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터콰이즈에 핑크빛 잉크가 번져 섞인 배경 위로 거품과 레이스, 별들이 떠다니고, 거리의 풍경은 온통 파스텔 톤으로 아련하다. 셀화 애니메이션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이하 《세일러문》)의 화면은 지독하도록 ‘예쁘다.’ 배경을 정식으로 그리는 대신 만화 연출을 차용한 것은 제작비용을 아끼기 위함이라지만 지금 와서 본다면 그토록 어여쁜 세계가 있을까. 일상적인 도시의 풍경조차 러프한 펜화에 아련한 색채가 번지듯 채색되어 소녀의 로망을 구현한 동화 속 세계 같다. 시종일관 밝고 찬란한 화면에서 어둡고 칙칙한 색이 나타나는 것은 악당들이 등장할 때뿐이다. ‘미소녀 전사’들은 이 파스텔 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다른 소녀들의 순정을 지키기 위해 달리고 싸우고 빛을 발한다.
이미미의 세계 역시 그랬다. 여러 번의 전시에서 그가 구현한 전시장은 파스텔톤의 포장지로 싸인 팬시점 같았다. 첫 개인전 《고멘네 우니쨩 우니쨩 고멘네 ごめんね、うにちゃん うにちゃん、ごめんね》에서는 동그랗게 데포르메된 토끼와 고양이, 그리고 동글동글한 캐릭터들이 온통 핑크빛으로 칠해진 캔버스에서 노닌다. 전시장 곳곳에는 보들보들한 재질의 솜인형이 소품처럼 올라앉아 더욱 소녀 취향의 분위기를 만든다. 이런 정서는 단체전 《IMAGE WORLD: PART 1》과 개인전 《원 투 파이브 ! ♥ 1 2 5 !》에서도 유지된다. 핑크빛 가득한 세계에 소녀풍의 이미지와 장식들이 떠다니는 풍경은 다만 ‘귀엽다.’
오늘날 귀여움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전파력을 가진 미적 기호가 되었다. 그렇다면 귀여움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은 작거나 무력한 것에 대한 애호의 정동을 가리킨다. 따라서 귀여움의 감정에는 근본적으로 성숙과 미성숙, 강자와 약자 같은 권력적 낙차가 전제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약자에 대한 가학적인 일면을 가지고 있으며, 불평등한 권력구조를 공고히 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귀여움이 덕목으로서 부추겨지는 사회에서 주체는 무지하고 무해한 상태로서 긍정될 수 있다. 따라서 귀여움의 이미지가 재생산되는 상황은 미성숙 상태로 남아있고자 하는 욕망, 즉 책임과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의식이 상업적으로 확장되는 것과 연관된다. 그렇기에 귀여운 것은 일견 사랑스럽더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실에서 가동 불가능한 불구적이고 뒤틀린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미미의 작품들은 이 귀여움의 양면성을 적절하게 표현해왔다. 그가 구성한 전시장은 파스텔 핑크와 서브컬처 마스코트 캐릭터들이 가득하다. 귀여운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느낌이 들지만, 이 풍경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캔버스 속 캐릭터들은 왜인지 뒤틀려 보인다. 캐릭터들의 윤곽은 희미하고 형태는 일그러져 화면의 주제부가 되지 못하고 배경과 동화되어 그 공간을 부유하며, 그들의 축 처진 표정은 어떤 무력감을 표시하며 캔버스에 얹혀있다. 작가가 스스로와 동일시하는 마법소녀들은 노골적으로 괴이하게 뒤틀려져 귀엽기보다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가 된다. 캐릭터뿐만이 아니다. 《Corners 4 : We Move We》와 《원 투 파이브 ! ♥ 1 2 5 !》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색화나 오브제들은 캔버스에 특정한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물감을 굳혀 물감 자체를 사물로 만들고, 그것을 일종의 조각처럼 전시한 것이다. 지지대로서의 캔버스를 잃은 물감은 전시장의 벽면에 기대 겨우 스스로를 지탱한다. 귀여움이 가진 유약함과 무해함은 불안과 유동성으로 변주되어 쉽게 그 상태에 안주하지 못하게 한다.
《고멘네 우니쨩 우니쨩 고멘네》에서 작가는 만화 속 세계와 맞닿은 공간이라고 여겼던 아키하바라가 여성을 성적대상화하고 착취하는 곳이었음을 깨달았을 때의 슬픔을 고백했다. 귀여운 세상에 그저 몰입하기에 이곳은 아름다운 유토피아가 아니라 도피처이며, 그 이면에 작동하는 것은 억압과 자본의 논리라는 것에 작가는 눈감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메르헨을 꿈꾸면서도 그것을 온전히 아름다운 세계로 그릴 수는 없는 것이다.
《세일러문과 엄마》에서 작가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특이하게도 전시장이 아니라 어떤 모텔의 카운터나 방에 디스플레이된 작품을 촬영하여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이곳은 실제로 작가의 ‘엄마’가 작가의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운영하는 모텔이다. 천안 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한참 달린 곳에 위치한 모텔은 한가한 국도변에 세워져 관광객보다는 근처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이 머무르는 곳이다. 작가의 그림이 주로 전시된 201호도 본래 객실로 사용되다 지금은 빨래를 하거나 ‘엄마’의 휴게실로 이용되는 생활공간이다. 작가의 이번 전시에는 이 공간 자체에 대한, 그리고 ‘엄마’와의 관계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담겨있다.
<moon and mom>은 그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전시를 관통하는 작품이다. 캔버스 가운데 선명한 노랑, 핑크, 하늘색으로 그려진 ‘세일러문’이 마치 유리관처럼 투명한 상자 속에 누워있다. 이 그림은 어린 시절 ‘엄마’가 작가에게 사준 ‘세일러문’ 인형에 대한 추억을 그린 것이다. 작가의 기억에 남는 유년시절의 한 조각을 묘사한 이 이미지는 그동안의 작품들에 비해 본다면 왠지 위화감이 느껴진다. 원색으로 그려진 ‘유리관’ 속 세계와 달리 그 밖은 어둡고 칙칙한 갈색의 물결이 일렁이는 것이다. 그 갈색의 배경은 ‘엄마’가 사준 인형을 내려놓았던 그 유년 시절의 방바닥일 것이다. 그저 파스텔빛으로 가득한 가상의 공간을 건너가던 작가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현실의 방바닥이 나타났다. 이 어색한 ‘현실의 색’들은 이번 전시 작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엄마’, ‘엄마’의 옷, ‘엄마’가 생활하고, 보고 있는 풍경들이 캔버스에 담긴다. 모텔 카운터에 배인 ‘엄마’의 냄새는 왜인지 끈끈하게 붉고, 옥상에서 내려다본 포도밭의 전경은 진한 풀빛이다. 유년기에 살았던 대산빌라의 바닥이, 엄마의 셔츠가, 카운터에서 맞는 심야가 잠겨들 것 같은 묵직한 검은 색으로 채워져 빛바랜 벽지 위에 걸린다. 하지만 이 어두운 색감이 이 공간을 불편하거나 꺼림칙한 모습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캔버스에 담긴 모텔 곳곳의 풍경은 ‘엄마’의 삶의 터전이자 작가가 자라온 공간으로서, 작가가 그 공간을 되새기고 이에 집중한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이 전시는 어린 날 아들에게 기꺼이 세일러문 인형을 사주었던 ‘엄마’를 향한 화해의 제스처가 된다.
이렇게 ‘강변모텔’ 201호에는 펼쳐진 풍경은 그간 작가가 만들어온 전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귀여움의 세계가 미성숙와 불구의 상징이었다고 한다면 이번 전시에서 일어난 변화는 어떤 성장으로 읽힐지도 모른다. ‘오타쿠’ 작가가 드디어 자기만의 세계를 벗어나 현실과 화해를 시도하게 되었다는 그런 교훈적인 이야기 말이다. 그렇다면 이 전시는 비로소 귀여움이라는 미성숙한 단계를 극복하는 통과의례인 것일까? 하지만 현실과의 화해가 보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전시 영상 <세일러문과 엄마> 속 어머니의 인터뷰는 놀라울 정도로 매끈하다. ‘엄마’가 구성한 이야기 속에서 이번 전시는 서울로 올라가 성공적으로 작가가 된 아들이 고향으로 금의환향한다는 익숙한 서사로 안착한다. 작가로서의 아들은 다만 기특하고, 장한 아들이 된다. 작가의 행보는 언제나 ‘K-아들’의 정상성 서사로 읽어내기는 다소 어려운 것이었으나, 인터뷰 속에서 그것은 개성이거나 약간의 특이한 취향 정도로만 언급된다. 성숙과 성장이라는 근대적 개인의 서사 속에서 상상 가능한 갈등과 충돌은 봉합되고, 현실은 어떤 정형성으로서 작가를 옥죄러 온다.
그렇기에 이미미는 계속 ‘세일러문’이 되기를 멈출 수 없다. <moon and mom>에서 세일러문이 누워있는 투명한 상자는 마치 온실처럼 현실과의 경계를 지킨다.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온 ‘세일러문’은 여러 전시에 걸쳐 그와 동일시되는 이미지이다. 201호실 벽면에는 작가를 캐리커쳐한 듯 동그란 얼굴의 ‘세일러문’이 웃고 있는 <Sailor Mimi Moon>과, 《세일러문》의 남자 주인공 ‘마모쨩’과 ‘세일러 미미 문’이 키스하는 <mamo-chan to kiss>가 엄마의 초상과 모텔의 풍경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애니메이션 속 모습을 그대로 옮긴 ‘마모쨩’과는 달리 ‘미미문’의 모습은 거칠고 불분명한 터치로 이루어져 분명한 얼굴로 그려지지 못한다. 하지만 온전한 세일러문이 되지 못하는 애매한 상태야말로 그 자신의 초상이다. 그는 ‘세일러문’으로서의 그 자신을 ‘엄마’의 공간에 분명하게 밀어 넣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늘 과장되게 재생산하는 귀여움은 그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세계가 끊임없이 들이미는 규정과 경계를 건너기 위한 그의 돌파구였을 것이다
전시 영상 <세일러문과 엄마>가 시작되면 ‘엄마’는 아들을 위해 “천수경”을 읊기 시작한다. 이 정화의 진언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가운데 어설픈 ‘세일러문’의 분장을 한 작가가 꽃밭 사이로 달려간다. 튜브로 만든 양갈래 머리와 오버사이즈의 세일러복을 입은 작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세일러문》의 첫 오프닝에서 씩씩하게 달려 나가는 주인공 ‘우사기’를 연상시킨다. “동화 속 마법의 세계”에 빠져있을 수도, 다만 현실에 동화될 수도 없는 간극 사이에서 이미미의 달리기는 계속될 것이다.
이 텍스트는 이미미 개인전 전시《세일러문과 엄마》와 연계되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