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4일, 이솜이(서울 오후 9시)는 이미래(암스테르담 오후 2시)에게 2주 전 공연된 이미래의 퍼포먼스 〈미래의 고향〉에 대한 대화를 요청했고, 화상 통화를 통해 90분간 대화를 나눴다.
이솜이
시작에 앞서, 작품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 크지만, 파헤치려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전한다. 질문은 작품보다 이미래에게 향한다.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에서 선보인 〈미래의 고향〉은 이미래의 첫 번째 퍼포먼스로, 이 대화를 촉발한 작품이다. 우선, 퍼포먼스를 시도한 계기와 배경이 궁금하다.
이미래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의 극장 작업 제안이 반가웠고, 뭘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무조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3년 전쯤, 플로렌티나 홀징어(Florentina Holzinger)라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코레오그래퍼(choreographer)의 작품들을 보게 되면서 팬이 되었다. 그가 내 전시 카탈로그에 글을 써주기도 했고, 이 사람을 위해 작업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최근에는 기획전에 단순히 작품을 출품하는 것보다 독무대가 많이 주어졌고 내 마음대로 작업을 연출할 수 있는 상황이 있었다. 기존의 작업이 풍경이나 세트장 같거나 영화적, 연극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이솜이
〈미래의 고향〉은 배선희, 이민휘(이하 ‘협업자’)에게 퍼포먼스를 의뢰해 제작되었다.1 두 협업자의 퍼포먼스는 각각 다른 전개를 보이지만, 작품 후반부에서는 조명이 점등된 상태에서 퍼포머의 독백과 노래가 나오고, 꿈과 욕망의 내러티브가 동일하게 드러나는 등 특정 서사를 공유했을 것 같다. 위임 이전에 두 협업자에게 공유된 내용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무엇이 위임되고, 무엇이 위임되지 않았는가?
이미래
두 분의 실연은 100% 본인들의 작품이다. 나는 패시브(passive)한 역할을 주로 했고 그분들을 위한 판을 깔았다. 커미션을 드릴 때 내 작업 안에 그들의 작업을 삽화처럼 삽입하는 식으로 생각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두 분에게 독무대를 드리는 것.
나는 두 분의 퍼포먼스 앞뒤에 무대가 열리고 닫히는 부분의 코레오그래피(choreography)까지를 짜고, 퍼포먼스의 서사는 연출하지 않았다. 두 분이 리허설 하는 것을 계속 참관하면서 피드백 했고, 나한테 질문하면 같이 풀어나갔다. 그들을 어시스트(assist)한다는 느낌으로 임했다.
처음 시작할 때 협업자, 스텝들과 함께 영화 In The Air (Liza Johnson, 2009)와 Land of Silence and Darkness (Werner Herzog, 1971)를 봤고, 내 작업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공간에서 작품을 준비할 수 있도록 주어진 기간이 10일이었는데, 나는 이때 설치를 진행하고 협업자들도 설치 진행상황을 보면서 즉흥적으로 작품을 구상하도록 부탁했다. 근데 두 분 다 리허설 시작되기 전부터 작업 구상을 하셨더라.


〈미래의 고향〉 퍼포먼스 버전 – 배선희, 이민휘의 실연.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이솜이
퍼포먼스 제작을 협업자에게 위임하는 것이 이미래를 긴장시켰는지 혹은 오히려 어떤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켰는지 궁금하다.
이미래
방어 기제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내 전시를 올리면 사람들을 마주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작업에 대한 비평에도 관심이 안 갈 때가 있다. 차라리 전시를 올리고 보지 않기를 선택하면 거기서 어떤 단절이 일어난다. 그리고 나중에 재방문을 한다. 내 작품이 정말 잘 나왔는지,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만큼이나 울렸는지 이런 것은 시차를 두고 알게 된다고 느낀다.
〈미래의 고향〉에서는 내가 디렉팅하고 현장에서 큐도 주게 되니까 특정 장면의 세부적인 조작이 틀리지 않을지 조마조마했다. 내 작업을 보러 온 사람들의 몸뚱아리를 가까이에서 계속 목격해야 하는 것도 그렇고 나와 작품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농담으로 두 번은 못하겠다고 그랬다. 한편으로 내가 정말 좋다고 생각하는 작업자를 내 세계에 삽입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거기서 해방감도 많이 느꼈다. 협업자들의 작업이 내 작업으로서 보이는 것이 신기했고 스릴 있었다. 작업이 어떤 식으로 갈지 모르지만, 사람들을 믿고 지지해 주는 도박 같은 과정.
이솜이
언어는 아주 명징한 기호고, 너무 많은 것을 구체화한다. 2019년, 이미래는 말을 하는 것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살아있는 것은 무섭다.(···)덩어리, 구멍, 반죽, 무더기, 구덩이를 쳐다보게 되는 이유는 그것들이 말을 걸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젖은 채로 꿈틀거리는 것들은 말들과 관계하지 않는다”2
〈미래의 고향〉에서 두 협업자는 권민경,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 김승일의 텍스트를 직접 인용해 50분의 시간을 언어로 가득 채웠다. 김언희 시인의 시구가 그야말로 쏟아졌던 ≪봐라, 나는 사랑에 미쳐 날뛰는 오물의 분수≫(Museum fur Moderne Kunst, 2022)를 비롯해 이미래의 최근 몇 작업에서는 언어가 과잉에 가까운 밀도로 쏟아지기도 한다. 말과 관계하지 않는 것을 응시하던 이미래의 시선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그렇다면, 이런 기호들로부터 이미래가 엿보고 있는 가능성은 무엇일까. 특정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이미지가 가끔씩 작업에 등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래
예전에 만화 이론 서적에서 본 적 있는데, 얼굴을 스마일로 그리면 모든 인류가 다 포함될 수 있는 반면, 얼굴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할수록 더 적은 수의 인류가 포함될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추상화를 그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앱스트랙션(abstraction)에 가깝게 작업한다고 생각한다. 덩어리 혹은 무더기가 환기하는 감정은 형상이 무너진 것이고 거기에는 들어올 수 있는 세계가 많다. 다만 기호를 무너뜨리는 것이 작업의 목표라고 말할 만한 아젠다(agenda)가 있는 것은 아니다. 뭔가를 명확하게 잘 말하는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을 피하고 싶고, 그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주로 기호와 멀리 있는 작업을 하는데, 거기에 갑자기 쨍한 것이 들어올 때 만들어지는 효과가 있다.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있다.
내가 관심을 두는 건 쌓아가는 것, 혹은 계속해서 나아가는 진보가 아니고 어떤 추락, 무너짐이나, 혹은 어떤 ‘컷(cut)’-단절이거나 ‘점프(jump)’다. 미적인 언어로 거기에 근접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마스터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작가 개인으로서의 정치적인 실천도 있겠지만, 형식적으로 추락과 컷을 주는 것도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안드레아, 나의 가장 온화한 꿈 속에서〉(2016)의 여자들 이미지는 포르노 중독을 앓던 시절에 봤던 배우들의 얼굴이다. 비슷하게 몇 작업에서 김언희의 시도 사용했었고, 이어서 실제로 살아 있는 신체와 작업해보고 싶다는 욕심이나 욕구 같은 게 생기는 것 같다. 맨날 똑같은 것만 하기 싫은 건가 이런 생각도 든다.

(오른쪽) Lee Mire, Look, I‘m a fountain of filth raving mad with love, Museum fur Moderne Kunst (MMK), 2022. photo ©Axel Schneider, Courtesy of artist.
이솜이
〈미래의 고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미래의 작품에서 살아 움직이는―그것도 아주 적극적인―인간이 등장한 점이다. 이전 작업에서도 인간이 등장한 적은 있었지만, 촬영된 것이었고, 자거나 서 있는 등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미래는 말할 수 없는 덩어리에 시선이 향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기존 작업이 특정 유기체를 연상시키되 언어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존재인 인간만을 연상시키지 않게끔 조형되었던 지점과 관계한다고 생각한다. 협업자에게 퍼포먼스를 위임할 당시 이미래는 두 협업자가 제작자이자 퍼포머, 두 가지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 그러니까 인간의 몸이 작품에 적극적으로 등장하게 될 것을 짐작했을 것 같다.
말하는 인간의 몸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게 된 과정까지,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이뤄진 것인지 궁금하다. 또 〈미래의 고향〉에서 이미래가 구성한 쓰레기 조각과 인간 신체,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재료들의 조우를 어떻게 예측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이미래
〈미래의 고향〉에서 퍼포먼스를 위임할 때 당연히 신체가 작업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신체를 도입할 때 어떤 희미한 의도나 짐작은 있었지만, 거대한 내러티브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엄청난 쓰레기 더미들을 폭발적으로 쓰려했을 때, 당연히 그 안에서 사람이 연약하고 무기력해 보이거나 혹은 반대로 그것 때문에 더 힘이 있어 보이겠다는 상상이 있었지만 뭔가를 의도하지는 않았다. 썩은 과일은 부드럽고 쇳덩이는 단단한 것처럼, 각 물질이 갖는 힘이 있고 그것들을 콜라주 했을 때 나오는 힘이 있다. 거칠고 날카로운 산업 쓰레기 잔해와 사람이 함께 병치 될 때 나오는 감각은 의도한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것이다.
나는 내 몸 안에 갇혀서 작업을 하니까 내가 하는 작업들은 나한테 어떤 행위이자 흐름이다. 작업과 내가 쭉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할까. 이 작품은 나에게 일어난 해프닝 같은 것이다. 나한테는 내 결정들이 어떤 의도인지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오케스트라를 짜는 작가적 자아가 없다. 왜 그런 결정들을 내렸는지에 대한 이해는 사후적으로 일어나곤 한다. 인터뷰하는 시점이 아직 일러서, 이 질문에는 충분히 대답할 수 없다.
나한테는 작업자로서 리스크가 중요하다. 테이트 모던 전시(Open Wound, Tate Modern, 2024) 이후 처음 선보이는 작업이었고, 안 해본 방식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은 욕심이 훨씬 컸다. 극장이니까, 극장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고 싶었다. 〈미래의 고향〉을 했을 때 시기적으로 스스로한테 충격을 주는 것을 갈구하던 시점인 것 같고 지금도 그렇다.
이솜이
기존 조각 작업들이 어떠한 방식이나 정도에서건 움직임을 가졌다면, 〈미래의 고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전시와 퍼포먼스 사이에 조각들이 이동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조각들 자체의 움직임이 아닌 스태프에 의해 발생된다. 이미래가 구성한 부분에서의 조각들은 어떤 수행성을 갖도록 제작된 것이 없고, 에너지가 없는 것들만 있다. 어떤 조각은 살아 있는 사람이었지만 타버린 시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래의 고향〉은 산업 폐기물을 주 재료로 삼고 있으며, 이가 내러티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당연한 설정일 수 있다. 어쩌면 조각의 수행성 자체를 이전과 달리 설정하는 과정에서, 양식적인 변화와 함께 도출된 내러티브일 수도 있겠다. 그 선후를 분리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이미래
〈미래의 고향〉 제작을 시작하기 전 협업자들과 나눴던 자료들 중 한 가지가 불에 탄 우주비행사 사체의 이미지였다. 루머에 의하면 그는 낙하할 것을 알고도 결함이 있는 우주선에 탔다고 한다. 본인이 죽으면 관을 열어서 장례를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조각 자체가 전통적으로 기립이 되어 있는 것이라고들 하지 않나. 그러나 나는 예전부터 누워 있거나 자는, 혹은 활동력과 지성이 빠져나간, 또는 뭔가 수평적으로 누워 있는 상태에 애착이 간다. 점점 죽음을 가지고 작업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 같다. 〈미래의 고향〉에서도 생산성으로부터 정반대에 놓인 어떤 상징물로서 쓰레기로 작업을 하고 싶었다. 생산성의 정반대가 쓰레기라면 삶의 정반대는 죽음일 텐데, 이런 사례들을 다뤄보려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이솜이
〈미래의 고향〉은 전시 버전과 퍼포먼스 버전, 두 구조로 이뤄졌다. 나는 두 버전이 급진성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정도의 차이가 심하다고 느꼈는데, 그 차이는 관객을 배치한 방식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전시 버전에서 관객은 폐기물들이 뒤엉켜 위험해 보이는 잔해들 사이를 지나고, 천장 높이 매달린 조각들을 고개를 들어 쳐다보게 된다. 헤비메탈 음악 Dopesmoker가 흐르는 시간을 느낄 수 없게끔 반복 재생되고, 귀가 아플 정도로 큰 소리로 공간을 메운다. 나는 공간에 파묻혀 공격당하는 것처럼 느꼈다.
반면 퍼포먼스의 관람은 발코니 위에서 이뤄졌다. 전시에서는 위를 봤다면 퍼포먼스에서는 아래를 내려다봐야 했다. 관람자와 수행자 사이의 역학관계를 소거했다고 느낄 만큼 서로가 꽤 먼 거리감으로 구성되었고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관객이 휘말릴 여지가 없는 위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퍼포먼스는 〈미래의 고향〉에 대한 작가의 말처럼, “오늘날 잔해의 이미지는 우리가 망각하고자 몸부림치는 대상이면서도 언제나 우리 바로 뒤에 바싹 붙어 있는” 3 감각을 의도적으로 희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 이미래가 작가 리 보워리(Leigh Bowery)의 사례를 언급하며 너무 심하다고(over the top)할만한 작업을 고민한다고 말한 바 있는 만큼,4 기존 작업에서 보였던 급진성과 〈미래의 고향〉의 퍼포먼스 버전은 꽤 다른 온도로 느껴진다. 퍼포먼스와 전시 버전의 급진성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도록 설계된 것일까.
이미래
맞다. 작업 소개에서 말한, 어떤 이미지가 우리 바로 뒤에 바싹 붙어 있는 듯한 감각은 전시 버전일 때 시도했던 부분이다. 퍼포먼스 버전은 협업자에게 작품을 의뢰한 형식이나 작업 기간 자체가 촉박한, 비관습적인 타임라인이었기 때문에 관객들을 발코니에 올려 관람 거리를 멀리 떨어트려 놓음으로써 퍼포머에게 안전 장치를 주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극장 작업이 처음이라 시점을 설정하는 것도 재미있었는데, 관객이 두 시점을 모두 볼 수 있도록 발코니에서 보게 했다. 미술관에서 퍼포먼스를 볼 때면 작품을 보고 있는 나를 남들이 보는 것 같은, 나르시시즘(narcissism)적인 자기의식과 작품을 보는 경험이 뒤죽박죽돼서 퍼포먼스를 온전히 보기 힘들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이러한 상황을 제거할 수 있는 방식을 원한 것도 있다.
평소엔 작품을 전시에 설치하고 나면 끝이었는데, 무대 자체를 설치하고 그것이 콜랩스(collapse)되는 과정 전체를 구성하고 다듬는 것도 매우 매력적이었다. 퍼포먼스 실연 직전까지 재생되던 음악인 Dopesmoker는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느낌, 마치 대기실에 있는 듯한 느낌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솜이
이미래가 기존에 전개하던 조각 · 설치 작업과 퍼포먼스의 포맷은 시간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점이 많다. 지하철에 가만히 서 있는 여성을 촬영한 푸티지(footage)가 조각에 삽입된 〈안드레아 나의 가장 온화한 꿈 속에서〉(2016), 잠자는 이를 촬영한 〈잠자는 엄마〉(2020) 등 영상 작업이 있었지만, 이들은 정적 상태에 가까운 것이었다. 작품 캡션에 러닝타임조차 기재되지 않을 정도로 시간과 무관해 보이는 루프(loop) 형태다.
퍼포먼스는 장면보다는 사건 위주로 전개되며, 대게 시작과 끝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미래 또한 〈미래의 고향〉에서 타임라인을 설계해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미래에게 퍼포먼스의 시간이 어떻게 감각되었는지 궁금하다.
이미래
협업자에게 러닝타임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했다. 1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고, 1시간 동안 무엇을 해도 괜찮다고 했다. 시간 매체를 직접적으로 경험해 본 건 처음이고 생각했던 것과 달라 충격을 많이 받았다. 긴급함(urgency)의 정도가 기존 작업들과 다르고, 새로웠다. 나도 기존에 다양한 역할의 사람들과 협업해서 큰 규모의 작업을 만들어 왔지만, 〈미래의 고향〉에서 새로웠던 부분은 작업이 시작하는 시간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오거나 큐를 하면 작업이 한 번에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주는 긴박함이 놀라웠다.


이솜이
대개의 퍼포먼스는 현실의 시공간 조건 안에서, 모든 이의 시간처럼 앞으로 흘러가고 실시간으로 펼쳐진다. 또한 작가의 상상을 실현하는 데 있어 물리적으로 제약이 많은 인간의 신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는 한다. 이러한 점에서, 퍼포먼스에서는 여느 다른 매체에 비해 작가가 구성하려는 픽션이 자유롭게 작동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퍼포먼스는 비교적 꽤 긴 시간 관객에게 노출되며 많은 것이 들춰지기도 한다. 퍼포먼스의 면모가 이미래를 수치스럽게 하거나 당황스럽게 한 부분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미래
오히려 반대로 느꼈다. 조명을 써서 가리기 쉽고, 노래도 엄청 크게 틀 수 있고…극장에서는 간단한 조작으로도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트릭(trick)이 많고 폭발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부분을 날 것으로, 납작하게 쓰고 싶어 〈미래의 고향〉에서도 객석을 접고 펴거나 바턴(batten)을 올리고 내리는 단순한 동작을 사용했다. 간단한 장치를 힘 있게 사용하는 방식의 접근을 좋아하는 편이다.
이솜이
이미래의 퍼포먼스는 이어질까.
이미래
정말 재연하고 싶다. 다음에 하면 훨씬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관객 경험에 대한 컨트롤 준비가 안 돼 있었던 것이다. 현장에서는 어떤 안내를 해야 하고 예약 문자가 갈 때 어떤 식이여야 하는지, 작은 디테일에 따라서 경험이 완전히 바뀌더라.
이솜이
철거되고 휘발되는 공연과 퍼포먼스의 습성은, 앞서 이미래가 말한 ‘붕괴’, ‘무너짐’의 형상 혹은 성질과 닮은 것 같다. 이미래는 〈미래의 고향〉이 기록 없이 사라지기를 바라는지, 이에 대한 오해와 오기록들이 생산된다면 작가는 어떻게 느낄지 궁금하다. 혹시 사랑해 줄 수 있을지…
이미래
기록. 내가 컨트롤을 잃어버린 분야 중에 하나다. 뮤지올로지(museology)의 영역까지 생각한다면, 내 작업들이 어떻게 남기를 바라는지 혹은 사후의 일들, 그런 것들은 생각할수록 거대한 문제라서 생각을 포기해 미끄러져 나가버린 부분이다. 지금은 오기록들을 개의치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생각할수록 두렵고 끔찍해서 손 놓고 있다. 우주적으로 생각했을 때 모든 것이 다 먼지가 될 텐데 컬렉션 같은 개념은 더욱 생각하기 어렵다. 한편으로 내 작업의 자양분도 컬렉션을 하는 노력들과, 과거에 있었던 것들로부터 오지 않았나. 이에 대해서는 자아 분열이 있는 것 같다.

〈미래의 고향〉 기록
2025년 3월 28–29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다원공간에서 이미래의 〈미래의 고향〉5이 전시와 퍼포먼스, 두 가지 버전으로 펼쳐졌다. 배우 배선희와 음악가 이민휘가 각 3차례, 약 50분 내외의 퍼포먼스를 구성한다. 이미래는 약 24×20m 크기의 블랙박스형 공간을 설치로 가득 채우고, 배선희와 이민휘는 동일한 무대를 기반으로 서로 다른 전개와 구성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전시 버전에서는 전선, 멀티탭, 밧줄이 심각하게 엉켜 만들어진 덩어리들과 큰 비닐, 분쇄된 철판, 차의 파편으로 보이는 것들이 함께 널브러져 폐허의 공간을 연출한다. 이미래의 기존 작업에서 사용된 액체 운반용 호스나 조각의 일부처럼 보이는 것들도 함께한다. 어두운 공간을 채운 주황빛 조명과 함께, 밴드 Sleep의 곡 Dopesmoker가 머리를 멍하게 할 정도의 높은 볼륨으로 송출된다. 퍼포먼스 시간이 다가오면, 관객은 스텝으로부터 퇴장을 권유받는다. 작품이 설치된 지하 1층에서, 그 위층인 중층 발코니로 안내받는다. 관객은 발코니에 서거나 주변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퍼포먼스의 시작을 기다린다. 약속된 시간이 되면 스텝들이 지하 1층 무대를 가득 채웠던 쓰레기 중 3분의 1 정도를 치우고 퇴장한다. 여기까지가 이미래가 마련한 장면이다.이내 배선희, 이민휘의 시간이 펼쳐진다. 천장 가까이 매달려 있던 바턴이 바닥 언저리까지 내려오면서, 높이 매달려 있던 이미래의 조각들도 폭삭 주저앉는다. 두 사람이 구성한 시간이 끝나면, 무대는 닫힌다. 스텝들은 공간에 조각과 쓰레기를 다시 펼쳐놓고, 음악이 재생되며 이미래의 무대가 다시 열린다.
이미래
이미래는 학부에서 조소와 영상매체를 전공한 후, 조각 설치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그는 포르노그래피, 폭력, 에로티시즘, 여성 신체 등의 주제를 탐구하고 점토, 섬유, 콘크리트, 실리콘 등 미술 재료에서 산업폐기물 등의 재료까지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비정형 조각 설치를 구현한다. 개인전으로 Lee Mire: Open Wound (Tate Modern, 2024), Look, I’m a fountain of filth raving mad with love (Museum fur Moderne Kunst, 2022), HR Giger & Mire Lee (Schinkel Pavillon, 2021-2022), Carriers(아트선재센터, 2020), 그 밖에, Black Sun (New Museum, 2023),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2022), 2019년 제15회 리옹비엔날레, 2022년 부산비엔날레 등 다수 기획전과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이솜이
이솜이는 미술을 둘러싸고 연구하고 기획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관리과를 거쳐 전시과에서 학예원으로 재직하며, 최근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2024) 제작에 참여했다. «점자동시병렬 그림»(모두예술극장, 2023), HOLE (윈드밀, 2021), piercer (SeMA 창고, 2021), Perform 2019: Linkin-out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일민미술관, 2019)을 기획하고, Guest Relations (Jameel Arts Centre, 2023)에 텍스트로 참여했다. 『얽힌 언어들의 사전』(미디어버스, 2024), 『black spell hotel』(2022)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