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하기와 미술 하기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러자 준비할 것들이 마구 생겼는데, 대부분 일상적이지 않은 과업이었다. 일과 여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 일들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상견례 자리 만들기. 상상의 범위에 없던 금액의 대출을 일으키기(거절 받기). 드레스 입기. 사진 찍기… 생소하고, 자극적이고, 여러 감정을 동반하는 일들. 수치심과 쾌락, 모멸감과 기쁨을 주는 순간들. 나는 이것들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모르는 채 곤란해하고 있다. 내가 알던 내 모습이 반쯤 뜯겨나가고 절대 내가 아니라고 자신했던 모습이 그 자리를 채운다. 

결혼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습성들을 고쳐가고 있다. 이를테면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약속했고, 전 애인을 친구로 두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내 결핍이 관계 속에서 불안과 회피, 파괴적인 방식으로 표출되는 순간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런 다짐은 창피함을 동반하지만, 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도적으로 인정받는 안전망 속에 진입하려 한다. 물론 결혼이라는 형식을 통한 관계 맺기가 아닌 다른 방식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혼 생활이 여자를 어떻게 고립시키고 몰아가는지 지켜보았고, 추상적으로나마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약속하는 포근함, 안락함, 윤택함이 실은 내가 아주 오래 바라왔던 것이기도 하다. 규범을 욕망하는 일은 부끄럽다.

그러니 결혼을 준비할수록 규범에 가까워진다는 기분이 들면서, 동시에 미술로부터 멀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행복한 결혼을 열망하는 일은 제도의 의도에 정확히 부합하는 일이고,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부양하는 일이라고 과도하게 몰입해서일까? 문제는 내가 믿어온 미술의 아름다움이 제도와 규범이 배제하는 욕망을 꺼내고 발견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상처와 쾌감을 동시에 쫓고 욕망을 숨기지 않으면서, 자기 실현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운동을 지속하는, 때로 별것 아니라는 듯 거짓말하는 전시와 글과 작업을 좋아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어쩌면 알았더라도 주의 깊게 여기지 않았을 욕망의 운동성이 터져 나오는 작업을 만났을 때의 쾌감을 기억한다. 

“결혼 생활 자체를 중심에 놓는 소설이 거의 없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노스럽 프라이(Northrop Frye)가 특유의 명료함으로 말했듯 “로맨스 소설에서 여주인공은 신부가 된다. 결혼을 통해 신부가 된 여주인공은 어머니가 될 것이다. 이렇게 여주인공은 정해진 생애주기를 따르는 셈이다. 결혼으로… 여주인공은 생애주기를 완성한 후 이야기에서 빠져나간다. 그렇다 보니 우리 독자들은 으레 알게 된다. 행복하고 균형 잡힌 성생활을 비롯한 부부생활은 소설 내러티브가 탐색해 독자에게 제시해야 하는 주제가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 캐럴린 G. 하이브런(오수원 옮김), 『여성 쓰기: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마티, 2025), 117쪽.

행복한 결혼 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소설뿐만 아니라 전시에도, 현실에도 없다. 나는 그것이 이미 한 철 지난, 더 이상 유통되지 않는 서사라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결혼 시장에서는 여전히 넘치도록 생산되고 있었다. 심지어 최근 그 서사 안에서 ‘여주인공’이 된 나는 결혼식장, 드레스샵, 헤어 메이크업샵을 오가며 티끌 없는 순백의 신부 역할을 맡게 될 터였다. 숨기고 싶은 사실은, 결혼식에서 신부의 전형을 수행하게 될 날이 너무 싫고, 또 좋았다는 것이다. 주인공을 위해 준비되는 서비스와 근사한 드레스, 금전 거래로 엮인 업계 종사자의 칭찬과 깨끗한 미소… 그런 것들에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 감당할 수 없는 예산에 정신이 번쩍 들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의 욕망을 마주해버린 다음부터는 어떤 미술을 보건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 역시 정해진 생애주기를 따르며 이 세계에서 빠져나가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다. 

결혼과 (특히) 결혼식을 생각할 때마다 수치심이 밀려든다. 이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배우자를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수치심이 더해진다(내가 뭐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 수치심을 느낄만한 정당성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 가장 큰 수치심이 올라온다. 일정 부분 안전한 위치에서 제도를 내면화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결혼에 대한 이 수치심은 일종의 사치로서의 수치심일 수도 있다. (그러니 어쩌면 자격 없음에 대한 수치심을 고민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을지도 모른다.) 이 수치심은 내가 결혼을 지극히 관념적으로만 치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 걸까. 결혼이 약속하는 환상이 곧 내 것이 될 거라고 믿고, 정말로 원하기 때문에 이런 감정이 드는 걸까… 도대체 수치심이 뭐길래…. 

퀴어 이론가 이브 세즈윅(Eve Sedgwick)은 심리학자 실반 톰킨스(Sylvan Tomkins)의 논의를 따라, 수치심이 흥미(interest)의 정동과 아주 밀접하게 관계 맺는다고 말했다.1 어떤 세계나 대상에 흥미를 두고 에너지를 쏟고 있을 때, 그 흐름이 차단되거나 불완전하게 줄어드는 순간 수치심이 활성화된다는 것이다.2 이를테면 누군가에게 미소를 지었는데 알고 보니 낯선 사람일 때와 같이 말이다. 이 측면에서 수치심은 “흥미나 즐거움이 먼저 활성화된 이후에만 작동하며, 그것을 억제”하는 정동이다.3 “오직 즐거움을 주거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장면만이 얼굴을 붉히게 할 수 있다.”4 정말로 그렇다면, 나는 미술과 결혼, 수치심에 대해 어설프더라도 써야 할 것이다. 쓰지 않는다면 내가 머무는 세계에서 계속 얼굴을 붉히고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수치심이 대상과의 단절이 아닌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며 발생하는 정서이며, 그 관계에 있어 “쾌락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이중적 충동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운동에서 발생한다는 세즈윅의 말을 힌트로 삼으려고 한다. 미술과 결혼, 두 항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며, 두 항의 괴리에서 오는 쾌감과 모멸감이라는 정서를 경험했으니, 다음 할 일은 수치심을 회피하지 않고 미술과 결혼을 함께 겪는 것이다. 미술 안에서, “로맨스와 가부장제가 우리에게 가르친 행복한 결혼의 표징”이 아닌 다른 의미로서의 결혼을 상상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5

정돈되지 않은 고민을 특정한 전시와 엮어 보는 것에 주저하게 되지만, 얼마 전 텐트를 기지 삼아 열린 전시 《세션들》(김여명 기획, 두산갤러리, 2025)을 이야기하고 싶다. 전시를 구성하는 단위로서 ‘세션’이 삶의 몇몇 활동으로 구성되었기에, 결혼이라는 활동도 내 삶에 있어 하나의 ‘세션’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전시에서 범주화된 세션은, 노동과 휴식이라는 자본주의적 시간 구획에서 빗겨간 삶의 활동을 묶는 단위로, 각각 ‘글쓰기’, ‘친밀함’, ‘여행’, ‘요리’의 시간이었다. 돈을 벌기 위한 시간, 돈을 벌기 위해 휴식을 취하는 시간의 틈을 벌려 겨우 조금 만들 수 있고, 그렇기에 “불연속적으로 연쇄”되는 시간. 이 세션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이면서 타자를 향하는 시간들”이자 삶을 지탱해 주는 시간으로서 제안되었다.6 일상적이라면 일상적일, 그러나 어떤 부분에선 전혀 일상적이지 않다고 느껴지는 이 활동들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면, 결혼도 일상과 비일상의 애매한 영역에서 삶에 어떤 의미로 기능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품고 텐트에 들어섰다.

김여명, 《세션들》(두산갤러리, 2025) 전시 전경.
에미 스킨스베드, 〈상호주관적 건축술〉(2025) 내부 매트.

텐트에 들어서 보니, 보통 글을 쓰고, 친밀한 관계를 나누고, 여행하거나 요리하는 활동은 어딘가 따뜻하고 희망적이며, 환기가 되거나 위로를 주는 공동체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고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난감하게도, 이 전시에서 무엇보다 오래 남았던 감각은 찜찜함이었다. 어딘가 개운치 않고, 부끄러운 기분. 이를테면 ‘여행’을 은유하는 세션으로서 에미 스킨스베드(Emmy Skensved)의 텐트 설치 〈상호주관성 건축술〉(2025)에서 폭신한 매트의 촉감은 기분 좋은 경험이었으나 내 몸의 실루엣을 적나라하게 인화했다. 온도에 따라 색이 바뀌는 변온 안료로 염색된 천이 내 엉덩이를 마치 땀에 차서 축축하게 젖은 모양새로 남겨둔 것이다… 그 자국은 민망하면서도 다음에 이곳에 들어올 누군가를 생각하면 비밀스러운 인사처럼 느껴져 묘하게 즐거웠다.

박정연, 〈트윈 베드〉(2023) 전시 전경.
김여명, 《세션들》 중 요리 세션.

한편, 텐트 안에는 한 여자(어쩌면 두 여자)가 아주 검은 방 안에서 신체를 뒤틀며 춤을 추다가, 젖은 머리카락 뭉텅이를 천천히 뱉어내고, 맨발로 굴다리를 걷고 있었다. ‘친밀함’ 세션으로 보여진 박정연의 〈트윈 베드〉(2023)였다. 스스로를 청소하기 위해 제 몸을 핥고, 그렇게 삼킨 털을 다시 게워 내는 고양이처럼 자신의 지저분함을 삼키고 또 토하는 모습은 꺼림칙했다. 꼭 닮은 두 여자가 서로에게 아무 위해도 가하지 않은 채, 그러나 서로를 떠나지도 않은 채, 서로의 곁에 있는 장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함께 살아가는 욕망을 숨기지도, 없애버리지도 않고 적나라하게 내어놓는 여자. 그 여자는 내가 지긋지긋해하는 욕망과 화해할 수 있다는 기이한 희망으로 다가왔다. 

다음으로 ‘요리’ 세션을 예고하는 영상까지 보자 오히려 해방감이 들었다. 세련된 플레이트가 아니라 온갖 양념과 재료를 손으로 섞어대는 날것의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일은 입맛을 돋우지도 않았고, 즐거운 풍경과도 거리가 멀었다는 점에서 너저분한 ‘진짜’ 삶 같다고 해야 할까. 전시 마지막 날 요리 세션의 일환으로 만두를 만들어 먹으면서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공간을 정돈하고, 재료와 이야기를 준비하며, 틈틈이 뒷정리하는 이들의 수고로움에 더 눈이 갔다. 온갖 재료를 썰고 비벼 대고 뭉치고 만두피에 올려 먹음직스러운 모양으로 만들어내자, 몇 판의 만두가 만들어졌다.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만든 그 많은 만두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다시 기획의 말로 돌아가, 전시는 세션들을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이면서 타자를 향하는 시간들”이자 삶을 지탱해 주는 시간으로 본다.7 그런데 이때 각각의 세션들은 나 자신과, 타인과, 세계와 관계 맺기 위해 필연적으로 찜찜함과 거북함, 불편함과 수고로움의 순간을 지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을 준비하며 마주하는 불쾌함, 창피함, 좌절감은 단지 규범에 순응한다는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기를 위해 필요해 마땅한 감정으로 볼 수도 있을까? 결혼이라는 세션은 나와 애인, 애인의 가족과 각자가 속한 사회, 그 사회를 떠받치는 규범과 맞물리며 진행되는 사건이고, 그 사건은 관계를 다루는 일이라는 관점에서 온갖 정서를 동반하는 것이다. 그러니 규범 안의 안정된 정착이 아닌, 규범과 관계 맺으며 마주했던 불편함의 순간을 기대하며 여러 전시장에 들어갔듯, 결혼이라는 체계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표백된 약속 뒤 수반될 결혼 생활의 난점들, 아직 알 수 없지만 그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고 따져가며, 정리되지 않은 말을 뱉고 대화해가며. 그렇게 내가 겪기로 한 제도와의 불편한 관계에서 수치심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확인하고 싶다. 이것이 내가 《세션들》을 통해, 미술을 통해,  관계를 꾸리는 방식이 될 것이다.


김지율

미술에 관해 기획, 편집하고 글을 쓴다. 생활의 구체적인 일들을 미술 안에서 소화하는 데 관심이 있다. 셋(set)의 둘째. 예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