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총의 올해의 전시(2024)

2024년 9월 20일,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돈선필 개인전 《Electric Tomb Raider》를 봤다. 이 전시는 남부터미널 인근에 위치한 국제전자센터 안의 한 점포에서 진행됐다. 한 평 남짓한 작은 점포 안에 작가가 수집한 오타쿠 상품과 제작한 작품이 한데 엉켜 쌓여 있었다. 작품은 일반적인 전시처럼 벽에 걸리거나 넓은 공간에 세워지는 대신 상품 재고처럼 진열대에 진열되거나 쌓여 있었다. 옆의 점포, 앞의 점포와 다를 것 없이 평범한 가게의 모습으로,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이 진짜 점포들 사이에 숨겨진 전시장을 찾아야 했다. 

1997년 문을 연 국제전자센터는 용산 전자상가, 영등포 테크노마트와 더불어 서울의 3대 전자상가로 불리나, 현재는 오프라인 전자상가의 쇠락과 함께 한적한 곳이다. 빈 점포들 사이로 여전히 전자기기를 파는 가게들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반면 오타쿠 상품을 파는 가게가 밀집한 층은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쇠락과 더불어 리모델링되지 않은 상가는 촌스러운 안내판, 오래된 광고 이미지, 유행이 지난 인테리어와 함께 90년대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 안에서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장소를 용도변경하여 쓰는 오타쿠 문화가 뒤엉켜 만든 풍경은 기이했다. 한적한 상가들 사이를 지나, 오타쿠 상품이 몰려 있는 곳에 이르자 젊은이들의 욕망의 에너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전시가 있었다. 높은 임대료가 형성된 도시 안에서, 모종의 이유로 상대적으로 낮은 임대료가 책정된 부동산에 몰래 들어온 전시가 숨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 전시는 필연적으로 그 장소 안에서 보아야 한다. 옆 가게와 앞 가게, 위층과 아래층을 지나며 그 틈에 정박해 있는 전시를 만나야 한다. 이로써 전시는 그 모든 것이 현재임에도, 서울의 일상적 시공간을 벗어난 어딘가로 시간여행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하면서, 그 장소 자체를 미술의 대상으로, 감상해야 할 작품으로 바꿔낸다. 전자상거래의 활성화로 전자상가가 몰락하는 시대적 상황, 그 틈에서 피어나는 서브컬처 문화, 도시의 그 기이한 현상과 상황 자체를 작품으로 삼아 감상하게 한다. 

그러나 돈선필은 그 공간을 감상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에도, 관객과 자신을 구경꾼에 위치에 놓고 장소를 대상화하지 않는다. 오타쿠 상품을 파는 가게 특유의 분위기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전시장은 진짜 점포들 사이에 자리잡고 앉아 진짜와 가짜 사이의 접면을 연기한다. 좁은 가게에 서브컬처 상품을 죽 쌓아 놓고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와 돈선필의 개인전 전시장은 외관상으로는 차이가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마치 작가가 그러한 가게를 연기하는 퍼포먼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작가 본인이 그 장소의 일부가 되면서, 진짜들 사이에 그럴듯하게 숨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돈선필은 미술을 바깥으로 꺼내 세계의 일부가 되도록 하면서, 세계 자체를 미술의 대상이 되도록 한다. 세계를 흉내낸 가짜가 유사 거울처럼 세계 안에서 세계를 비추고 있다. 

돈선필 개인전 《Electric Tomb Raider》(국제전자센터, 2024) 전시 전경

2024년 12월 24일, 쨍하게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에 곽이브 개인전 《이사24》를 봤다. 이 전시는 선유도역 인근에 위치한 전시공간 Hall1에서 열렸다. 창고와 공장이 죽 늘어선 골목에 있는 Hall1의 문을 옆으로 밀고 들어가면, 아마도 이전에는 창고였을, 창고처럼 생긴 전시장 안에 이삿짐이 된 작품들이 재고처럼 정리되어 있다. 작가의 이전 작업과 새로운 작업이 앞과 뒤로,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Hall1은 층고가 높고 공간이 넓게 트여 있어 많은 작가가 선호하는 전시 공간이다. 이전에도 여러 번 가 봤고, 좋았던 경험도 많은 공간이다. 그런데 《이사24》는 그동안 그 전시장을 경험한 방식과는 또 다르게 경험하게 했다. 박공지붕의 형태와 복층 구조라는 전시장의 독특한 구조를 활용하여 설치한 벽돌벽 무늬의 작품이 다세대주택 집의 특징을 상기하게 한다. 중앙에는 바닥 무늬 방석이 바닥처럼 놓이고, 양쪽 벽에는 천장이 높은 벽면 꼭대기부터 벽지처럼 작품이 걸렸다. 일상의 풍경은 작품의 일부가 되면서 현실의 흔적을 아주 옅게 지닌 채 새로운 기호가 된다. 다세대주택의 벽돌 벽이 전시장 벽이 되고, 집안의 나무 몰딩이 캔버스 위에 그려지고, 바닥의 무늬가 방석으로 놓인다. 작품의 기원이 되는 건축적 형태와 작품의 형태, 전시장의 형태가 절묘하게 이어지며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이 전시가 전시 바깥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완전히 추상화된, 전시장 안에서의 논리 구조로 이루어진 이야기다. 이 작품들은 전시 바깥의 것, 미술 바깥의 세계를 그대로 지시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세계는 일종의 기호가 되어서 작품에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전시장 가장 안쪽 계단을 따라 복층으로 올라가면, 계단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안쪽 공간에 하늘의 단면이 전사된 것처럼 옮겨져 있다. 밝게 빛나는 형광등의 빛 위로 하늘색 사각형의 하늘이 자리하고 있었다. 형광등이 빛을 밝혀 비추는 하늘, 완전한 인공 하늘이 그곳에 있었다. 자연적 하늘은 전시장에 들어와 완전하게 기호화된, 추상화된 하늘이 된다. 그렇게 곽이브는 외부적인 것, 일상적인 것을 추상화하여 미술 안에 담는다. 그것은 바깥 세계의 무언가로부터 만들어졌지만, 완전히 기호화된 대상으로서 새로운 맥락과 존재 방식을 갖는다. 

곽이브 개인전 《이사24》(Hall1, 2024) 전시 전경

미술이 미술 바깥의 세계와의 접면에서 그 관계를 다양하게 실험하는 것이라고 할 때, 두 전시는 각각 다른 방향으로 세계와 관계맺는다. 《Electric Tomb Raider》가 전시를 세계 안에 일부가 되도록 하여, 세계 전체를 바라보게 한다면, 《이사24》는 세계를 전시 안의 일부로 가져와, 새롭게 조형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술과 세계 사이의 간격, 낙차, 거리는 각각 다르지만… 그것이야말로 미술을 미술답게 만든다. 관객은 그 거리 사이를 움직이며 각자의 재미를 찾는다. 2024년, 두 전시는 간만에 그 재미를 느끼게 했다. 


권정현
2016년부터 미술비평 콜렉티브 옐로우 펜 클럽에서 글을 썼고, 2022년부터는 전시 및 프로그램 공간 YPC SPACE를 공동 운영하고 있다. 필명(총총)과 본명(권정현) 사이의 구분은 흐려졌으나, 그럼에도 때때로 총총으로 글을 쓰고 싶어진다. 그 사이에는 여전히 뭔가가 남아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