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더운 여름이다. 한낮의 해가 내리쬐는 거리를 보면 밖을 나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해가 지고 나서야 더위는 한풀 주춤하고 돌아다닐 만한데, 전시장은 대부분 여섯시면 문을 닫아버리니 별수가 없다. 무더위를 뚫고 전시장에 겨우 당도하면 기진맥진하여 전시도 보는 둥 마는 둥이다. 그래도 에어컨이 있는 전시장이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은 공간은 정말, 힘들다.
얼마 전에는 시청각에 돈선필 개인전 <민메이 어택: 리-리-캐스트>를 보러 갔다. 이 더위에 시청각까지 갈 엄두가 안 나서 미루고 미루다가 끝나기 직전에야 가서 봤다. 그날도 여전히 더웠고, 경복궁역에서 시청각은 천 리 길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선풍기 앞에 서서 열기를 좀 식히고 난 뒤 전시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마음 편하게 손 부채질을 하면서 더위를 가라앉혔다. 15분짜리 영상작업을 봤다. 그 좁은 방은 햇볕이 너무 잘 들었고, 너무 더웠다. 작업을 재미있게 보면서도 등 뒤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신경 쓰였다.
돌이켜 그 전시를 생각하면 시청각까지 가던 길에 내리쬐던 햇볕과 강한 햇살 때문에 영상이 잘 보이지 않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때의 기분이 먼저 떠오른다. 나에게 미술 전시를 보는 일은 언제나 그렇게 각각의 작품을 들여다보는 것을 넘어서 전시장까지 가고,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의 총체이다. 가는 길이 험했던 전시는 작업보다 그 길이 먼저 떠오르기도 하고, 여러 구경거리를 거쳐 당도한 전시에서는 앞서 본 것과 전시장에서 본 것이 뒤섞여버리기도 한다. 하루에 전시 하나를 관람한 날과 동선을 짜고 시간을 쪼개 여러 전시를 본 날의 기분도 다르다. 봄, 가을에 날씨가 좋아서 마치 나들이를 하는 기분으로 가서 본 전시와 무더위 혹은 맹추위를 뚫고 바야흐로 전시장에 도착하여 본 전시에 대한 기억은 그 질감이 서로 다르다. 작품의 형태나 형식, 디스플레이 방식 같은 내적 조건 외에도 수많은 외적 조건, 예를 들어 전시장의 위치, 가는 방법, 시간과 날씨, 동행의 여부, 전시장의 크기와 모양, 관람객의 수 같은 것이 전시를 보는 상황에 영향을 미친다. 덕분에 그만큼 즐거운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괴로운 일정이 되기도 한다.
미술은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소요하는 장르이기에, 그것을 소비하는 관객도 공간의 이동을 겪고 그에 일정량의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책처럼 아무 때나 내가 원할 때, 원하는 장소에서 펼쳐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처럼 개봉관에서 내려도 다시 볼 기회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전시를 보는 일은 때때로 고단하고 번거로운,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러니 가까운 전시장을 잠깐 들러서 전시를 보는 일과 시간과 수고를 들여 먼 길을 찾아가서 전시를 보는 경험은 다를 수밖에 없다. 전시를 보기 위해 먼 길을 찾아가다가 지친 날에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고생을 하며 전시를 보러 다니나’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떤 전시장은 웬만하면 가고 싶지 않고, 흥미로운 전시가 보여도, ‘아니야 아마 별로일 거야’라고 관심을 끊어보려고도 한다. ‘아 그냥 사진으로 볼까’ 같은 나약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전시를 보는 일이 그렇다. 그곳은 항상 약간의 결심을 필요로 한다. 날을 잡아 하루에 볼 수 있는 모든 전시를 보고 돌아온다. 반면 시내 한가운데 있는 일민미술관은 교통이 편리하여, 근처에 일정이 있을 때 들른다. 전시가 마음에 들거나 미처 다 못 본 경우에는 여러 번 더 들르기도 한다. 가끔은 태어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동네를 힘겹게 찾아가야 할 때도 있다. 창신동 언덕 위에 있는 지금여기를 찾아갈 때는 힘들고 힘들었지만, 낯선 동네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조용하고 평범한 서울의 오래된 동네를 염탐하는 침입자가 된 기분이었다. 명품숍이 즐비한 도산공원 부근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찾아갈 때는 비슷하지만 다른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도 나는 낯선 침입자였지만, 이곳이 내게 낯설지 않고 아주 친숙하다는 태도를 취하려 애쓰고 있었다.
전시 공간의 모양이나 분위기도 작품 감상에 영향을 미친다. 크고 매끈한 미술관 안에 놓인 작품과 전시장으로서 완벽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작은 공간에서 작품을 보는 것은 다른 경험일 수밖에 없다. 교역소에서 봤던 작품을 국제갤러리에서 다시 봤을 때, 순간적으로 같은 작품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다. 처음 막 미술에 관심이 생겨서 전시를 보기 시작하던 때는 현대적 건축물로 지어진 미술관에서 전시를 볼 때면 그 건축물도 같이 향유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 꽤나 좋았다. 플라토에 처음 갔을 때, 온통 하얗고 천장이 높은 전시장을 거니는 것은 일상에서 쉽게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기분이었다. 이십대 초반에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때는 머무는 도시마다 현대미술관에는 꼭 들렀는데, 가능하면 미술관에 딸린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 잔 마셨다. 그 건축물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아서였다. 같은 전시장이라도 때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르다. 관객이 북적이는 전시장에서는 약간 들뜨는 기분이어서 좋고, 아무도 없는 전시장에서는 고요한 상태에서 작품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미술 전시를 감상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경험’으로 남는다. 장소 특정성 같은 개념을 경유하여 현상학적 의미를 내세우는 작업들만이 아니라, 미술 작품 일반은 모두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관객에게 경험을 유발한다. 미술은 내가 나의 신체를 이동하여 물리적 공간을 겪어야만 경험이 가능하다. 작품 자신은 일상적 시공간과 분리된 초월적 작품 세계 안에 존재하기를 요구할지라도, 관객은 분리된 시공간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조차 ‘경험’한다. 그러므로 미술은 언제나 얼마만큼은 경험적이다. 이는 문학의 경험이 대부분 오직 텍스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한정되는 것과 차이가 있다. 독서는 시간과 장소와 관계없이 책을 펼치는 그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책을 읽은 장소와 시간, 날씨 같은 외적 조건은 (휴양지의 바닷가에서 책을 읽는 것처럼 가끔은 결정적일 수 있지만) 대부분 문학 텍스트와 상접하지 않는다. 또 책은 언제나 혼자 읽는 것이지만 전시는 혼자 보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혼자서 전시장에 찾아가더라도, 전시장에 관객이 북적북적 많은지, 아무도 없는지, 적당히 몇 사람이 있는지에 따라서 전시장의 분위기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 공간을 지배하는 분위기에 따라서 전시에 대한 경험도 달라진다.
그것이 미술 감상의 즐거움이자 괴로움이다. 한여름의 무더위를 뚫고 몸을 옮겨야만 하는 괴로운 일이지만, 그 더위마저도 전시장의 풍경과 어우러져 감상적으로 회상하게 되는 것이 전시의 즐거움이다. 혹은 바쁜 시간을 쪼개어, 먼 길을 찾아서 겨우 전시장에 당도했을 때, ‘아 직접 와서 보길 잘했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하는 것이 전시의 즐거움이다. 이번 가을에는 더 넉넉하게 시간을 내고 비용을 마련해서 광주에도, 부산에도 가야 한다. 벌써부터 괴롭고, 또 즐겁다.
멀리서 찾아오는 관객을 늘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글이었습니다.
어떤 배려가 필요할까 고민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