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디자인 이론 스터디 – 변혁정의로서 디자인 실천 모색하기
기간: 2022년 9~10월
진행: 신인아
유형: 에세이
순수하고 반짝이는 호기심을 회복하기
📝 글쓴이.
화가 많고 다정한 디자이너 이석주
1.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예매한 차 시간을 기다리며 소파에 푹 앉아 있던 날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일정을 끝내 피곤하고 멍한 시선으로 터미널 내부를 둘러보는데 차시간을 알리는 전광판 근처에 다닥다닥 붙은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대한민국 전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고 빠지는 곳. 그런 장소답게 전광판에는 지역의 온갖 축제를 홍보하는 문구들이 빼곡히 있었다. 처음엔 ‘과연 저 광고를 보고 사람들이 축제를 보러 그 먼 지역까지 갈까?’ 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보니 승차홈에 붙어있는 광고가 대부분 지역을 홍보하는 광고라는걸 깨달았다. 순간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별볼일 없이 지나가던 곳은 어느 한 편으로는 호소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렇듯 갑작스레 내가 살아온 위치성을 원치않게 확인하는 순간들은 줄곧 있었다. 디자인과에 진학하겠다고 말했을 때 ‘너 디자인 공부하는 애들이 유학도 갔다오고 성공 하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 줄 알아?’ 라고 소리지르던 엄마의 얼굴, 학벌 컴플렉스에 찌들어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때면 저자의 출신대학부터 먼저 찾아보던 내 모습, 청주에서 학교를 다닐 때 택시 기사님이 고향을 묻더니 ‘유학왔네.’ 라며 껄껄 웃던 모습, 서울에 번듯한 거리를 익숙하게 걷는 사람들 모습에서 느끼던 벽, 학교 수업 당시 2년 동안 열심히 쌓아온 내 역사가 몇 마디 말에 의해 부정 당했을 때.
그래픽 디자인 수업을 처음 듣던 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살면서 그런 포스터를 인터넷을 통해, 대학에 오고나서야 처음 봤지 내가 살았던 고향에서는 그런 미감의 포스터를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나한테 익숙한 미감은 동네 간판과 아빠가 운영하는 가게의 상호명이, 문구점에서 700원 주고 사던 줄노트가, 초중고 정문에 붙어 휘날리는 운동회 현수막이 전부였다. (그나마 ‘세련된’ 거라면 충주 시내에 자리 잡았던 나이키나 아디다스 간판 정도였다.) 눈에 익숙한 미감이라곤 그런게 전부였던 촌년이 대학생이 되자마자 살면서 전혀 겪어보지 못한 다른 미감을 봐야했고, 이렇게 디자인하는게 맞다고, 디자인의 역사는 이런것이라고 이야기하니 어영부영 쫓기듯 공부해왔다. 그 과정 속에는 언제나 위화감이 있었고 언제나 고립감이 있었다. 내가 살아온 배경은 그곳에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나의 공부는 압박감과 열등감에 짓눌려 ‘그게 왜 좋은거에요?’ 라는 아주 단순하고 순수한 질문은 하지도 못한 채 ‘이 디자인 좋다.’ 라는 주변의 말에 그저 멋쩍게 웃으며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2.
그렇게 위화감 속에서 살면서 항상 속으로 질문했다. 도대체 좋은 디자인은 무엇일까? 조금 더 크면, 디자이너로서 일을 시작하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오히려 더 모르겠고, 계속 헤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변혁정의로서 디자인 실천 모색하기> 스터디를 들었고, 이곳에서 본 자료와 나눴던 대화들은 불안감으로 흐렸던 내 그림을 조금 더 선명하게 그릴 수 있도록 해줬다. 1-4주차의 내용을 통해 내가 살면서 느껴온 위화감과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세상의 풍경은 착각이 아니었다.
<1주차: 가부장제가 만든 디자인>에서는 사회를 작동하게 하는 권력구조를 읽지 않고 ‘위대한 개인의 업적’으로 작품을 읽는 것이 해당 작품을 만드는데 일조한 많은 노동력을 어떻게 지우는지, 특히나 디자인의 역사를 디자인으로 보는게 아니라 ‘디자이너’의 역사로 축소해 바라보고 ‘디자이너가 인식하는대로’ 디자인의 역사가 정해진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테다. 여전히 스타 디자이너로 언급되는 사람들은 남성이고, 가부장제의 작동원리 아래 그들의 업적을 기반으로 지어진 구조는 필연적으로 여성의 디자인과 노동을 폄훼하고 지운다.
<2주차: 백인우월주의가 만든 디자인> 에서는 특히 개인이 느꼈던 위화감이 얼마나 권력구조와 연결되어 있고 그것이 한 사람의 삶에서 어떻게 치밀하게 작동하는지 언급하고 있었다. 디자인을 배우는 흑인 학생들이 자신이 살아온 문화와 정체성을 버리고 성공하기 위해서 서구열강사회, 유럽백인사회의 디자인을 습득하기를 강요받는다는 내용, 권력구조안에 들어가고 인정받고 자격을 갖추기 위해 넘어야할 무수한 장애물들, 그 과정에서 개인이 겪는 심리적 압박감. 이것이 나 개인의 문제인지 구조의 문제인지 혼란스럽게 만들고 입을 닫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까지. 문화가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겪고 있는 문제점이 정말 닮아 있었다.
<3주차: 자본주의가 만든 디자인>은 발전과 혁신이라며 더 많이, 더 고도화된 기술과 서비스(라고 믿는)를 제공하는 자본주의의 뒷편을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 기후위기에 대한 담론과 함께 엿볼 수 있었다. 인아님이 슬랙에 올려준 ‘질보다는 양, 성장은 더 커지는 것이라고 믿는 태도’가 우리에게 어떤 그림자를 지게 하고 무엇을 ‘절단’하게 하는지, 그리고 ‘성장’이라고 믿는 것 아래에 어떤 생명이 깔리게 되는지 들여다 볼 수 있었다.
<4주차: 제국주의가 만든 디자인>은 우리 사회 곳곳에 있는 식민주의적 태도가 얼마나 뿌리깊게 작동하는지 다시금 돌이키게 해줬다. 서구열강사회의 제국주의적 태도를 읽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권력구조가 똑같은 방식으로 국내에서도, 국내 디자인 씬에서도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찾아볼 수 있었다. 또한 세련되고 멋진 디자인으로 추잡하고 촌스러운 이미지를 ‘해결’하겠다는 디자이너의 우월감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일이 얼마나 제국주의의 그것과 닮았는지 깨닫게 되었으며, 다시금 시각 언어에는 배경과 맥락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느꼈다.
3.
수업을 들으면서 4주차 때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제는 ‘잘 만든 디자인’이 뭔지 모르겠다고. 판단하기 어렵고 판단 하는것 자체가 어려운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조형과 미감에 대한 부분도 한 사람의 미감이 나오기까지 그 사람이 갖고 있던 배경을 우리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좋은 디자인, 잘 만든 디자인의 기준을 다시 해체하고 구성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정확히는 ‘좋은 디자인과 공동체를 만드는데 필요한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싶다. 부족하지만 내가 세워본 기준은 아래와 같다.
- 완전무결한 정답 혹은 해답이 있다고 믿지않기
- 맥락과 배경을 고려하고 이해하기
- 과정을 함께한 모든 이들을 존중하고 대우하기
- 기회를 독점하지 않고 적재적소의 사람들에게 나누기
- 서로의 연결감을 회복하고, 잊지않고, 유지하고, 확장하기
- 회복된 연결감을 통해 타인의 일은 곧 나의 일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연대하기
- 누군가의 삶을 성찰없이 소재로 사용하진 않았는지 점검하기
- 특정 개인을 숭배하거나 우상화하지 않기
- 서로 다른 문화와 배경에서 오는 정체성을 꺼내고 표현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 건강한 비평과 실험을 함께 진행해보기
- 왜? 라는 질문을 던지고 의심해보기
- 부족하고 무지한 자신을 인정하고 타인과 함께 배우기
- 열등감과 압박감이 아닌 순수하고 반짝이는 호기심을 회복하기
- 타인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회복하기
- 누군가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 낙인찍지 않기. 우리는 반성할 줄 알고, 반성을 통해 바뀔 수 있다.
- 사회적 직급이나 지위로 서로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생명으로 동등하게 대화하기
- 공동으로 학습하고 결과를 나누며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 대화와 행동을 통해 확장하기
(*이 리스트는 언제나 수정/추가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채워나가고 싶어요.)
4.
수업이 끝날 때마다 오늘 어땠는지 소감을 묻고 답했는데 한번은 이 수업이 끝나고 나서의 내 모습이 기대된다고 이야기 했었다. 그리고 6주차의 수업이 모두 끝났다. 물론 드라마틱하게 생활 방식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수업을 들으면서 지금 당장 확실하고 손쉽게 할 수 있는게, 현재도 계속 하고있는게 있다고 느꼈다. 바로 ‘다른이들과 함께 공부 하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리스트 중 내게 제일 소중한건 13번의 ‘열등감과 압박감이 아닌 순수하고 반짝이는 호기심을 회복하기’인데 앞서 이야기했지만 언제나 늘, 내가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마주할때 느끼는 감각은 압박감과 열등감, 맞지 않는데 억지로 입고 있는 옷과 같았다. 일을 할때마다 부족한 자신을 매순간 마주하고 비교하며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고 내가 과연 이 분야에 맞는 사람인지 끊임 없이 재단하는 스스로가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변혁정의로서 디자인 실천 모색하기>를 통해 개인이 놓여진 사회 시스템이 어떻게 철저하게 작동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소중한 감각을 잊게 만드는지, 모두가 맞다고 믿는 것에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맞지 않는 자신의 몸을 우겨넣는게 우리의 몸과 감각을 어떻게 절단시키는지 알게되었다. 불안감으로 버티던 지난 시간 동안 실눈으로 본 건 착각이 아니었다. 그 눈이 확신으로 열리는 감각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방금 태어난 아기처럼 순수하기도 하고 이제 막 무언가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억지로 끼워맞추기 위해 상실된 마음으로 움직이는게 아니라 정말로 더 무언가를 알고싶고, 더 공부하고 싶고, 생각하고 싶고, 몰랐던 세계에 가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두드려보고 싶다. 그리고 남이라고 여겼던 타인과 내가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사랑하는 풍경과 맞닿아있다는 이 감각을 영원히 가져가고 싶다.
<변혁정의로서 디자인 실천 모색하기>는 일방통행으로 우리가 수동적으로 주어진 지식을 받아먹는 자리가 아니다. 능동적으로 읽고, 능동적으로 대화하고, 그 속에서 비슷한 점을 찾기도 하고 차이점을 발견하면서 서로 확장한다. 이 수업이 우리에게 준 것은 우리가 또 다른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게 수업의 가장 큰 목표라고 본다.) 그리고 여기서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확장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이들과 함께 공부하는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줄 몰랐다. 서로가 서로에게 준 감각을 잊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야겠다.
동시대 — 동아시안 — 여성 그리고 디자인 식민주의
📝 글쓴이.
따뜻하게 살기를 꿈꾸는 디자이너 유채원
다소 무거워 보이는 단어들의 나열로 시작하는 이 글의 제목을 풀어 쓰자면 “동시대를 사는 동아시안 여성이 경험하는 디자인 식민주의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자!”이다. 단어들을 가지고 온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2022년 현재 서울에서 디자인을 하고 있는 나를 말해주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에서 개별적으로 분리해 관찰할 수 없다. 때문에 현재, 동아시안, 여성 그리고 디자이너를 둘러싼 보면 볼수록 기묘하기에 짝이 없는 식민화의 잔재들을 나를 둘러싼 도시에서부터 파악하며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기억의 구멍’. 윤원화가 ‘1002번째 밤 :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에서 쓴 이 표현을 나는 이 표현이 지금 현대의 서울에 가장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은 서구의 것들을 받아들이면서부터였다고 한다. 70-80년대에 서울은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빌딩을 세우기 시작했고, 기존의 것들은 보강되고 다듬어진 것이 아니라, 허물어지고 파괴되었고 우리는 이를 ‘현대화’되었다고 말한다. 나의 도시는 뿌리를 알 수 없는 철근과 콘크리트 더미들이 가득했고, 그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역사책 속에서는 한국을 보지만, 내가 지금 발을 디딘 곳에서 한국의 역사를 관찰하기란 쉽지 않다. 식민화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기억의 구멍’이 나 있다.
그렇다면 식민화는 디자인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나는 한 두 세대 위의 선배들 — 동아시아+엘리트+미술가의 표상을 살펴보며 내가 받았던 디자인 교육이 어떻게 식민화되었는지를 추측해 보고자 한다. 김현진이 ‘역사는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에서 말했듯, 그들은 보수적이었던 사회의 가부장제를 뚫고 서구 근대식 교육을 받으며 엘리트로 성장했다. 그들에게 전통은 다른 의미로의 억압이었으며 가부장제의 다른 이름이었다. 전통에 대한 거부감은 전통 그 자체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억압된 역사에 대한 거부감이었으며, ‘서구화’를 통해 이들은 ‘구원’되었다. 이들에게 한국에 돌아와 자신이 획득한 서구 이론을 전시하며 계몽 지식인의 위치를 선점하려는 욕망도 비춰진다. 그런데 이 이야기 다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나는 과연 이런 교수님을 예술 디자인학교에서 몇 분이나 만나 뵀을까?
그들이 전시한 서구 근대식 교육을 받으며 현대를 살아가는 나는 자신의 존재를 ‘생략’하거나 어울리지 않다고 치부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은 역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도시 풍경만 봐도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으리라. 한석정은 ‘만주 모던 —60년대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전쟁 이후 서울은 기간 사업을 중심으로 발달하였고, 기간 사업은 파괴되고 부서지고 건설되는 남성성을 도시 전반에 각인시켰다.”라는 말을 했다. 나는 왜인지 모르게 서울의 도시 풍경과 모더니즘 디자인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곤 했다. 나에게 근대화-모더니즘 -식민화는 굉장히 ‘남성적’이다.
“이 도시는 강한 자의 승리와 가장 약한 자의 실종을 기념하는 살아있는 ‘전통’이자 ‘전달’된 과거”이다.” 이는 스테판 모지스가 벤야민의 정치 신학적 역사 모델을 분석하며 한 말인데, 나는 이 문구가 마음에 와닿는다. 나는 자신을 마치 ‘이름 없는 기억(구멍 난 역사)’에 속한다고 인식해 오곤 했던 것이다. 이렇게 내가 식민화된 도시에서 거주했던 경험은 파리에서 거주했던 경험과 비교해 서술하면 더욱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나는 그곳에서 200여 년 된 빌딩에서 거주했다. 파괴되고 허물어져 새로 세워진 빌딩이 아니라,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다시 말해 파괴된 적 없는) 그들의 ‘기억’은 과연 ‘승자의 역사’였다. (파리도 굉장히 특이한 도시이다 : 파리의 근교(Banlieue)에 가면 마치 서울의 건물들처럼 ‘현대적 빌딩’들이 즐비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200여 년 된 빌딩들이 즐비한 낡은 파리의 중심부에 거주하는 가격이 편리하고 쾌적한 근교 빌딩에 거주하는 비용보다 훨씬 비싸다는 사실이다!)
구멍이 존재함으로써 우리는 이를 어떻게든 메꾸려고 시도 하는데, 예를 들면 윤원화가 말했듯, 2010년대에 특히 유행했던 노출 콘크리트, 을지로의 ‘힙한’ 카페들, 일부러 낡음을 드러내는 전시 공간들이 바로 그러한 시도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기형적인 형태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재현된 공간이기에 역사 속 살아있는 전통도 아니고, 현대도 아닌 그 어딘가 존재하는 ‘상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든 구멍 난 역사를 메꾸려는 욕망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기억이 안 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프랑스인들이 일부러 오래되어 보이려는 듯이 흠집을 낸 탁자를 보고 신기해하는 광경을 본 것이 기억난다. ‘전통’을 간직한 것이 ‘승자의 역사’임을 우리 모두 무의식적으로 알아, ‘역사를 흉내’ 내려고 노력한다는 생각에, 나는 이러한 장면들을 목격할 때마다 식민화의 잔재 속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참으로 기형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결론적으로 나는 ‘서구의 모더니즘’과 ‘구멍을 메꾸려는 시도 — (기형적일지라도) 전통을 찾아가려 시도하려는 태도’를 동시에 학습하게 되었다. 예컨대 나는 모더니즘 디자인을 배우며 탈식민주의 담론 또한 지지해, 식민주의, 옥시덴탈리즘을 배척하며 그의 반동 효과로 한국적인 것을 탐구하지만 그것이 오리엔탈리즘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김현진이 말했듯, “식민 출신 아시아인은 왜 서양의 근대성과 아시아 오리엔탈리즘을 경유해 전통을 재발견하고야 마는 것일까?”라는 걱정이 드는 것도 잠시, 내가 하는 그 걱정이 제국주의가 내 안에 내재되어 있어 그런 것이 아닐까를 걱정하는 나 자신을 보며 나 : 현대—동아시안—여성은 사실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띤 경계성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월터 D. 미뇰로는 ‘서구 근대성의 어두운 이면’이라는 책에서 ‘모든 근대는 식민 근대’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현대—동아시안—여성에게 그것의 파생 고리를 끊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단절된 것만 같은 풍경과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단순히 ‘기억의 구멍’을 막는 행위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의 온전한 조각으로 꿰맬 수 있을까? 꿰매어질 수는 있을까? 꿰매는 것은 맞는 행위일까? 나에게 이는 생존과 투쟁의 문제이다. 스스로가 풍경에 속하지 않는다고 느껴진다면, 나는 어떤 땅에서 두발을 내딛고 설 수 있을까?
지금 나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우리가 꿰매어질 수 없이 파편처럼 존재해야 한다면—”으로 시작하는 문장과 “오늘날 단절된 감각을 꿰매어 오롯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의 문장이 있는데 두 시나리오 모두 결론은 비슷하다. ‘구멍’을 메꾸는 행위가 아니라, 잇는 행위가 되기 위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것이 너무 많이 붕괴되어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면, 단절된 현재와 현재를 잇는 시도를 먼저 해보는 것이다. 각자의 시간과 세계로 침잠하는 개인들을 붙들어 단절감을 회복하는 행위에서 현재의 역사가 새로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함께 ‘구멍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 각자가 감각하는 단절감을 관찰하는 행위에서부터 시작한다 — 오늘날 어떻게 권력구조가 사회를 형성해 왔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디자인의 미감을 지배해 왔는지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그렇다면 스스로 질문할 수 있으리라. 내 디자인은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일으킬 수 있을까? 누군가가 상처받을 수 있을까? 이것이 미래의 누구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까? 더 나아가 탈식민화 디자인 교육을 강조하며 도리 툰스탈(Dori Tunstall)은 이렇게도 질문한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까요?” “제 디자인이 취약한 사람들의 조건을 개선하게 도울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서로를 잇고, 현재를 이을 수 있는 각자만의 해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올곧게 나아가기 위해, 내가 있는 자리를 돌아보기
📝 글쓴이.
편안한 매일을 그리는 디자이너 김버터입니다.
비관과 우울에 빠져 골병든 닭처럼 지내기를 몇 년이었다. 내 손발은 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 대학교 2학년 때- 사람 속에 섞이고 싶다는 욕망이 치솟자 평소 관심있게 보던 교내 인권 동아리에 들게 됐다. 그 곳에서 정말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친구를 사귄다는 건 얘기할 상대가 생겼다는 것이고, 이는 내 생각을 가지고 남에게 전달할 기회가 생겼다는 의미다. 허나, 몸과 마음이 지친 당시에 나는 제대로 된 어휘를 구사할 힘이 없었다. 말을 하지 못하니 답답했다. 결국 함께 이야기 하기 위해, 우울증이 발병한지 몇 년이 지나 처음으로 정신과를 찾아가게 됐다. 병원을 다니면서, 일부러 두꺼운 책을 계속 읽었다. 체력을 기르기 위해 운동도 시작했다. 실낱같은 소속감 하나는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한 나비 효과로 작용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이를 알고 반성하며, 개선할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지게 됐다. 앞으로 많은 부족함을 깨닫고, 그를 통해 배우는 것도 많을테니 앞으로의 나날을 꿈꾸게 됐다. 그러고보니, 요즈음에 꽂힌 말이 하나 있다. <성공을 위해 실패의 횟수를 채우라>는 말이다. 실패라고 하기 애매하지만, 얻은 게 없다고 하기엔 깨달음이 많았던, 나의 작은 경험을 하나 공유하고 싶다.
디자인과 학생인 나는, 남들과는 다르지만 굉장히 뜻 깊은 주제를 매번 찾아 나서야 했다. 실천할 수 없어도, 현실성이 없어도, 특별하고, 뜻만 좋다면, 그리고 평가 주체인 교수님의 마음에 들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디자인 프로젝트의 주제로 삼았다. 그 환경 속에서 내가 주로 다룬 주제는 LGBTAIQ+ 공동체와 장애인 인권이었다. 특히 장애인 인권에 대한 프로젝트를 줄기차게 작업했다. 여기엔 부모님이 몸이 불편하다는 맥락이 함께 작용했다. “지적 장애인들이 바라보는 지하철 풍경”이라는 주제의 사진 책자 작업을 하기도 했고, “지하철 휠체어 리프트 인포그래픽 포스터’ 작업을 한 적도 있다. “N호선 지역 장애인 인구 비율 대비 장애인 지하철 이용 빈도에 대한 상관 관계 시각화 프로젝트”를 했을 때는, 실천적이며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할 수도 있는 막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들을 진행했을 때 나는, 유의미한 행위를 하는 운동가라고, 남들이 하지 않는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며 사회에 의의있는 질문을 던진다고, 그래서 난 특별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업들은- 발표가 끝나고 노트북을 닫은 그 순간 이후로, 그 강의실 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예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부모님의 불편함을 직접 보고 성장했던 경험을 토대로, 장애인 이동권을 주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한 건 의미있었다. 매일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로 인해 지하철이 지연되는 상황을 목도할 때마다, 내 프로젝트 주제가 의미있는 것임을 되새긴다. 허나 현재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어떠한 변화가 생겼는가?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를 보고 진정으로 동감하여 함께 움직이고, 목소리를 내자고 하는가? 아니다. 이 프로젝트는 지금 내 노트북 폴더 구석에 포트폴리오 작업물 파일 리스트에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호기롭게 시작한, 의미 있는 나의 작업은 왜 지금 여기에 있을까? 애초부터 나는, 강의실에서 시작해 강의실에서 끝나는 프로젝트를 한 것이다. 프로젝트 당사자들인 장애인들과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 만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노트북을 두드리고, 구글에 검색하고, 철도 공사 사이트에 나온 액셀 파일 하나로 그들의 불편함을 ‘가늠’했을 뿐이다.
그렇다. 애초부터 나는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과 같은 곳에 서있지 않았다. 함께 목소리를 내고, 함께 권리 보장을 위해 움직이며, 함께 나아지자 맹세하지 않았다. 실재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1년에 몇 번이고 지하철을 이용하다 저항 없이 생을 마치는 당사자들을, 그저 내 프로젝트의 주제로만, 학점을 위한 하나의 그래픽 요소로만 다뤘던, 거만하기 짝이 없는 그래픽 디자인과 학생일 뿐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하고 남은 건 그저 ‘나도 그들을 생각했어’라며, 자신을 위로하며 쓰다듬는 한 사람 뿐이었다. 이 내가, 노오력을 통해 우울을 극복하고, 사회적 메세지가 있는 프로젝트를 했다는 상황이, 나를 저 하버드 강의실에서 강의하는 귄위 있는 교수마냥 보게끔 만들었다. 결국 그 자아 도취는 얼마 가지 않아 현실을 맞닥뜨리며 자연스레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겉만 핥는 장애 인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에 부모님의 몸이 계속 안 좋아졌고, 내가 직장에 다니면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일방적인 표준 사회를 겪게 된 것이다. 집에 가면 몸이 불편해 감히 나올 수도 없는 부모님이 계시는데, 나는 나의 사랑하는 부모님들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도 모르는 채로 100개가 넘는 계단을 두 발로 오르락 내리락 하며 출퇴근을 했다. 이 뼈저리게 짜증나는 모순이 머릿 속에 거칠게 휘몰아치며, 매번 “나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었다. 위도, 경도가 아닌 사회적 위치.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무엇을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누구를 올려다보고, 누구를 내려다 보는지. 나의 위치를 알아야 내가 무엇을 할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만적인 프로젝트를 했던 과거의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들 =/= 나”라는 사고에 꽉 막혀있었다. 나는 그들과 절대 같을 수 없는, 대척점 선상에 위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완전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완전 다르다고 할 수 없는, 그런 특별한 위치에 나는 존재했다. 이 말인 즉슨, 연대할 수 있는, 함께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선 자기 파괴적 생각과 혐오적 굴레에서 벗어나, 최대한 객관적으로 상황과 맥락을 봐야 했다. 내 특권을 파악하고, 내가 사회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걸 자각해야 했다. 이 사회에서 나는 적지 않은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도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 힘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하는지도, 내가 서있는 이 곳에서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도 공부해야 했다. 고등교육을 받은 나, 디자이너인 나, 자본주의 사회 아래 노동자인 나, 급료를 정기적으로 받는 나 등. 나를 구성하는 여러 사회적 갈래를 곱씹으니 더이상 과거를 반복해선 안된다고, 겉만 빙글빙글 돌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내가 서 있는 이 위치에서, 내가 가진 힘을 통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도덕적 사회적 신념의 땅을, 직접, 그리고 연대하고자 하는 이들과 함께 가꾸고 일구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체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나아가기 위해선, 내 위치를 알아야 했다. 부끄러웠던 시간을 지내 얻은 나의 소중한 깨달음이다. 물론 모든 이에게 적용될 말은 아니다. 누구는, 길을 잃어야 오아시스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나와 같은 생각을 했고, 하고, 할 많은 사람들에게 왠지 모를 공감을 건네고 싶었다. 길 잃어도 된다, 헤매도 된다. 그저, 올곧게 나의 길을 나아가기 위해선- 본인을 돌아보고, 마주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글쓴이.
귀여운 걸 그려요🐶🐰🐱이모티콘 작가 김아나
6주차에 걸친 디자인스터디를 통해 디자인을 둘러 싼 여러 담론들과 새로운 이론들을 접하고 함께한 사람들과 토론을 나누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짧은 과정이었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개념들을 깨부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4주차에 걸쳐 디자인의 역사를 다양한 시각과 관점에서 바라보고, 혁명적인 이론가들을 다루며 디자인의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한 여러 노력들과 방법들을 배웠다. 그 중 가장 기억 남는 것은 바로 “내가 가진 특권에 대해 돌아보기”라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었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동안 내가 어떤 특권을 누려 왔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전에는 딱히 특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나의 삶을 가장 크게 바꿔놓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영어’였다.
비틀즈와 오아시스를 배출한 나라 영국. 25살의 나는 영국을 동경했다. 영국 영어를 배우겠다며 아빠에게 거금을 뜯어내서 영국문화원에 등록했다. 영어라곤 인삿말 밖에 할 줄 모르던 내가 학원과 인강의 도움을 받아 영어를 배우고 운이 좋게도 워킹홀리데이에 합격해 런던으로 가게 되었다.
2년 동안 런던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가지 경험을 하면서 나름 영어로 일상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실력이 성장했다. 영어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나에게는 여러 기회들이 찾아왔다. 좋은 일자리를 소개받았고, 영어로 된 양질의 정보를 얻었고,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이 생겼다.
디자인 스터디를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는 제로섬 논리를 기반으로 하기에 필연적으로 위계와 불평등을 수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배웠고, 그렇기 때문에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돌아가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관점에서 내가 양질의 영어교육을 받고 많은 기회들을 누릴 때 누군가는 그 기회를 박탈당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제국주의의 관점에서 영어 교육이 우리에게 어떤 불평등을 야기했는지 조사하고 싶어서 영어제국주의라는 주제를 선택했다.
영어 제국주의와 한국
언어(영어)는 권력이다
국경의 의미가 희미해진 세계화 시대에서 영어는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만은 아니다. 영어는 우리의 존재를 입증시킬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가진 무기이다.
영어의 위상이 꺾일 줄 모르고 치솟는 가운데 한국에서도 영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길거리의 영어 간판이나 한국말과 영어가 혼용된 밈의 사용은 일상이 되었고, 한국말이 들어가야 하는 자리에 영어가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일을 마주치는 것도 더 이상 어렵지 않다.
트렌드를 거스르지 않는 세계적인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영어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문제는 그럼에도 여전히 영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소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 세계적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여전히 소수에게 국한되어 있으며, 한국에서도 영어교육의 불평등은 현존하는 문제이다.
언어 제국주의는 불평등을 전제로 한다
언어 제국주의(Linguistic Imperialism)의 저자 로버트 필립슨(Robert Phillipson)교수는 영어의 세계화가 시작된 배경에 대해 주목한다.
영어가 세계적인 언어가 된 배경에는 식민주의가 있었다. 식민지 시대의 언어 전파는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를 침략하는 제일 효율적인 도구로서 여겨지고 사용되었다.
“성공의 유일한 전망은 아이들을 기숙학교에 데려가고, 그들을 ‘‘언어에서는 영어, 매너에서는 문명, 종교에서는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원칙에 따라 확립되었다.”
– Spring, 1996, page152
필립슨은 미국이나 영국 같은 영어 사용 국가들이 선교와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식민지를 지배하고 문화적인 불균형과 위계적인 불평등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특정한 언어를 지배적인 언어로 만들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는 방식으로 착취와 불평등, 위계를 구조적으로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특정 언어가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언어 제국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평등한 권리를 수반한다.”
– Linguistic Imperialism, 2017, Robert Phillipson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영어의 세계화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었는지 아니면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져 있지 않은 사회에서 영어를 교육받을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구분 짓는 잣대로 작용하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언어 제국주의와 한국교육
식민주의를 거쳐 영어가 세계적인 언어로 자리 잡은 후에 식민 지배를 받던 국가들은 영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어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어야만 하는 위치에 놓였다.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려 한국에서도 영어에 대한 교육열이 걷잡을 수 없이 높아져감에 따라, 영어는 출세를 위한 필수 관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질 높은 영어교육에 접근할 수 없는 자들은 소외되었고, 엘리트 대학에 접근이 가능한 부유층의 경제적, 사회적인 위계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영어교육이 진행되었다. 모두에게 공평한 의사소통 수단이 될 것이라던 영어의 세계화가 결국 한 국가 내의 사회 계층의 격차를 벌리고, 위계와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겠다.
“비록 영어가 한국이 국제 플랫폼에서 “가진 자”와 “가진 자” 사이의 거리를 단축하도록 허용했지만, 저소득 가정의 많은 한국인들은 여전히 점점 더 커지는 격차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영어 능력은 사회적 요인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 반면, 명문 대학과 기업에 입학하기 위한 전형 메커니즘으로 사용되는 것은 기회의 평등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나타낸다. 영어가 급여가 높은 직업을 얻는 열쇠라면, 그러한 문을 여는 능력을 가진 특권층 출신의 졸업생들이 대부분이다.”
– English and Linguistic Imperialism: A Korean Perspective in the Age of Globalization, 2015, Michael D. Smith.Kim Donghwan, p 342
한국은 식민 지배를 받아온 국가로서 언어 제국주의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빠른 성장을 제1의 가치로 삼아온 한국은 영어의 세계화가 추진되는 가운데 무분별하게 영어교육을 장려하고 받아들였다. 그 결과 영어교육수준은 짧은 기간 안에 빠르게 성장했지만 그 과정에서 영어를 우상화하고 신봉하는 문화가 자라난 것 같다.
이제 영어의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불가역적인 흐름이다. 영어의 사용이 더욱더 보편화되고 있는 시대에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성찰이나 아무런 논의 없이 그저 영어를 우상화하고 신봉하는 문화가 누구를 소외시키고 약자의 위치에 놓았는지 질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