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을 찾아서 — 여성 오타쿠의 장르 이동을 통해 본 욕망의 동학

“하세베 군과는 잘 맞을 것 같긴 한데. 하지만 그는 예전 주인을 싫어하니까 얘기가 안 되려나.”

게임 〈도검난무〉[1] 2차 창작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커플 중 하나, 소위 ‘쇼쿠헤시’[2]의 접점은 단 한 줄의 대사였다. 저 대사 한 줄만으로 둘을 주인공으로 한 동인지가 한 행사에 수백 권씩 쏟아졌다. 일본의 저명한 명도(名刀)들을 미남으로 의인화시킨 캐릭터들을 수집하는 소위 ‘컬렉션 게임’의 일종인 〈도검난무〉는 론칭 후 4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일본 여성향 동인계에서 최대 서클[3] 수를 자랑하는 인기작이다. 게임이나 미디어믹스[4]의 인기를 넘어 해당 검을 소장한 박물관이나 검 주인과 관련된 콘텐츠의 수요가 폭증하는 등 문화적 현상으로까지 치달았다. 〈도검난무〉의 성공이 징후적인 점은 이 게임에 기본적인 세계관 외에는 뚜렷한 스토리가 전혀 없다는 것에 있다. 공간을 넘어 역사를 바꾸려는 적을 물리친다는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게임을 진행하더라도 해당 시공간에 대한 가벼운 인트로덕션과 그 시대와 연관된 캐릭터끼리의 다이얼로그만이 주어지며, 게임을 진행하는 기승전결의 줄기는 거의 제시되지 않는다. 각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네 장의 일러스트와 출진, 전투 등 상황에 따른 대사 몇 마디, 그리고 운이 좋다면 다른 캐릭터와 나누는 서너 마디의 대화만으로 존재하며, 팬들은 이것만으로 캐릭터를 사랑하고 아끼고 창작하며 기꺼이 재화를 지불한다.[5]

비단 〈도검난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날의 오타쿠 시장의 관심은 서사보다는 캐릭터의 디자인이나 설정으로 옮겨간 지 오래다.[6] ‘뷔페식 장르’라고도 불리는 캐릭터 중심 콘텐츠는 한 작품 내에서 되도록 많은 취향을 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캐릭터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한 작품 내에서 적게는 십여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 달하는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각각의 캐릭터를 최대한 동등한 비중으로 어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특정 캐릭터에 집중되는 서사를 되도록 피해야할 뿐만 아니라 각 캐릭터의 서사를 함부로 완결시킬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이러한 작품들은 대부분 메인 스토리를 따로 두지 않거나 메인 스토리가 있더라도 평행세계나 외전의 형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스토리를 파생시키는 식으로 기획된다. 특히 스마트폰 게임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모바일 게임으로 파생되거나 모바일 플랫폼에 맞추어 콘텐츠가 제작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이러한 게임들은 보통 한 달에 2-3회 주기로 이벤트를 개최하고 각 캐릭터들을 돌아가면서 내세우는 방식을 기본으로 취한다. 따라서 각 이벤트에는 주요 사건의 줄기보다는 발렌타인데이, 크리스마스 콘서트, 여름 합숙 등, 시기에 맞고 캐릭터성을 어필하기 좋은 짧고 단발적인 스토리가 제공된다. 때문에 팬들은 제공되는 서사 자체의 무게보다도 제공되는 일러스트의 퀄리티나 캐릭터들의 로테이션(이벤트의 등장 순서와 빈도)에 더 비중을 두고 작품을 평가하곤 하며, 나아가 캐릭터들의 일러스트와 기본적인 프로필만 제공되어도 그 캐릭터를 사랑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른다. 캐릭터 뿐만이 아니라 얄팍하게나마 존재하는 플롯 역시도 캐릭터의 설정을 내보이기 위한 배경으로만 제시되고, 캐릭터들 사이의 관계는 사건이 아니라 둘을 커플링으로 엮을 수 있는 여지로서, 즉 ‘떡밥’을 주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오타쿠 콘텐츠는 그야말로 다양한 취향을 아우르는 ‘맛집’이 되기 위한 경쟁이다. 〈도검난무〉는 이러한 납작함의 극단이 만들어낸 시대의 히트작이다.

이것은 오타쿠 문화 전반의 경향이라 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여성향 캐릭터 콘텐츠 시장은 지난 수년간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했다. 어쩌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여성이 덕질하기 좋은 시기인 것 같다. ‘SEGA’, ‘SQUARE ENIX’ 등 유수의 게임회사들이 여성향 콘텐츠 제작에 열을 올리고, 여성 오타쿠들이 사랑했던 작품들이 속속 리메이크되고 있다. 여성향 작품과 캐릭터의 선택지는 점점 다양해지고 철저해졌다. 캐릭터 콘텐츠는 서사의 깊이 대신 취향, 다시 말해 ‘모에 요소’의 그물망을 넓고도 촘촘히 여며서 그 그물에 걸려 지갑을 열 소비자들을 기다린다. 오타쿠의 욕망은 분화되고 계측되어 수치화되고 플롯 속에서 살아있는 것이 아닌 기댓값의 캐릭터로 구축된다. 그런데 여성향 작품의 경우, 이 계측에는 ‘여성’이기 때문에 부과되는 어떤 기대 역시 포함된다. 사회적으로 구축된 ‘여성’이 바랄 것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이상이, 그리하여 우상이 설정되는 것이다. 결국 이 ‘여성’을 위해 차린 뷔페는 마치 ‘레이디즈 세트’라는 말로 온갖 저칼로리 음식을 때려 박은 듯한 모양새가 된다.

국내 여성향 오타쿠의 대부분은 수입된 일본 콘텐츠를 자신의 ‘장르’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경향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다. 특히 2018년은 그동안 소위 ‘대세장르’를 이루던 소년만화들이 약세를 보이며 동인 시장이 정체되던 시기이다. 구심점이 되는 장르가 부재한 상태에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모바일 아이돌 게임을 전전하며 각개전투에 임하는 것이 작년 중순까지의 한국 여성향 팬덤의 경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판도는 갑작스런 대전환을 맞이한다. 〈전지적 독자시점〉(이후 〈전독시〉)이라는 한 소설이 혜성같이 나타나 동인계를 휩쓴 것이다. 〈전독시〉는 웹소설 플랫폼 ‘문피아’[7]에서 2018년 1월부터 연재되고 있는 현대 판타지 웹소설이다. 문피아는 압도적으로 중장년 남성 독자비율이 높은 소설 플랫폼으로, 소위 여성향 장르로 분류되는 로맨스나 BL은 거의 없고 무협이나 판타지, 스포츠 소설을 주로 발간하는 곳이다. ‘아재’들의 놀이터에 갑작스레 〈전독시〉를 보러 온 젊은 여성 오타쿠들이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전독시〉는 한 인기 없는 웹소설의 유일한 독자였던 주인공이 어느 날 소설 속 세계로 들어오게 되면서 소설에서 읽었던 내용을 활용하여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그린 현대 판타지 소설이다. 본래는 웹소설 소비층으로부터 입소문을 타고 알음알음 인기를 얻던 작품이 기존에 웹소설을 소비하지 않던 층에까지 전파되어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던 것이다. 특히 작품의 주인공 ‘김독자’와 그가 열심히 읽던 작 중 소설의 주인공 ‘유중혁’의 갈등과 유대가 본격적으로 심화되면서 두 캐릭터의 커플링 2차 창작이 무서운 속도로 늘어났다. 단순히 재밌는 작품에서 ‘덕질할’ 작품으로 변화한 것이다. 주 5일 연재되는 〈전독시〉의 문피아 연재분 구매수는 편당 2만 건을 넘으며, 창작 콘텐츠 블로그 플랫폼 ‘포스타입’[8]의 #전독시 태그에는 2500건이 넘는 2차 창작 작품이 등록되었다. 2019년 2월에 열린 〈전독시〉의 2차 창작 이벤트에는 오프라인으로 2000명이 넘는 동인이 참관했는데, 이는 〈어벤저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 개봉 당시 〈MARVEL〉 프랜차이즈의 2차 창작 이벤트에 맞먹는 규모이다. 이와 더불어 문피아에서 연재되고 있는 다른 판타지 소설들(〈내가 키운 S급〉, 〈백작가의 망나니가 되었다〉,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 등) 역시도 여성 팬덤 사이에서 단독 동인 이벤트나 수백 단위의 굿즈 공동구매를 성공시키는 등 급속도로 팬덤을 형성했다. 한국 여성 동인계에서는 매우 이례적이게도 소설이 ‘대세 장르’가 된 것이다. 하루아침에 여성 동인들의 ‘개척지’가 되어버린 문피아에서도 허겁지겁 여성 동인을 노린 기획홍보를 시도하거나, 공모전에 BL, GL, 로맨스 판타지 등 여성 취향의 장르를 추가하는 등 여성 소비자를 포용하는 마케팅에 나섰다.

텍스트에 대한 갑작스러운 열광은 놀라움을 넘어 징후적이다. 무엇이 이런 극단적인 변화를 이끈 것인가. 어쩌면 그들은, 우리는 서사에 목말라있던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텍스트 기반의 매체를 추구했다는 것을 넘어, 다시금 커다란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이 있고, 플롯이 있고, 시스템과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는 캐릭터들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인은 400편에 달하는 소설을 기꺼이 읽고, 얼굴이 묘사되지 않은 캐릭터들을 주저 없이 사랑하며, 플롯이 끝을 향해가는 큰 항로의 사이사이에 자신의 창작성을 발휘한다. 이제는 사라졌을 거라 믿었던 어떤 욕망들은 사실 내내 그들을 감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전독시〉의 성공을 거대 서사의 재집권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이르다. 플랫한 모에 체계가 한계를 보였다는 말도 아직은 어렵다. 여기에는 장르소설이라는 세계, 여성혐오, 반일감정과 민족주의, 동인 내에서의 세대와 취향의 분화 등 다양한 요소가 다층적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전독시〉를 향한 열정에 무언의 반발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중혁’과 ‘김독자’의 커플링을 지지하는 독자들은 “이게 BL소설이 아니라 일반 현대 판타지라니!”라고 외치며 둘의 관계성에 열광한다. 여기에는 ‘여성 팬층을 노린 떡밥이 아닌데도’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즉 이 관계가 기업이나 자본에 의해 내가, ‘여성’이 좋아하도록 미리 짜여지고 설정된 존재와 관계성이 아니라, (이런 반향을 기대하지 않았을 남성 작가의) 전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유대라는 사실에 열광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둘의 사랑에는 일종의 ‘진정성’이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관계성 자체보다도 이것이 ‘일반’ 판타지 장르에서 일어난 관계성이라는 것이 작품의 영업 포인트가 된다. 동인들은 자신을 위해 적절히 양념된 캐릭터와 관계성이 맛깔나게 썰려서 올라오는 밥상이 아니라 다시금 서사의 진행을 따라가며 캐릭터를 해석하고 관계성을 구축해나갔던 시절로 돌아가고자 하고 있다. 캐릭터 콘텐츠들이 대부분 기업의 주도로 철저한 기획 하에 제작되는 상황에서 〈전독시〉를 위시한 텍스트 매체로의 귀환은, 그래서 한편으로는 서사의 귀환이자, 취향을 구획하는 엔터프라이즈에 대한 반발이다. 여성 동인들이 때깔 좋게 차려진 뷔페를 마다하고 굳이 아재들이 버티고 선 고인 땅을 개척하러 흘러흘러 간 것은[9] 그냥 새로운 장르의 체험 이상의 절박함, 되찾고 싶은 진정성이 있었던 것이다.



[1] 정식 명칭은 〈도검난무-ONLINE-(刀剣乱舞-ONLINE-)〉으로 DMM게임즈와 니트로 플러스가 공동 제작한 웹게임이다.
[2]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 ‘헤시키리 하세베’의 커플링을 뜻한다. 두 캐릭터는 전국시대의 명장, 오다 노부나가가 소장했다는 검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3] 일본에서 동호회나 클럽을 의미하는 서클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동인 행사에 참여하는 개인, 혹은 단체가 사용하는 참가 단위. 코믹 마켓 등의 행사에서는 서클 단위로 작품을 분류하고 집계하므로 서클의 개수로 장르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4] 하나의 라이센스를 여러 매체로 제작, 론칭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성공한 특정 매체를 다른 매체로 옮기는 방식(소설의 영화화 등)이 주로 사용되었지만, 요즘은 애초에 여러 매체의 형태를 염두에 두고 콘텐츠를 기획하는 경우가 많다. 〈도검난무〉는 2종류의 애니메이션, 연극, 뮤지컬, 실사 영화 등 다양한 미디어믹스 파생작들을 보유하고 있다.
[5] 사실 도검난무 동인 시장과 미디어믹스의 성공은 어느 정도 역사적 맥락과 지방색을 적극적으로 차용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의 경우 일본인에게 사랑받는 명장인 오다 노부나가와 다테 마사무네가 소장했던 검으로서, 이 역사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가 2차 창작의 소재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 자체에서 제공되는 서사나 설정은 지극히 제한적이며,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검의 경우는 동인이 거의 처음부터 캐릭터를 구축하는 수준에 달하기도 한다.
[6] 이러한 경향 자체에 대해서는 이미 20년 전 아즈마 히로키가 지적한 바 있을 정도로 오타쿠 문화 산업 내에서는 새삼스러운 이야기라 할 수 있다. 《動物化 するポストモダン》(2001, Kodansha) 국역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2007, 문학동네) 참고. 그러나 이 글에서는 특히 최신의 여성향 콘텐츠에서 ‘동물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7] http://www.munpia.com
[8] http://www.postype.com
[9] 실제로 〈전독시〉의 여성 팬층이 막 늘어나던 시기에는 기존의 남성 중심의 팬층과 충돌하는 경우가 잦았다. 작가에게 BL 2차 창작물을 신고하거나 2차 창작 행사에 훼방을 놓는 등 명백히 여성 동인을 노린 사이버 불링 행위들이 자주 문제가 되었다.

답글 남기기

YELLOW PEN 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