 무엇에 비추면 얼굴이 <인바운더>나 <아웃바운더>에서처럼 끔찍함과 먹음직스러움, 쾌감과 패배감이 동시에 스며오는 것으로 드러날 수 있을까? <내가 저지른 사랑>의 얼굴을 비추었던 렌즈는 못났지만 사랑하는, 좋지만 솔직히 예쁘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괜히 미안한데 억울하기도 한 렌즈를 투과하지 않았을까? 옆으로 넓고 큰 두 눈과 약간 튀어나온 턱, 그리고 좁은 콧구멍이 은근히 매력적이다. 무채색의 그(녀)는 똑바로 나를 쳐다본다. 그(녀)도 내 얼굴을 쳐다본다. 나는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그 맞댄 자리를 쉽사리 떼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얼굴을 마주하거나 전시하는 이준용의 장면들은 일견 자기애와 자기혐오, 그리고 자기기만과 자기파괴를 왕복하면서 자기 스스로에게 매몰되는 것 같지만 어느새 설득력을 얻고 갑자기 사랑스럽다는 보인다. 같이 있으면 골때리는데 계속 봐야 할 것 같은 얼굴들이다.

 

2.

좀 더 들어가보자. 유리창 밖을 내다보는 벽면에는 압구정 현대백화점(이하 ‘현백’)의 파사드가 그려져 있다. 파사드를 건물의 얼굴로 생각할 수 있다면, 벽화는 이 얼굴의 좌우를 바꾸어 그려 넣은 충실한 반사면이다. 심지어 거꾸로 가는 시계까지 걸어 놓았다. 현백-유리창-반사면의 구도 사이에 보행자와 관객들이 끼어든다. 현백의 건물은 네모 반듯한 형태이나 입구는 출처미상의 건축물(파르테논 신전이 그나마 가깝다)을 모방한 파사드로 나름의 고전적인 느낌을 내기 위해 애를 쓴 듯 하다. 원형이 무엇이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고대 그리스든 신고전주의든 서구적인 외피를 둘러 입었다고 해서 보행자들이 특정한 시공간을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짧은 역사를 어느 정도 만회하고 괜히 서구적인 느낌 같은 것을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현백의 껍데기를 재현해낸 벽화의 제목은 <The Second Coming>이다. 작가의 의도는 알 수 없으나 이를 그대로 해석하면 “두 번째로 오는 것”이다. 원작보다 못한 혹은 나은 속편들과 첫 번째는 아닌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서구 문명에서 이 표현은 주로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곳이 아무리 동방의 부흥 신화를 일구어 낸 저력 있는 나라일지언정 ‘세컨드 커밍’을 구세주의 다시 오심으로 읽어낼 여지는 희박하다. 초림을 알지 못하는, 아니 우리의 것으로 여기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재림이란 현백의 파사드와 마찬가지로 원본 없는 복사본일 뿐이다. 그 언제라도 적법한 계승자였던 적이 없는 극동의 민족은 잘은 몰라도 가죽만 벗겨와 대충 비슷한 분위기를 내고, 이를 재빠르게 복제해 냄으로써 곳곳을 점령하는 데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물론 이 “재능”에 완성도를 향한 집요함이나 주변 환경을 고려한 시뮬레이션 감각은 포함되지 않는다.) 압구정도 예외 없이 사이비 재림만 무한 증식하여 하나의 거대하고 납작한 세트장이 된 듯하다.

압구정 거리에 느낌내기용으로 세워 둔 파사드를 반사한 벽화는 무대의 배경 같은 것이 되어 그 공간 안에 있는 것들을 일종의 모델로 만들어 유리문 밖에 전시한다. 그런데 밖에서 유리 안쪽으로 이 쇼윈도를 들여다보려 하면 무언가 시선을 방해한다. 보통 시공 중에 유리가 설비되었다는 것을 표시할 때 붙여 놓는 테이프 같이 점토가 X표로 붙어있다. 거기에 유리가 있는 것은 뻔히 아는데, 그래도 유리가 있다는 것을 한번 더 알아보라는 자기지시적 표식은 유리를 기준으로 서있는 위치에 따라 현백에 X표를 치기도 하고 반사-현백에 X표를 치기도 한다. 현백과 벽화가 투명하게 마주치지 못하도록 막아 선다. 그 사이에 끼인 모델들은 무엇을 배경으로 삼고 누구를 향해 스스로를 전시해야 할지 두리번거린다. 유사-신전인 현백을 등지고 압구정 거리에서 행인 연기를 할 것인지, <The Second Coming>을 배경 삼아 쇼윈도 속에서 자리를 잡을 것인지. 후자라면 함께 자리 잡을 이들의 얼굴을 보자.

 

3.

벽화와 유리벽 사이에 제법 반듯하고 묵직해 보이는 단이 있고 그 위에 머리 세 개가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며 붙어 있었다. 갓과 귀를 공유하는 세 머리들이었다. <전설의 삼두상>의 얼굴들은 이황, 이이, 그리고 황희의 것이라고 한다. 무릎 정도의 높이라서 필히 그들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다. 이 선비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수리는 움푹 페어 있고 그 속에는 거울이 있다. 선비 삼인방이 어떤 점에서 훌륭한 지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효자였거나, 사리사욕이 없었거나, 충신이었거나 모두 다였던 것 같다. 어쨌거나 그들처럼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던 것은 확실하다. 이 전설의 인물들에 부여된 가치나 교훈의 구체적인 내용은 휘발되었고 이제는 얼굴만 동동 떠다니며 옳음 직한 것 자체를 지시하는 환유적인 존재가 되었다. 교육의 장에 등장하는 여러 형태의 기념비들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알기 힘든 옛 선조들의 얼굴을 임의로 소환하여 무용한 훈육을 시도한다.

그런데 청동색 점토로 만든 그들의 얼굴은 충분히 엄숙하지만 점토의 투박한 질감 때문인지 어딘가 어색하고, 삼두상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익숙한 구도가 아니기에 우리의 ‘얼’이 세 개 나란히 붙어있는 모습 자체가 낯설다. 하지만 가장 먼저는 웃음이 나온다. 각자의 목과 어깨도 없이 달랑 턱 위에서부터 시작하는 머리만 단에 붙어 있는 것도 모자라 세 머리들이 뒤통수를 공유하고 있으니 표정이 아무리 근엄해도 우스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니, 이 조형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미 코드화 되어 작동하는 얼굴-기호(코가 잘생기고 수염이 멋있게 난 아저씨상)와 교훈적 목적으로 이를 전시하는 진부한 방식(초상화와 흉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조형물이 이 관습들을 단호하게 조롱하기보다 “예, 예, 선생님, 물론 그렇습죠”로 요약되는 태도로 다가오는 것이다. “조선시대 테마파크”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중앙에 “우리 선조들의 지혜”라는 기구가 있다면, 그 안에 들어가 세 선비들의 귀나 코 따위를 쓰다듬으면 교훈을 읊어주거나 하는 장치가 있다면 바로 이렇게 생겼을까나. 클래식하고 서구적인 느낌만 주기 위해 출처불명의 코드들을 취한 파사드의 외피를 벗겨내어 반사하는 벽화와 마찬가지로 이 정승들의 얼굴 또한 규범 그 자체로 작동하는 얼굴의 껍데기만 구현되었다.

 

4.

그런데 이걸로 끝이 아니다. 벽화와 삼두상 사이에 정체불명의 물체들이 놓여있다. 현백-유리-삼두상-벽화의 일직선을 방해하고 시선을 더 복잡하게 하는 것들이다. 길들이기를 담당해 온 코드화 된 얼굴들이 유사 기념비가 되어 모든 방향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와중에 삼두상과 같은 재료의 조형물들이 주변에 놓여 있다. 딱딱하게 굳은 <혀>는 탄성을 상실한 채 수건 걸이 같은 것에 길게 매달려 있다. <귀>는 일정한 진폭을 유지하며 제법 단단한 형태로 바닥을 누빈다. <코>는 바닥에서부터 빳빳하게 서서 창 밖으로 보이는 압구정역 5번 출구 팻말과 평행을 이룬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신체 부위들은 각자의 제목 혹은 역할이 그저 임의로 지정되었다는 듯이 각자 갈 길을 가거나 가지 않는다. 이들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미담과는 전혀 다른 장르의 이야기를 송출한다. 임금님 “귀”는 뭐다? 거짓말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데 나는 거짓말을 좀 더 할까봐. 앗, 잠시만요! 천냥 빛 갚을 능력이 있는 “혀”는 뭍에 두고 와서 용왕님께 당장 꺼내 드릴 수 없어요…

군데군데에 자신에게 할당된 곽보다 한참은 더 커서 상당 부분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분홍 (스팸) 덩어리들이 벽에 기대어 서 있다. 몸통 군데군데 난 청록색 얼룩은 아마 곰팡이었던 듯싶다. 어느 부위인지도 모를 육류를 갈아서 규격 사이즈의 고기 덩어리로 가공한 것이 ‘스팸’일텐데, <굽혀서도 타이트한>의 몸통은 척추도 있고 발도 있다. 혼탁한 분홍 살덩어리는 제 집에 들어가려고, 혹은 얼굴을 뒤집어 쓰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하지만 이내 등골이 부러지고 만다. 뼈를 발라내고 발을 뽑아내고 살을 깎아내야 비로소 들어맞지 않겠느냐고 말한들 소용 없을 것이다. 주어진 집과 불화하고, 도저히 얼굴값을 할 수 없는, 난감한데 조금은 웃긴 상황이다.

말이 되지 않는데 동선과 시선을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하는 이 친구들은 너무 모든 것을 읽어버리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현백과 벽화가 투명하게 마주하지 않도록 그어져 있던 X표와 같이 이 친구들의 얼굴은 단선적인 시선의 맥을 끊어 놓고 형태와 의미 사이의 간격을 벌려 놓는다. 전시장에서 오래 지켜보았던 건 아니었는데, 전시가 끝나고 자주 생각났던 것은 끝내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너의 얼굴을 보면서 내 얼굴을 확인하는 일, 이 도시를 포장하고 있는 느낌만 내는 표피와 기념비들, 그리고 얼굴도 없으면서 존재감을 발산하는 것들을 빠져나왔다. 얼굴로 포화된 압구정 거리로 다시 들어섰다. 거리에 붙어있는 간판과 포스터, 역사 안 라이트박스에서 반짝이는 얼굴들을 지나치면서 “재미있는 전시를 하나 보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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