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미술의 역사를 되짚어보자. 역사적으로 ‘미술’, 그러니까 ‘순수예술’이라는 개념은 자신을 기능적인 것, 혹은 상업적인 것, 실용적인 것, 수공예적인 것과 분리하면서 탄생한다. 즉 쓸모 있는 사물이기를 거부하고, 그 자체로 순수한 것으로 남으면서 존재하게 된다. 미술을 성립하게 한 것은 그러한 부정의 논리였다. 세속적인 것을 자신의 반대급부로 놓고, 순수하고 무용한 것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확립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그 역사에서 늘 고고하게 그 원칙을 지켜온 것은 아니다. 이미 미술의 역사에는 미술과 상품 사이에서 애매하게 자신을 위치시킨 사례가 여럿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사례는 예술적 가치로서 ‘반예술’을 추구한 사례가 아니다. 즉 순수예술의 개념에 반하여 새롭게 예술 개념을 정의하려 했던 예술적 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순수예술의 이념에도 불구하고 예술 시장에서 거래되는 예술작품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사례는 근본적으로 순수예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 자체로 상업적인 것, 즉 작품이 아니라 기능적인 사물을 생산한 미술가의 사례다. 즉 미술가가 미술과는 별도로 (그러나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 안에서) 미적으로 훌륭하면서도 기능적인 상품을 제작한 사례다. 그런 시도는 역사적으로 드물지만 있어 왔다.
대표적이고 전통적인 사례는 가구나 건축 같이 미술과 가까운 영역에 개입하는 것이다. 가구를 만든 미술가라면 제일 먼저 도널드 저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미니멀리즘의 대가인 그는 자신의 미술과 비슷하게 미니멀하고 모던한 스타일의 가구를 제작했다. 그러나 사실 저드는 자신의 미술 작품을 모방하는 형태로 가구를 제작하는 해서는 안 된다고,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1] 저드는 1960년대 말에 자신의 작품 중 하나를 변형해서 스테인리스 커피테이블을 제작한다. 그가 제작한 첫 번째 가구였다. 자신의 작품과 거의 동일하게 생긴 이 가구를 그는 실패작으로 생각했고, 이후 그는 가구와 작품을 분리하고자 했다. 비록 그 둘 사이의 외형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저드는 양자 사이를 완벽하게 분리하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는 개념이나 형식뿐만 아니라, 제작 방법, 판매 전략에서도 가구와 작품을 분리하려고 했다.[2]
그러나 저드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구는 그의 미술과 떨어질 수 없었다. 특히 갤러리는 오히려 그 가구들이 “아티스트 도널드 저드”의 디자인임을 강조하여 판매 수익을 올렸다. 1984년에 그의 첫 번째 가구 전시 두 편이 뉴욕에서 열렸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그의 미술 작품 전시 또한 근처에서 열린다.[3]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뉴욕의 한 동네에서 그의 미술 전시와 가구 전시가 동시에 열리면서, 그의 가구는 결코 그의 미술 작품과 떨어져서 보여질 수 없게 된다. 또한 그의 가구를 갤러리에서 전시함에 따라 더 넓은 디자인 시장, 일반적인 가구 시장에서 소비자를 두고 다른 가구와 경쟁하는 대신에 한정된 소비자, 즉 ‘교양 있는’ 부자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게 했다. 그의 가구는 그의 작품의 후광을 입어, 일반적인 가구 이상의 가격이 매겨졌다. 한편 저드의 가구는 ‘디자인 가구’로서는 수준이 떨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주류 디자인 미술관에서는 그의 가구를 소장하는 데 소극적이고, 디자인계나 건축계에서 저드는 비주류로 남았다. 결국 그의 가구의 지지자는 미니멀리즘의 대가로서 저드를 지지하는 사람인 것이다.
2001년에 쓰인 조 스캔런의 에세이 「자, 명품을 드세요」는 이러한 사태를 지적하는 글이다.[4] 그는 건축, 가구, 그래픽 디자인과 미술 작품을 뒤섞음으로써 장소, 기능, 미술 양식을 갖고 노는 작품을 ‘디자인 미술’로 정의하고, 명확한 경우(호르헤 파르도, 토비아스 레베르거)부터 아리송한 경우(하이모 조버니히, 그레고어 슈나이더)에 이르는 디자인 미술의 사례를 분석한다. 스캔런의 요지는 이들이 소비될 사물, 즉 사용가치를 갖는 작품을 제작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용한 사물을 만드는 데 실패했으며, 결과적으로 무용한 미술로 남았다는 것이다. 디자인 미술은 결국 기능이 아니라 기능의 사회적 가치로 대변되는 의미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정말 미적으로, 기능적으로 훌륭한 의자로서가 아니라 ‘미술가’가 만든 의자로서 팔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동시대 미술가는 미술의 은총을 입어 상품을 팔 수 있을까? 비록 의자로서는 자격미달일지라도 도널드 저드라는 ‘아티스트’의 이름이 붙어있다면 비싼 값에 소비하듯이, 서울의 미술가 아무개의 디자인 제품이라면 그의 이름과 함께 소비될 수 있을까? 경력과 인지도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아무개의 자리에 지금 한국미술에서 가장 유명한 중견/원로 작가의 이름을 넣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차라리 RM이 선택한 의자라고 알려지는 게 판매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2020년의 서울에서 열린 전시 《크림》을 돌아보자. 이 전시는 그러한 미술과 상품의 역학이 오늘날에는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크림》은 미술 작가가 운영하는 아티스트 런 컴퍼니, 즉 상업적 활동을 하는 회사의 전시다. 이들은 스스로를 회사라고 칭하면서 상품 혹은 서비스를 판매한다고 했지만, 그들은 무엇도 팔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들은 (일부 작가가 실제 사업자로 활동함에도 불구하고 전시에서는) 일종의 제스처로서 자신을 회사라고 칭하면서 미술을 할 뿐, 고객의 수요에 맞춰 필요한 제품을 경제 원리에 따라 생산하고 판매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그들은 ‘회사’라는 거짓말로 미술이 상품이 될 수 있는지 가늠해봄으로써 오늘날 미술이 놓인 상황을 반추한다.
CHN Sculpture House의 제품은 조각과 인테리어의 경계쯤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눈부신 LED 조명으로 빛나는 그것은 인테리어 혹은 상품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미술이기를 포기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pic.construction의 도면은 전시장에서만큼은 실용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하나의 이미지로 벽에 걸린다. Tiffany Kim Company의 프로모션 공간은 미술과 상품의 역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새로운 에디션이 ‘순수한’ 예술가 사치 장과 명품 브랜드를 가진 티파니 킴이 협업하여 만든, 단지 비싸고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예술적 숭고함까지 지닌 명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술은 그 숭고함을 통해 명품의 명분이 되어준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예술은 정말 명품의 명분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 Snow Business와 Long Live Love Inc.의 작품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Snow Business의 는 눈이 오지 않는 할리우드에서 눈을 파는 회사에 관한 작업이다. 인공적으로 제작한 눈은 눈이 내리지 않는 도시에 일시적인 마법의 순간을 만들어준다. 인공 눈은 잠깐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만, 실제와 섞이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다. 결국 그 인공 눈은 꿈처럼 짧고 덧없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한편으로는 희망과 기쁨을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미술의 어떤 부분을 닮았다. 오늘날 미술을 한다는 것은, 특히 서울에서 미술을 한다는 것은 짧고 덧없는, 작은 기쁨을 주고받는 일일지 모른다. 소박하고 소탈한 행복이 상징가치와 숭고함을 대신하여 미술의 존재를 지지해준다.
한편 Long Live Love Inc.의 홍보 영상은 정체불명의 신제품을 프로모션한다. 불신을 버리고 믿음을 가지라고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홍보 영상은 이것을 가질 때 심리적 만족감과 불안 해소를 얻을 수 있다고 설득한다. “우리는 이상한 세계에 살고 있어요. 이곳밖에 없어요 그런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이곳뿐이죠. 다들 살아 있으면서 죽어있어요.” 그런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이 이상한 세계, 아마도 미술의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미술에게 사회적 상징가치가 없는 시대에, 미술을 하기 위해선 남다른 믿음이 필요하다. 소비자에게 믿음을 강요하는 프로모션의 언어는 역으로 미술에 대한 믿음을 요청하는 데 쓰인다.
결국 《크림》은 아티스트 런 컴퍼니를 내세웠지만, 진짜 시장 경제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아티스트 런 컴퍼니라는 주제를 경유하여 미술이 무엇인지에 관해 질문하고 있다. 즉 그들은 미술이 상품이 될 수 있을지 실험해봄으로써 역으로 미술이 무엇인지, 미술을 작동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해본다. ‘디자인 미술’의 미술가들이 실제로 미술의 지위를 이용해서 상품을 팔고자 했다면, 《크림》은 상품을 흉내 내는 것으로써 미술의 지위를 테스트해본 것에 가깝다. 어쩌면 그들은 미술의 권위에 기대어 상품을 팔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미술이 상품에 영광을 뿌려줄 수 있는 시대가 아님을, 미술의 상징가치가 사용가치를 넘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님을 느낀 동시대 작가들은 이전과 같은 전략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도 새로운 전략을 찾느라 분투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앞선 세대의 전략을 따를 수 없는 시대, 그들은 미술을 비즈니스화 할 수 있을까? 늘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창안하며 사회와 관계를 맺어온 ‘미술’이 어떤 새로운 전략을 찾을지 열렬히 기대하고 있다.*
이 텍스트는 아카이브봄에서 개최된 전시《크림》(2020.7.3. – 7.31.)과 연계되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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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onald Judd, “On Furniture,” Donald Judd: Möbel, Furniture (Zurich: Arche Verlag AG, 1986); reprint in Donald Judd, Complete Writings 1975–1986 (Eindhoven, Netherlands: Van Abbemuseum, 1987), p.107. (Nina Murayama, “Furniture and Artwork as Paradoxical Counterparts in the Work of Donald Judd”, Design Issues (Volume 27, Number 3, Summer 2011)에서 재인용)
[2] Nina Murayama, “Furniture and Artwork as Paradoxical Counterparts in the Work of Donald Judd”, pp.47-59.
[3] 두 개의 가구 전시는 각각 101 Spring Street (1984년 11월 17일-12월 15일)와 Max Protetch Gallery (1984년 12월 7일-1985년 1월 5일)에서 열렸다. 미술 전시는 101 Spring Street와 동일한 시기에 Leo Castelli Gallery 갤러리 두 곳(420 West Broadway와 142 Greene Street)에서 열렸다(1984년 11월 17일-12월 15일).
[4] Joe Scanlan (with Neal Jackson), “Please, Eat the Daisies,” Art Issues (Los Angeles, January/February, 2001), pp.26-29. (번역서 알렉스 콜스 편, 『디자인과 미술: 1945년 이후의 관계와 실천』, 장문정, 박활성 역, 워크룸, 2013을 참고했다.)
*전시《크림》에 관한 기술은 필자가 이전에 쓴 글(총총레터14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