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섭취 관객성

전시장 바닥에 앉아 퍼포먼스를 기다릴 때, 퍼포머가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를 때, 모두가 신기하리만큼 본능적으로 온갖 부산스러움을 떨쳐 내며 헛기침을 하거나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제야 나는 하필이면 이 시간, 이 장소에 모여 퍼포먼스의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이름 모를 관객들의 얼굴을 살핀다. 한 번 팔기 시작한 눈은 퍼포먼스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바쁘게 움직이며 관객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포착한다. 이는 일종의 ‘상호 관찰’이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지만, 동시에 그 무대를 바라보는 서로를 본다.

문득 어릴 적 엄마를 따라간 교회에서 예배 중 기도 시간에 나 혼자 눈을 똘망하니 뜨고, 감은 눈 뒤로 멀어진 사람들을 지켜보던 순간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다시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에서 관객의 반응으로 초점을 옮겨대며, 비언어적인 화살표의 방향을 남몰래 담아낸다. 단 한 번의 순간을 다른 관점에서 엿본 듯한 만족감이 드는 한편, 퍼포머와 제작자들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이 집중력 저하의 원인을 잦은 연애 프로그램 시청으로 인한 습관적 도파민 사냥 탓이라 생각하며, 다시 곁눈질에 집중한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 곁눈질은 퍼포먼스 현장에서만 발생하는 일은 아니다. 나는 비슷한 시선을 꽤 자극적인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환승연애 4〉를 시청할 때도 반복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글은 ‘다방향적인 퍼포먼스 관람과 본편 및 리액션 영상의 상호보완적 소비로 이어지는 현상에서 현재적 관객성을 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요즘 들어 잦은 퍼포먼스 관람과 연애 프로그램 시청으로 인해, 동시적 관객이자 시청자임을 자각한 이의 기록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오늘날 쏟아지는 이미지와 정보의 밀도 속에서, 미술관에서 본 퍼포먼스와 스크린 속 리얼리티 쇼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는 어떤 공통된 징후가 포착된다. 그것은 하나의 중심에 시선을 고정하기보다, 대상과 그 주변을 동시에 아우르며 끊임없이 정보를 탐색하는 ‘다방향적 관람’의 태도다.

시간을 재료로 하는 예술을 마주할 때, 관객은 흐르는 시간을 붙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특히 퍼포먼스 관람은 단순한 장면 감상이나 시각적 인지에 그치지 않는다. 비일상적인 연출과 공간을 압도하는 음향 시스템의 확장, 그리고 퍼포머의 신체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관객에게 실질적인 접촉과 감각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이 강렬한 물리적 공명 속에서 관객은 개별적인 감상자를 넘어 ‘공동의 경험’을 수행하는 집단이 된다. 

오민의 〈동시, 퍼포먼스〉(2025)는 이러한 현장성을 극대화하는 사례다. 작가는 ‘동시’를 위계없이 다발적으로 생성되는 여러 층위의 정보가, 무질서하게 덩어리질 수 있는 특정한 상태의 전제조건으로 정의한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층 전시장을 통째로 게워 낸 뒤, ‘촬영-춤’이 실행될 수 있는 세트장으로 탈바꿈한다. 중앙 홀웨이를 촬영 장비와 크루가 이동하는 일종의 무대와 같이 비워 두고 블랙 드레스코드를 맞춘 관객을 양쪽 레일과 오르막 구조물 끝에 배석한다. 촬영의 시작이 곧 공연의 시작이다. 관객은 제작과 공연이 공존하는 비결정적인 시간성에 여과 없이 노출되며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완성된 결과인지 기록의 과정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된다. 관객은 눈앞의 퍼포먼스를 쫓으면서도, 동시에 자신과 함께 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타인의 반응, 그리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촬영 크루의 신체와 장비들의 소음을 온몸으로 감각한다. 이때 발현되는 관객의 인지 능력은 마치 두 자루의 색이 다른 연필을 한 손에 쥐고 밑줄을 긋는 것과 같다. 한쪽 시선(혹은 감각)으로는 퍼포먼스의 실체를 직선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다른 쪽 시선으로는 이 비일상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상호 관찰’의 맥락을 입체적으로 촬영해 내는 것이다. 이는 현장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 사이의 긴장과 이완을 작품의 일부로 포섭하며 또 다른 ‘라이브니스(liveness)’를 형성하는 적극적인 미적 개입이다. 무언가를 보는 즉시 사라지는 그 생생함은, 관객의 사후적인 감상을 통해 글과 말로써 구조화된다.

오민, 〈동시, 퍼포먼스〉(서울시립미술관, 2025). 사진: 이지영(태동스튜디오),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적극적 개입’과 ‘동시 참여’의 욕구가 디지털 환경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된다는 사실이다. OTT를 통해 방영 중인 〈환승연애 4〉의 소비 방식은 이를 증명한다. 매주 본편이 공개된 직후, 유튜브에는 본편보다 더 뜨거운 화력과 조회수를 자랑하는 리뷰 콘텐츠들이 쏟아진다. 시청자들은 본편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곧바로 유튜버들의 리액션 영상을 찾아 나선다. 특정 회차에서는 원본 콘텐츠보다 해석된 2차 콘텐츠가 더 큰 파급력을 가지며 주객이 전도되기도 한다. 이는 관객이 단순히 서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자신의 감상과 해석을 타인의 것과 비교하고 확인 받고 싶어 하는 ‘동시 참여’의 욕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시사한다. 리뷰 영상의 댓글창은 거대한 객석이 되어, 실시간으로 서로의 반응을 살피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상호 관찰의 장이 된다.

물론 이 두 현상 사이에는 분명한 물리적 차이가 존재한다. 오민의 퍼포먼스가 신체의 현존과 실질적 접촉을 전제로 한다면, 〈환승연애〉의 소비는 복제 가능한 스크린 환경에 의존한다. 그럼에도 동일한 ‘다방향적 관람’이 발현되는 것은 동시대 관객의 인지 방식이 이미 디지털 환경에 의해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프라인 현장에서도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스캔하듯’ 주변의 모든 맥락을 복제 가능한 파편(캡처)으로 재매개하고, 온라인에서는 실시간 리뷰와 댓글을 통해 ‘지금, 여기’의 집단적 반응을 경험한다. 미술관의 퍼포먼스가 주는 감각적인 실질적 접촉과 리얼리티 쇼가 파생시키는 리뷰 콘텐츠의 폭발적인 화력. 얼핏 양극단에 있는 듯한 이 두 현상은 결국 ‘동시 섭취’와 ‘상호 관찰’이라는 하나의  관객성으로 수렴된다. 동시대 관객은 단일한 몰입보다는 다방향의 통찰을, 고립된 감상보다는 사후적으로 연결된 경험을 선호한다.

오민, 〈동시, 퍼포먼스〉(서울시립미술관, 2025). 사진: 최형락,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동시대 관객의 관람 방식은 이러한 이중적 시간 감각 속에서 형성된다. 디지털 환경에서 우리는 콘텐츠를 하나의 서사나 경험으로 대하기보다 조정 가능한 데이터의 집합으로 다룬다. 불필요한 장면은 스킵하거나 결말을 빨리 알기 위해 2배속으로 소비하기도 한다. 콘텐츠의 시간을 존중하기보다, 자신의 속도에 맞게 시간을 압축하고 재배열하는 적극적인 편집자가 된다. 반면 퍼포먼스와 같은 공연예술에서는 단일한 순간, 건너뛰거나 되감을 수 없는 비가역적인 시간을 기꺼이 점유하며 감내한다. 이처럼 디지털과 오프라인을 오가는 관객은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시간 전략을 구사하지만, 이 두 태도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람 습관 안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퍼포먼스를 보며 관객의 반응과 공간의 소음을 함께 감각하는 일, 본편 감상에 덧붙여 리액션 영상과 여론의 흐름을 병렬적으로 따라가는 일은 모두 하나의 장면을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처리하려는 관객의 인지 방식을 드러낸다. 이렇듯 수없이 충돌하고 부딪히는 시각성 사이에서, 관객은 더 이상 단일한 시선으로 작품에 몰입하는 존재가 아니라, 중심과 주변, 현장과 기록, 실시간성과 사후 해석을 오가며 감각을 조율하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동시 섭취의 관람 방식은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보이지만, 새로운 책임을 수반한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빠르게 판단할 수 있게 된 만큼, 관객은 예술적 의도와 타인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소비하는지에 대해 이전보다 더 복잡한 윤리적 질문에 직면한다. 결국 동시대 관객성은 효율과 비효율, 편집과 점유, 압축과 체류라는 상반된 시간 감각을 조정하며 형성되는 과정적 상태에 가깝다.

오민, 〈동시, 퍼포먼스〉(서울시립미술관, 2025). 사진: 이지영(태동스튜디오),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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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장면 만들기로서의 전시와 출판, 구조 짓기에 주력한다. 디자인과 예술이론을 공부했으며 책과 말, 이미지와 시간성을 매개로 한 텍스트 기반의 협업을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