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래의 〈미래의 고향〉은 국립현대미술관 다원공간에서 펼쳐진 전시이자 퍼포먼스다.1 공연장으로 입장하면, 폐기물 덩어리들이 바닥에 깔려 있고, 천장에 매달려 있다. 재앙의 한 복판에 있듯 누렇고 벌건 조명과 둠메탈 사운드가 공기를 채운다. 걸음마다 시선마다 누더기마냥 찢긴 방수포와 그 어디로도 연결되지 않은 파이프가, 빛나는 구리선과 꼬일 대로 꼬인 철사 덩어리가 채이는 이 장면은 극적으로 진동하며, 따뜻하게 아려온다. 고조되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사운드트랙에 올라타 궁극의 종말 판타지에서 하염없는 시간을 보낸다.
아, 쓰레기를 어쩌면 좋을까. 그것은 사실 나에게(고로 어쩌면 당신에게도)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다. 단 한 번의 유성 충돌로 인한 신속한 끝이 아닌, 지지부진하고 한없이 늘어난, 생채기 난 풍선이 바람 빠지며 쭈글어드는 시간에 속한 것. 서울 근교로 밀려난 폐기물은 곧 재개발될 것을 고대하며 날름 세워 올린 유통기한 짧은 건물에서 뽑아낸 핏줄과 피부와 장기들, 왜 한국에는 100년 넘은 가게가 없냐며 의아해 하는 한 일본인 관광객의 순수한 궁금증 부스러기, 거대한 힘에 떠밀려 상경했다가 이내 구심력을 견디지 못한 채 밀려나 버린 이주민이 복기하는 ‘잘나가던 때’에 대한 허풍, 뜬금없이 ‘발굴’된 요즘 잘 나가는 동네 팝업 스토어의 트로피, 도시의 속도를 따라가다 번아웃이 세게 온 어느 젊은 사람의 토사물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가속화된 자본주의와 착취적 관료주의 사이 밀회의 배설물이자 포스트콜로니얼-모더니즘 상처다.

도시의 성장과 팽창의 이면에는 폐기물 소화 기관이 정교하게 분업되어 있다. 부위별로 분류하고 분쇄하고 재포장하여 재활용하는 되새김질, 톤 단위 이하는 취급도 하지 않는다는 처리 업체의 거래와 쓰레기더미 사이로 뛰어드는 거리 낭인들의 보물사냥, 가망 없는 찌끄러기들을 외곽으로—교외로, 해외로, 우주로—밀어내는 운송의 작동, 온갖 미생물이 과로하며 수백 년간 이어가는 분해 작용을 포함한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원활하지는 않다. 재개발을 둘러싼 불협화음과 자금 조달 실패, 공사 지연 등으로 우리는 언제나 쓰레기와 더불어 산다. 그렇게 우리는 언제나 범죄 현장 위를 걷는다, 유력한 증거들을 오염시키며, 그것들과 살을 섞고 연루되며, 나 자신의 삶 또한 폐기 처리되기 직전이라는 것을 애써 망각하며.
그러나 그저 쓰레기에 불과한 이 물질들에게 이러한 의미를 위임해도 괜찮은 걸까. 인간의 과오와 야망과 회한과 환상과 욕구불만족과 버려진 허망감을, 심지어 약간의 망국-인더스트리얼 페티시까지 말이다. 그래도 된다고 제멋대로 생각한 것도 인간일테고, 그것의 윤리적 딜레마에 골몰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제 주먹을 한 입에 넣고 헛구역질을 해대는, 반성하는 존재들. 리듬에 맞춰 흐느끼는 어깨를 통제할 수 없는 관객들.
그러다 무언가 단절이 일어난다. 이내 퍼포먼스를 위해 지정된 시간이 다가와, 폐허 판타지에 젖어 있던 관객들은 안내를 따라 그 공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층으로 이동한다. 설치 인력/퍼포머가 등장해 공간의 앞쪽 반의 반 정도를 치우기 시작한다. 천장까지 연결된 와이어의 훅을 풀어 구조물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 넣거나 플라스틱 덩어리를 한아름 안아 옆으로 옮긴다. 밀대로 먼지를 쓸어 붙인다. 일련의 행위는 눈앞에 놓인 것이 폐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걸맞은 행위지만 그것이 조성한 판타지에 몰입한 관객에게는 침범이다. 폐허 페티시의 장막이 찢긴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만질 수 있고, 자리를 옮길 수도 있고, 이리저리 다른 방향으로 당겨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처분될 수 있다. 그것은 그러한 자의적 움직임에 무력하며, 기꺼이 폭력에 노출된다. 이렇게 ‘청소’가 마무리되어 적절한 자리가 확보되면 확연한 기계음과 더불어 텅 빈 관객석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이내 접혀 있던 의자들이 일제히 일어난다. 눈 없는 관객이 폐기물을 마주한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분명해지는 것들. 폐기물 덩어리는 공연장 본연의 장치에 덕지덕지 연결되어 있다, 아니, 무대라는 공간을 태반 삼아 의지한다. 공연장의 바턴(batten)이 오르내릴 때, 폐기물-조합은 들어 올리는 힘과 중력 사이에 몸을 맡긴 채 변신을 거듭한다. 조명의 조작에 따라 그것의 색깔 또한 반전된다. 방금 전 몰입했던 폐기물 對 인간의 구도는 명령에 복속하는 공연장 장치가 가시화되면서 사물 對 사물의 다중적이며 일시적인 연결로 파열된다.
그 사이로 등장하는 배우(배선희 분)는 온전한 인간이라기보다 차라리 횡설수설하고 팔랑거리는 한 겹의 무언가다.2 이 (비)존재는 관객석과 그 앞 공간을 오가며, (이후 프로젝트 설명문을 읽고서야 비로소 ‘낭독과 신체 움직임을 통한 퍼포먼스’라고 이해하게 된) 몇몇 장(act)을 펼친다. 내가 죽어야 한다면 너도 같이 죽어야 한다며 쌍욕 악다구니를 쓰고, 이미 포기하고 땅 아래로 꺼지려는 듯 아기 자세로 엎드리고, 숨차고 명랑하게 노래를 부르고, 덩어리 사이를 위를 곁을 뛰어다니고, 바턴에 위태롭게 매달린다. 간혹 정신분열증적인 독백 내지는 부재한 인물을 향한 대사가 이어지는데, ‘하나’에게는 소중한 것을 가져오겠다 약속하며 인어공주 노래를 부르거나 ‘베니’에게는 덩어리들을 가리키며 눈이 오니 똑바로 보라고 하는 식이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의식’이 있는 이 존재가 가상의 인물과 상황을 오가며 자아를 여러 갈래로 찢어발기는 사이, 그의 언어는 뚜렷한 의미를 생성하지 못한 채 널부러진다. 그 사이 쓰레기 더미들은 어두컴컴한 밤 중 어렴풋이 빛을 반사하는 구름이 되고, 바닷 속 숨겨진 망상의 보물이 되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되고, 저마다의 섬이 되고, 잠들기 직전의 아기가 되고, 몸을 가려주는 코스튬이 된다.
폐기물의 처리 과정 사이에 간섭하여 꺼내온 이 쓰레기를 어쩌면 좋을까. 도시의 바깥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서울 한복판의 한 극장 공간으로 끌어들여진 쓰레기 사이에 저 인간은 유일무이한 개인이라기보다 이러저러한 인간들 사이에서 걸어나온 대속제물처럼 버등댄다. 인간-쓰레기와 쓰레기-인간이 한자리에 함께 무질서를 더하는 사이 죽음이 잠시나마 지연된다. 즉각적인 부활과 찰나의 생성이 환희의 지속을 흉내낸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만큼만 울컥울컥 돌아온다. 거듭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수모를 당하고 변덕스러운 선택에 의해 거듭 버려지는 그것들이…
유지원
미학을 공부했고, 현재 시각예술 분야에서 기획하고, 글을 쓰고, 번역한다. 옐로우 펜 클럽에서 김뺘뺘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