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이거나 여럿이거나 ― 꿈에 관한 드로잉

내가 무엇을 보고 있나. 요즘 나에게 생기는 의문이다. 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나는 여기저기를 떠돌며 존재하고 있다. 존재하고 있나. 존재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일기를 쓰지 않아서일까. 나는 일상을 글로 옮기는 일을 선호하지 않는다. 꿈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다. 장소를 기억하는 일이 어렵다. 모든 것을 상태로 이해한다. 나는 그곳이었다가 저곳이 되었다가 현재는 이곳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증상은 갈수록 심해진다. 그런 나를 받아들이는 나날이다. 

나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다. 그림을 그리는 마음과 글을 쓰는 마음. 손에 잡히는 일이 달라질 때마다 나는 변한다. 변해야만 한다. 올해는 어느 작가들의 이인전에 서문을 쓰기로 하였고 첫 시집의 출간을 앞두고 있으며 네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보아야 하나. 지금은 내가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누가 보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아무도 아닐 수는 없을까. 종종 눈을 뜨고 있는 게 내가 아니라는 느낌이 엄습한다. 나는 발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잃어버린 동안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깨어났다. 깨어났다고 적는다. 꿈에서 깨어난 직후의 정신이 맑을 리 없다. 무엇인가를 본 것 같고 잊어버린 것 같다. 누군가의 전시였다. 제목은 ‘보이스’.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의 개인전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풍선으로 만들어진 물고기들을 마주쳤다. 물고기로 만들어진 풍선이었다면 섬뜩할 일이었겠지만 무해하게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자동으로 연주되는 피아노 위로 주황색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벽이 스스로 움직이며 공간의 모습을 바꾸었고 빛과 소리를 내는 다양한 형태의 물체들이 모여 거대한 무대를 이루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를 숨기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외관은 너무 평범했다. 도무지 장면 안으로 들어설 수 없었다. 낙원이 있다면 누구도 가지 않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속해야 하는 곳은 악몽이거나 지옥이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여겨서는 안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의 영혼에게 그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벌이었다. 

또 다른 꿈은 영화였다.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더 원더스>. 창문의 틈새로 쏟아지는 빛을 손에 담아 마신다. 마실 수 있다고 믿는다. 입안에서 살아 있는 벌을 꺼내는 능력은 충분히 마술적인가. 왜 모든 일을 마술의 방식으로 해낼 수는 없을까. 마술은 기적보다 열등한 일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전원의 기적’이라는 TV프로그램은 한 가정을 가난에서 구해 내지 못할까. 그들을 외면할까. 놀라움과 의구심이 엇갈리며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었다. 육체의 고단함은 전원생활의 순수함을 아득히 초과한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 하여금 가까운 미래를 앞서서 보게 하는 신비로운 순간만큼은 어떠한 어둠보다도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기적은 유한성 안으로 무한성이 틈입하는 일이다.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으로 드러날 때 낯설어진 현실은 세상의 명백한 표지들을 보란 듯이 압도한다. 본래 영화는 마술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그 흔적을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이념은 세대를 넘어 지속된다. 모두가 일원이 되는 일이 거짓말처럼 일어난다. 

그리고 다시 꿈이었다. 제멋대로 포개어진 책들 중에 한 권이 눈에 띈다. 실비 제르맹의 『소금 조각』이다. 생의 의지를 잃고 도시를 방황하는 남자는 기이한 만남을 반복한다. 비현실감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들은 저마다 소금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대상과 연관되어 있다. 성서에서 소금이 의로운 자를 상징하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한지는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다. 소금을 지닌 사람들은 남자를 침묵에서 꺼내 대화를 이어가게 한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정확히 일치하는 상대의 고백에 완전히 빠져들게 된다. 그가 매료된 대상들은 어딘가 설명할 수 없는 베일에 싸여 있다. 이상한 사건이 거듭될수록 남자는 점차 무기력에서 벗어나 호기심을 회복한다. 부조리하고 환상으로 가득 찬 세계가 그를 삶의 한가운데로 인도한 것이다. 비의미가 의미를 구원한다. 소금과 비슷한 것을 나도 가지고 있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나의 맨살을 쳐다본다. 오래지 않아 투명한 먼지가 내려앉는다. 먼지를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 그럴 수 있다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린다. 

눈을 감지 않아도 꿈을 꿀 수 있다. 연극 <887>에서 세트장과 사물들은 문자 그대로 변신한다. 그 사이를 배회하는 한 사람은 공연의 작가이자 연출가이며 배우인 로베르 르빠주이다.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을 중심으로 1인칭과 비인칭을 오가는 자전적인 서술 양식을 통해 그의 생애는 재편된다. 시공간의 예기치 않은 이동과 현현은 물리적 제약을 가볍게 무시한다. 스크린은 열리고 닫힐 수 있는 입체가 되어 개인과 역사를 넘나드는 장치로 기능한다. 미니어처와 소형 카메라는 큰 것과 작은 것의 경계를 허물고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시각적으로 연출한다. 때로는 그림자가 육체를 주도하고 자유롭게 풀려나온 형체들이 언어를 대신한다. 작품은 고대 그리스의 기억술인 ‘기억의 궁전’을 재현한다. 미쉘 라롱드의 시 「스피크 화이트」를 암기해야 하는 화자는 퀘벡의 근현대사가 얽힌 사적인 구조물들을 모두 통과하고 나서야 긴 낭송을 해낼 수 있었다. 예술과 정치는 주요한 준칙을 공유한다. 멈추지 말고 회상하라. 그것이 남겨진 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길지 않았던 나의 꿈은 여기에서 멈춘다. 여전히 나의 절반은 잠을 자고 있다. 밤을 건너오고 있다. 여럿 중에 한 명으로서 썼다. 아니다. 여럿은 하나가 되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다. 나의 관심은 혼란스럽게 흩어져 있다. 나를 새롭게 하는 것이라면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미술은 미술 밖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제발트의 문장이 떠오른다. “우리는 꿈들을 이루는 재료와 같다. 우리의 시시한 삶은 잠으로 완성된다.” 나는 주체이면서 재료이다. 이보다 더 나의 상태를 잘 요약할 수 없다. 나는 내가 되느라 어떤 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몸이 있어야 할 곳에는 치우지 못한 외투가 쌓여 있다.

《필립 파레노: 보이스》(리움미술관, 2024) 전시 전경.
알리체 로르바케르, 〈더 원더스〉(2014)
로베르 르빠주, 〈887〉. Photo © Érick Labbé.

강동호
그림을 그린다. 전시를 기획하거나 글을 쓰기도 한다. 시를 쓸 때는 필명(강이현)을 사용한다. 첫 시집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