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노 유키의 어느 날, 서울에서

나리타 공항 제3터미널에 있는 편의점 ‘로손’에서 산 티셔츠. 잘 어울려서 실은 웃고 있다.

08:30-10:00

지갑, 와이파이 기기(무제한), 노트북, 일본에서 가지고 온 책, 휴대용 우산을 가방에 집어넣는다. 노트북을 켜서 작업할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냥 들고 다니는 건 현대인의 직업병과도 같다. 맞다, 겉옷도 좀 챙겨야지. 일반열차도 춥고 급행은 더 춥다. 심지어 애매하게 출근 시간과 겹친다. 앉을 수 있으면 다행이고, 계속 서서 갈 수밖에 없다면… 그것도 운명이다. 아, 객실 키. 나는 항상 번호가 적혀 있는 카드 키 커버(종이)를 같이 들고 다닌다.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즈니스호텔 토요코인 인천부평의 장점은 여러 개 있지만, 그중 하나는 엘리베이터 수가 넉넉하다는 점이다. 다섯 대가 움직이니 덜 혼잡하다. “다녀오십시오” 이제 슬슬 여기가 집 같단 생각이 든다. 혼잣말처럼 말하던 목소리도 이제는 전보다 살짝 커진다. “다녀오겠습니다.”

10:00-10:30

대부분의 전시장—대안공간,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 신생공간(?)—은 대체로 오전에 문을 열지 않는다. 다들 쉬고 있다. 오전부터 전시를 볼 수 있으면 얼마나 (동선 짜기에도) 편할지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각자 사정이 있을 것이다. 하루에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이다—그들도, 나도.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잘 안되고, 힘들면 침대에 바로 뻗는 30대가 되고 나서부터는 타인의 건강을 염려하게 되었다. 비록 전시장의 운영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심지어 지금 전시하는 작가를 아예 만난 적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환승 없이 1호선을 계속 타다가 종각역에서 내린다. OCI미술관에서 열린 세 개의 개인전을 본다.1 10시 되자마자 입장. 공교롭게도 이주영[이미지 1]과 경제엽[이미지 2]은 최근에 작가론을 쓰기도 해서 더 반가웠다.2 몇 년 동안 작가의 행보를 따라갈 수 있는 게 얼마나 운이 좋을까 생각해 본다. 경제엽의 전시에는 식당에 종종 걸려 있는 연예인 사인처럼 쓸 수 있는 참여형 방명록이 있었다. 나는 가상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적었다. (이 날은 덥고 장어가 땡기는 날이었다.) 

[이미지 1] 이주영 개인전 《Wet Word Whisper Wide》(OCI미술관, 2025.6.12-7.26)
[이미지 2] 경제엽 개인전 《먹고사는 것》(OCI미술관, 2025.6.12-7.26))

10:30-11:30

택시를 타고 산으로 이동한다. 서울은 도쿄나 사이타마3보다 산이 많다. 여유가 있으면 버스로 이동하고 오르막을 걸어 오르기도 하는데, 제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작년 이때는 양희성, 재작년은 김민조의 개인전4을 보러 누크갤러리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이번엔 오종의 개인전 《여름 삼각형》[이미지 3]이 열렸다.5 낮에 밤 풍경을 상상하다 보니, 수영학원 끝나고 차에서 내려 주차장에서 밤하늘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의 여름은 이렇게 또 지나가고 있다. (여름은 시작하는 것도 끝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지나가는 것, 설령 그렇지 않아도 ‘지나감’이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전시장에 켜진 불빛과 바닥에 반사된 불빛을 본다. 별과 별을 손으로 이어봤던 기억이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이미지 3] 오종 개인전 《여름 삼각형》(누크갤러리, 2025.7.4-7.26)

여름이었다…

밖에서 기다리면서 여름 같은 여름의 시간을 잠시 보내기. 택시는 금방 잡혔다. “이렇게 가는 게 맞아요?” 목적지만 입력되는 시스템에 과정은 종종 생략된다. “어.. 네 맞는 것 같아요” 내비게이션을 같이 보고 갔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야 했다. 박다솜의 개인전 《매달린 그림》6은 2년 전에 글을 썼을 때7 봤던 작업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접혔다가 펼쳐진 화면 안에 뻗어 있는 촉수나 척추 같은 표현이 화면을 스스로 들어올려, 펼쳐서 보여 주는 것 같았다[이미지 4]. 

[이미지 4] 박다솜 개인전 《매달린 그림》(에이라운지, 2025.7.9-7.26)

11:30-12:20

경복궁역 방향으로 돌아와서 전시를 보려고 했으나, 시간상 오늘은 패스하고 택시로 두산갤러리로 이동. 지난번에 오온에서 열린 전시8에서 아티스트 토크9를 들은 안진선 작가가 참여하는 전시였다.10 일전에 무음산방에서 했던 개인전11을 놓친 경험도 있어 보러 갔었다. (물론 다른 참여 작가의 작업도 궁금했다.) 소위 말하는 지지체를 연상시키면서도 마치 이 안에 혹은 위에 신체가 있을 것만 같은 묘한 감각을 안진선의 작업에서 느꼈다[이미지 5]. 비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오히려 인기척이 작품을 둘러싸서 보였다. 전시를 다 보고 이번엔 버스로 이동한다. 청량리수산시장에서 내리면 생선을 파는 가게, 과일을 파는 가게 등등 보인다. 미술계 시장은 그렇게 관심이 가지 않지만, 수산시장이나 청과물시장은 항상 입가에 웃음을 지으면서 혼자 재미있게 보고 있다. 더 윌로는 시장 안에 있는 전시장이다. 여기서 열린 한상아 개인전[이미지 6]12의 전시 소개문에 첫 개인전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위켄드에서 봤던 2018년 전시13, 작가를 만나 글을 쓰게 된 2019년 송은아트큐브 전시14. 두 전시장 모두 기억 속에 있다. 오늘 본 전시도 기억의 하나가 되겠지.

[이미지 5] 《Ringing Saga》(참여 작가 구동희, 김보경, 안진선, 이유성, 홍이현숙, 두산갤러리, 2025.6.4-7.12) 중에서 안진선 작업
[이미지 6] 한상아 개인전 《살과 섬광》(2025.7.7-7.31, 더 윌로)

간주곡

자주 다니던 전시장이 운영을 중단하거나 사라지면, 그때 느끼는 감각은 참으로 묘하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으로 검색하고 경로를 찾아 방문했던 그곳, 이제는 갈 일이 없으면 전에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모호해진다. 위켄드는 영등포역에서 내렸었나, 차재민과 우한나가 같은 시기에 개인전을 열었던 그곳15은? 지금도 그렇게나 많이 돌아다니는데 소쇼16가 있던 자리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소쇼룸17은 더욱더 그렇다.) 과거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내가 너무 과거에 얽매여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실제로 그럴 수밖에 없다. 전시장에서 전시를, 작품을 보고 남는 것은 정말 미미하다. 글을 쓴다는 업무와 별개이면 더더욱 그렇다. 전시는, 잘, 그러니까 똑똑히 볼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셨어요?” 당장 답하기 어려운 말들을 사후적으로 엮어가는 과정이 적어도 나에게 전시를 보고 글을 쓰는 일로 지금까지 이어진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나는 “잘 봤다”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짐정리하는 ‘곶’. 나도 누군가를 반갑게 맞이하는 곶이 되고 싶다. 간절곶 시급.

16:00-16:40

미팅을 함께 진행해 주신 선생님이 나를 전철역에서 내려주셨다. 시간은 16시를 넘었는데 아직 해가 떠 있다. 이래서 서머 타임이 필요하나 싶다. 착각에 빠지기 쉽지만, 전시장은 대부분 19시에 문을 닫는다. 머리로 동선을 다시 짜 보고 움직인다. 숙소는 어차피 서쪽이니 그 방향으로 가는 길에 전시를 몇 개만 더 볼 생각이다. 2호선으로 올라갈지 내려갈지 고민하다가 올라가기로 했다. CDA에서 열린 백두리 개인전을 봤다.18 바깥 날씨는 무섭지만, 전시장 안에서 빛은 포근하면서도 시원했다. 아마도 스며드는 표현 때문에 그런 것 같다. 화면 안에 들어가는 듯한 경험은 감상자를 감싸듯 다가왔다. 망막에 녹음과 스며드는 빛이 맺혔다가 아른거린다. 덥지 않은 아지랑이 혹은 신기루[이미지 7].

[이미지 7] 백두리 개인전 《만끽》(CDA, 2025.6.20-7.19)

16:40-18:00

신설동행 열차가 방금 떠났다. 성수역에서 ‘지하’ 아닌 ‘지상’철을 잠시 탄다. 홍대입구 방향으로 이동하기. 방학 기간이지만 사람은 여전히 많다. 홍대입구역 주변은 사람이 많아서 매번 이동하기 힘든데, 내가 여기에 5년 정도 살았다는 게 신기하다. 시간상 하나만 봐야겠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다가 자꾸 도착 시간이 바뀌고 애매해지자 나는 그냥 걸어갔다. (나의 걸음은 빠르다.) 챕터투는 다음에 봐야지.19 씨알콜렉티브에 도착하자마자 사람을 만난다. 전시 중인20 김정은 작가와 제대로 인사도 나눈 적도 없었지만, 판데믹 기간에 서신 교환하듯이 작은 교류가 있었고, 그와 별개로 작년에 두 번 열렸던 프로토타입 형 전시를 봤다.21 일전에 열린 두 전시를 보니까 이해가 더 잘 된다. 하얀 화면에 렌즈가 순간적으로 만나 이미지를 보여 주듯 지도나 조감도의 이미지, 그 안에 점멸하는 빛이 보인다. 우연히 만난 우리처럼, 만나고 다시 떠난다[이미지 8]. 

[이미지 8] 김정은 개인전 《스핀-스팟》(CR Collective, 2025.6.17-7.26)

18:00-19:00

Hall1의 전시22는 남은 체류 기간 중 들러야겠다. 최근에는 홍대-합정-망원 주변 전시장은 숙소와 그나마 가까워서 저녁 시간대에 방문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별관23은 종종 휴관일 없이, 심지어 저녁 8시까지 전시장이 열리기도 하는데 이번엔 전시가 없었다. 새로 열린 전시 공간 컷더케이크에 작년에 글을 쓴 곽지유24가 참여하고 있었다[이미지 9]. 3인전25인데 조정수의 작업은 처음 봤고, 최은지의 작업은 공간형26에서 본 이래 오랜만에 봤다. 포스터와 배지를 구매했다. 굿즈에 취약한 사람이다. 그동안 무료 배포로 받거나 구매한 포스터는 말아놓은 상태로, 배지는 비닐을 뜯지 않고 서랍에 보관하는 사람이다. 정리가 잘 안 되어 있고, 심지어 찾아보지도 않는다. 사 놓기만 하면 만족해 버리는 성격은 전시 리플릿, 서문이 인쇄된 종이, 스티커까지 버리지 않고 보관한다. 부피만 쌓인다. 기억하고 싶어서? 기억을 다시 건져 올리길 원해서? 일단 뭐라도 갖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서?

[이미지 9] 《오이풀과 소금꽃》(참여 작가 곽지유, 조정수, 최은지, 컷더케이크, 2025.6.20-7.13) 중에서 곽지유 작업

연락을 드리는 걸 굉장히 조심스러워한다. 조심스러워하는지, 귀찮아하는지, 구별을 안 하고 있다는 게 정말 핑계 대는 것 같다. 계시면 인사해야지… 그런 마음으로 방문한 류정하의 개인전27을 조용히 보고 나왔다. 아이디어회관에서 열린 단체전28에서 글을 쓴 적이 있지만, 그때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간이 부족했다. 아쉬움은 늘 따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만나겠지? 하는 믿음이 결국 다음 전시나 다른 전시로 이어지는 것 같다. 어찌 되었든, 어떻게 되든, 방문한 이상 전시를 본다. 도예의 물성이 액체를 만날 때, 덩어리에 맴도는 생기가 담긴다[이미지 10]. 그릇이 가진 본연의 속성도 어쩌면 그것이 아닐까. 다른 재료를 담은 상태로 거기에 있기—부피가 커졌지만, 여기에는 그릇의 본성이 느껴졌다. 물론, 작가는 정작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지 10] 류정하 개인전 《두꺼운 벽, 얇은 떨림》(WWW SPACE2, 2025.7.2-7.13)

19:00-20:00

오늘은 여기까지. 결국 노트북을 켤 일이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한쪽 어깨만 무겁다. 책을 읽고 싶은데 펜을 들 여유가 없어서 결국 유튜브를 튼다. “작별 인사는 눈물과 정반대… 식은 커피 같은 것…”29 따뜻한 커피가 식어 버리기 전에, 생각이 휘발되기 전에, 뭐라도 써보는 것 같다. 메모장에, SNS에, 리플릿 구석에, 그리고 지금 머릿속에. 그곳은 내 소원을 힘껏 외치는—외쳐 봤자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허공이 아니다. 울려 퍼짐은 얼마 안 가 벽에 부딪혀 금방 내게 다시 돌아온다. 이 작은 휴대폰 화면처럼, 결론도 주장도 없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썼다 저렇게 썼다를 반복하면서 맴돈다. 글쎄요, 어쩌면 식은 커피에서 날아간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 붙잡고 싶어서, 글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20:00-

숙소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 나온 이 파란색 청년(?)은 어디로 갔다가 지금 돌아왔다고 생각할까. 계획했던 일정을 다 소화하지 못했다. 혼자 먹는 저녁을 고민한다. 고민하는 시간이 아쉽지만 점심도 못 먹었으니 뭐라도 좀 먹을까 하는데 막상 입맛도 없고 다시 나가기도 뭐하다. 내일은 부산행이다. 일찍 자야 머리도 제대로 돌아가겠지. 부산은 더 더울까, 시원할까. 미리 공유받았던 포트폴리오도 다시 봐야지. 작품을 보고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이전 전시와 어떤 점이 달라졌을까. 다루는 매체가 다양할 때, 어떻게 주제와 연결하고 표현하는지. 간단하게 씻고 반신욕은 이따가 해야지. 하루만 여유가 있었으면 1박 하고 싶은데 아쉽다. 역에서 홍티아트센터30까지 걸어갈 수 있겠네. 바다도 보고 바람도 쐬고. 알고리즘이 세븐일레븐 한정 컵라면을 알려줬는데 숙소에서 세븐일레븐까지 거리가 좀 애매하다. (심지어 호텔 바로 옆의 CU는 오픈했는데 몇 달 전부터 계속 내부 수리중이다.) 일단은 뭐라도 먹자. 오늘은 덜 걸었으니 산책 나갈 겸 걷자. 해가 아직 떠 있는 걸 보니, 일본과 한국이 시차가 있는 게 확실하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태그를 한다. 이게 정성인가? 과시인가? 관종인가? 답신이 오자 나도 회신한다—“잘 봤습니다!” 느낌표가 너무 별로인가, 몇 마디 적는다, 과연 이게 상대가 원하는 대답인가, 에라이 모르겠다, 그래요, 대부분 잘 몰라요. 잘, 똑똑히 봐야 거기서부터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적어도, 여기에 물음표가 붙은 이상, 나는 이걸 계속 고민하고 싶은 것 같다. 전시를 보고 글을 쓰는 일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헤매면서 생각해 보는 일에 대해서. 시차를 동반하면서 정리하는 일에 대해서. 


콘노 유키

콘노 유키는 한국과 일본에서 전시를 보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좌우명은 우왕좌왕. 숙소에 있을 땐 ‘마계의 헤르미온느’, 걸어다닐 때는 ‘콘길동’이 되어 여기저기 다니면서 ‘콘리단길’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최근의 이동 중 BGM은 쿠도 시즈카의 <폭풍의 본모습>(2001)이다. 工藤静香 嵐の素顔 “소라가 오~치~레바 이~이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