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결산 잡담

다사다난했던 2016년을 마무리하며 옐로우 펜 클럽은 1년간의 경험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미술 전시, 독서, 대중문화 등의 분야에서 있었던 각자의 경험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한 해를 되돌아보고, 다가오는 2017년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해보았다. 대화는 2016년 12월 16일에 진행되었으며, 이후 편집과정을 거쳤다.

 

신생공간의 정점과 내리막길, 그리고 국공립 기관의 침체

루크 2016년 초부터 생각하면 <평면탐구>가 처음이었던 거 같다. 그게 올해 처음 본 전시였다.

총총 그 전시는 나도 올해 초에 보긴 했는데, 2015년 말에 시작한 전시여서 그런지 오히려 2015년의 마무리 느낌이었던 것 같다. 2015년의 마무리이자 2016년의 시작 같은 느낌이었다.

루크 돌이켜보면 2015년은 화려했던 것 같다. <굿-즈>도 있었고 언리미티드 에디션도 성대했고. 마무리도 <평면탐구>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큰 전시들이 많았던 느낌이다.

총총 우리가 2016년에 첫 번째로 본 전시가 커먼센터 <바벨>이었다. 그게 커먼센터 마지막 전시였다.

김뺘뺘 그때 엄청 추웠던 거로 기억한다. 그 비슷한 시기에 교역소에서 <헤드론 저장소>가 있었던 것 같다.

총총 그건 2015년 연말이었던 것 같다. 그때 교역소 문 닫고, 2015년 끝나고, 그 다음 2016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서울바벨>이 있었다. 마치 신생공간 총정리 같은 느낌의 전시였다. 신생공간을 미술계 구성원으로 인정해주느냐 마느냐에 관한 갑론을박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시립에서 멋지게 데뷔전(?) 느낌의 전시를 치르면서 그들이 완전히 기성 미술 공간에 입성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신생공간과 그에 연관된 작가들의 미래가 아주 밝아 보였는데, 지금 시간이 흘러서 생각해보면 오히려 마지막 고별무대 같은 느낌에 가깝다. 그 이후로 이렇게 신생공간이라는 장이 끝나는 느낌에 이르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루크 나는 <서울바벨> 전시가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다.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점이 없는 것 같다.

김뺘뺘 전시 자체가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한 곳에 다 모였을 때 작업이나 공간의 특성이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이를 대하는 개별 공간들의 태도가 인상적이긴 했다. 아카이브 봄이 이사를 준비하고 있어서 전시 공간을 사무실처럼 쓴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재미있었다. 여러 공간들이 미술관의 전시공간 안에서 평소라면 각자의 공간에서 펼쳐졌을 퍼포먼스나 이벤트를 진행했다. 신생공간이 대안적인 테제를 걸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지만 주목을 받고 하나의 흐름으로 묶이다 보니 마치 신생공간 아래 이 모든 공간들이 동류의 것으로 평가되었고, <서울바벨>이 그런 접근 방식의 정점에 해당하는 것 같다. 그런데 막상 각자는 이러한 흐름에 대해서 무심하기도 하고, 때로는 각자의 맥락 속에서 이용하기도 하는 태도가 재미있었다.

총총 나도 전시의 작품 하나하나가 기억에 남는다기보다 전시장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미술관에서 전시할 수가 없어서 신생공간이라는 작고 열악한 공간을 마련해서 전시를 이어가던 작가들에게 시립 1층이라는 넓은 공간이 주어진 상황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그 안에서 정말 각자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펼쳐놓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어수선하고 이상하기도 했는데, 그 풍경이 나름대로 재미있었던 것 같다.

김뺘뺘 다만 <서울바벨>이 신생공간을 테마로 삼은 것 이상으로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했던 점이 아쉽다. 국공립 기관의 전시들이 재미없다고 말할 때, 더 새로운 것이나 우리가 재미있어할 만한 주제를 잡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운용할 수 있는 예산도 있고 국공립 기관으로서 책임져야 할 영역이 있는데, <서울바벨>은 신생공간들을 모아놓고 어떤 담론적인 층위로 끌어올리는 노력은 없었던 것 같다. 미술을 매개하는 방식이나 이를 대하는 관객층을 재조직할 수 있었던 신생공간의 특성들이 오히려 막연하게 뭉개져 버린 느낌이었다.

총총 어쨌든 <서울바벨>은 미술계에게 중요했던 전시였던 것 같다. 디자인계 경우에는 일민미술관에서 했던  <그래픽디자인, 2005-2015, 서울>이 그랬을 것이다. 물론 문제도 말도 많았지만.

루크 중요했던 것 치고 별로였던 건 <2016 미디어시티 서울>이었다. 그리고 <올해의 작가상>을 포함해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했던 전시들도 별로였다.

총총 <올해의 작가상>은 일단 재미가 없었고 잘 기억도 나질 않는다…. 어떤 점이 싫었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게 약간 아예 기억에서 무플 같은 느낌이다.

루크 <올해의 작가상>이 나름 큰 전시이고, 마이너한 작가들도 어느 정도 들어갔다. 그런데도 평이 안 좋았다.

김뺘뺘 “마이너”한 작가들이 들어간 국현 전시가 있었나?

루크 국현에 전시할 만한 작가들이 아닌 경우에 들어가긴 했던 것 같은데?

김뺘뺘 그랬었나? “국현에 전시할 만한 작가”가 어떤 층위인지 잘 모르겠다. 국현 갈 때마다 느끼는 건 내가 체감하는 미술계의 모습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건데, 작가의 선정이나 전시 기획, 그리고 공간 구성 모든 면에서 나에게는 매력이 없다. 꼭 보고 싶은 작가의 작업이 들어가 있을 때만 찾아간다.

총총 도대체 왜 그렇게 됐을까? 작년이나 재작년은 괜찮았나?

김뺘뺘 생각해보면 서울관은 괜찮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엉망인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행정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많은 것 같다.

총총 원래 문제였는데 용납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건가?

루크 엄마는 <올해의 작가상> 전시 보고 좋아하셨다. 그 세대의 감수성인가 싶었다.

총총 작년 거는 보셨는지? 처음이면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김뺘뺘 믹스라이스 작업은 좋았다. 예상과는 달리 작업 내적으로 리듬감의 밀도가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나머지 작가는 모르겠다. 특정 정체성을 너무 쉽게 끌어와서 이용하는 듯해서 불편했던 작업도 있었다.

루크 그 세대는 이미 그런 것이 센세이셔널 한 것 같다.

김뺘뺘 완전히 다른 타임라인의 이야기인 것 같다.

총총 미술관에 대해서 캐쥬얼하게 기대한다고 하면 문제 될 것이 없는 전시일 수도 있다. 일단 국현 서울관이 워낙 규모도 크고, 시설도 최신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좋아 보일’ 수 있다. 실제 전시가 좋은지 여부와 무관하게 분위기가 받쳐주어서 좋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올해의 작가상>은 이전에 비해서 너무 재미가 없었다. 우선 참여 작가들의 작업 자체가 그다지 매력적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그들 네 명의 작가들 간의 어떤 부조화랄까, 서로 차별화하여 경쟁하면서도 같이 어울려서 전체를 구성하는 무언가가 없었던 거 같다.

김뺘뺘 아르코미술관도 마찬가지 아니었는지? 딱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총총 그나마 서용선 개인전 <확장하는 선, 서용선 드로잉>이 작품이 좋아서 괜찮았다. 국공립 기관 중에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전시가 없다. 시립 전시도 예전에 비해 재미가 없었다.

루크 <미디어시티>도 별로였다.

총총 <미디어시티>는 왜 이렇게 재미가 없었을까?

김뺘뺘 안전하고 깔끔해서 그렇지 않았을까? 광주비엔날레와는 달리 설치의 완성도가 높아서 매끄럽게 봤다. 미래, 타자, 교육 등의 테마들을 전부 건드렸지만, 논쟁적일 만한 부분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루크 어느 정도 흐릿한 테마는 있었지만…

김뺘뺘 물론 워크샵 등 전시 이외에도 이벤트가 많았는데 참석하지 못해서 확실하게 판단하기는 힘들 것 같다. 다만 광주비엔날레와 주요 작가와 테마가 겹쳤던 것, 그리고 워크샵/연계 프로그램 등 전시의 위성들이 유난히 많았던 것, 출판물에 강조점을 두었지만 내용상 밀도가 떨어졌던 것 등을 생각해보면 그럴듯한 형식은 다 갖추었는데 뭔가 빠진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루크 대놓고 말해서 식상했다. 국공립 기관의 한계가 있는 것 같긴 하다. 작년에 시립에서 했던 <동아시아 페미니즘: 판타시아> 전시 때도 식상하고 맘에 안 들었었다. 그런데 남자친구는 컬쳐쇼크를 받을 정도로 그 전시도 신기해했다. 분명히 간극이 있는 것 같다.

총총 국공립 미술관이 개선, 발전되지 못하고 고립되어서 기존의 것들을 답습하면서 점점 좋은 전시를 내보이지 못한 것도 있고, 또 최근에 신생공간을 위시한 다른 공간들에서 열렸던 전시들이 너무 좋았어서 국공립 기관의 전시를 더 이상 좋게 보기 어려운 지점에 온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예전과는 다르게, 고립되고 기존의 것들을 답습하는 국공립 기관의 폐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 같다.

루크 폐해라기 보다는 대중에게 적합한 방식을 찾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는 첨단에서 많은 걸 보지만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을 위한 장소는 있어야 하지 않나?

김뺘뺘 내 생각은 다르다. ‘대중’의 개념을 모호하게 설정하고 즉각적으로 쉬운 걸 제공하는 것이 필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퀄리티를 높여놓으면 누가 봐도 알아본다고, 혹은 당장은 오락적인 의미에서 재미있다고 느끼지 못해도 중요한 전시가 있다고 믿는다. 국공립 기관들이 어쩌면 하나같이 대중 친화적인 미술관의 함정에 빠져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하나도 돌파구를 제시한 기관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나마 서울시립미술관이 명화 전이 아닌 대중전을 통해 나름의 시도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르누아르 전을 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루크 작품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안 좋은 건 아니었는데… 작품을 모아놓으니까 별로였다.

김뺘뺘 그래서 차라리 개인전, 2인전 중에서 작가가 괜찮고 작업 자체를 잘 보여주려고 했던 전시들은 기관에서 한 것들도 좋았던 것 같다.

총총 그런 게 오히려 재밌다. 아르코미술관에서도 서용선 개인전이 괜찮았다. 작업 자체가 좋아서 그랬던 것 같다.

김뺘뺘 그런 점에서 서울시립미술관 한 <타이틀매치>, <백남준-플럭서스>도 재미있게 봤다.

루크 나는 <평면탐구>가 재미있었다.

총총 <평면탐구>도 정말 좋았다. 일민미술관에서 했던 것이 대부분 괜찮았다. 김용익 개인전 <가까이… 더 가까이…>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시립이나 국현은 인상적인 전시가 없다. 차라리 국현 과천관에서 한 30주년 기념전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가 재미있었다. 일종의 과천관 회고전이자 한국미술 회고전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렇게 한 번에 총망라해서 보는 점이 재미있었다. 한국미술 교과서를 쭉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김뺘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한 <사회 속 미술-행복의 나라>도 약간 교과서 보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전시보다는 아트선재에서 한 <커넥트 1: 스틸 액츠>가 재미있었다. 특히 2층에 정서영 작업 세 점이 있었는데, 내가 못 봤던 구작들이라 좋았다. 시기도 시청각 개인전과 비슷해서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두 공간의 성격이 너무 달랐다.

 

젊은 작가-중진 작가의 단계들

총총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전시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것은, 디자인계에서 10년 동안 성장한 디자이너들이 전시를 한 건데. 10년 전에는 신진디자이너였는데 이후에는 좋은 결과물을 내고 입지를 갖게 되었다. 미술계로 치면? 다음 세대는 누구이고?

루크 미술계에서는 그것이 잘 안 보인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보면 굉장히 비슷한 책들이 많이 보이는데, 10년동안 어느 정도 정형화된, 통용된 디자인이 만들어진 것 같다. 하지만 미술계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는 않는 것 같다.

김뺘뺘 장르의 차이도 있겠지만, 미술계의 고질적인 구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미술계는 20대부터 40대까지 퉁쳐서 신진작가라고 한다. 40-50대 넘어가야 중진작가가 되고, 나이가 훌쩍 더 많아야 회고전을 한다.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 작가들은 신진작가로 취급을 받고 중간 단계에서의 도약을 도와줄 수 있는 제도가 많지 않다. 대규모의 기획전이나 해외에서의 활동도 했었던, 이름 대면 다 알만한 작가들조차 ‘도약’을 고민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다른 맥락의 이야기이지만, 이런 점에서 광주비엔날레가 이번에 국내 작가에게 커미션을 주지 않았던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큰 예산을 만지는 만큼 작가들이 규모 있는 작업을 하고 새로이 맥락화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는데 전부 대표작에 준하는 구작들만 들어와 있었다. 또 신생공간과 젊은 세대의 작가에 대한 논의가 촘촘하게 이뤄지지 않고 뭉뚱그려진 경향, 그리고 “젊음”이 소비되고 소환되는 방식에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 신생공간의 활동 자체를 평가하는 것만큼이나 그것이 다뤄지고 맥락화된 흐름들을 더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총총 SeMA에서 Blue, Gold 이런 식으로 세대 별로 다루지 않나? 중간이 있을텐데.

김뺘뺘 SeMA Blue, Gold, Green이 있는데, 이 중에 골드가 중진 작가를 다룬다. 지금 하고 있는 X세대 전시가 골드이다. 블루는 아예 신진보다는 어느 정도 활동 경력이 있는 작가들이 보통 다뤄지고 신진작가는 지원 사업으로 다룬다. 이번에 <서울바벨>의 신진 작가들이 아주 젊은 편이었을 뿐 원래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아르코미술관에서 했던 서용선 개인전이 사실 중진작가 타이틀로 한 거다. 어느 ‘급’ 이상으로 올라가기 이전의 생존경쟁 혹은 스펙 쌓기가 끝나지를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이걸 견뎌내기란 쉽지가 않다. 통계 살펴보면 신진작가로 선정되었는데 나이를 보면 40대인 경우도 있다. 아직 ‘emerging’ 못했으니까 계속 -ing하는 것이다.

 

2016년의 전시들

김뺘뺘 이런 맥락에서 나는 각 작가가 어떤 작업을 했고, 어떻게 이어지고 지속하고 있는지를 꾸준히 봐주는 비평적인 관객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올해는 개인전을 많이 봤다. 그냥 느낌일지 모르겠는데 전시나 프로그램들도 각 작가의 작업을 찬찬히 살펴보는 종류들이 많았던 것 같다. 각 작가의 맥락을 보면서 각 전시가 어떤 시도인지를 읽어내고 피드백하려고 나름의 노력을 했다.. 2016년은 나 스스로를 비평적 관객이라고 인식하게 된 해인데, 글을 쓰고 피드백을 하게 되면서 이러한 활동의 중요성을 스스로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올해 좋은 개인전들이나 개인의 작업들이 많았다. 당장 생각나는 대로 짚어보자면 김희천 개인전이나 조익정 퍼포먼스들, 이수경, 김웅현, 돈선필, 이의록 개인전이 기억에 남는다.

총총 그중에서는 뭐가 제일 좋았나?

김뺘뺘 이수경 개인전 <F/W 16>이 제일 좋았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된 전시였다. 처음에는 이수경 작업 특유의 미감이 참 좋았다. 작가가 어떤 특정 집단(남성-노인)이 만들어낸 풍경을 다루되 이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형태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특정 계급에 대한 ‘대상화’라는 혐의에 휘말리기도 했다. 직감적으로는 이수경의 태도가 매우 좋았으나, 전혀 다른 의견이었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어서 작업을 나름 옹호하려 하다 보니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면서 결국 모든 작업이 어떤 면에서는 대상화이자 폭력일 텐데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도 고민이다. 그리고 젠더적, 계급적, 정치적으로 무겁게 충전된 ‘혐오’라는 워딩이 전면에 붙었기 때문에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여러 맥락들이 달라붙은 모습도 흥미로웠다. 작업이 어떤 단어, 즉 의미망과 연결되어 던져지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독해 되고 증식되는지를 볼 수 있는 전시였다.
또 이수경 외에는 사회의 어떤 현상이나 장면을 마주했을 때 파고들거나 직접 돌파하기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전유하는 작업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실키 네이비 스킨>이 중요한 전시였다. 그 전시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는다.

총총 <실키 네이비 스킨>은 호불호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기대치를 전시가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발이 심했던 것 같다.

김뺘뺘 정확히 그거다. ‘전시가 이래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줬다.

총총 그 태도의 차이가 중요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어떻게 전시를 보느냐를 가르는 기준점이 되었던 것 같다.

김뺘뺘 내 주변의 몇몇 기획자는 그 전시를 보고 너무 심하게 싫어했다. 그런 정도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전시였다는 점도 주목해볼 만 하다. 전시는 어떠해야하고, 기획자는 어떤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전제들을 비춰주는 것 같았다. 정확한 단어로 소통되지는 않지만 어떤 취향이나 감각 같은 것을 공유하면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리듬이 느껴졌다. 그 리듬감 혹은 안무적이 장면을 바라보는 것이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루크 그런 의미에서 너희들이 <유명한 무명>을 싫어했던 게 생각난다.

김뺘뺘 이상한 전시였다. <유명한 무명>도 특정한 주제가 있었다고 보기는 힘든데, <실키 네이비 스킨>과는 정반대의 감정을 느꼈다.

총총 <유명한 무명>은 나름의 주제가 있었던 거 아닌가? 유명하지만 무명인 사람들을 모았다고 하는 거로 생각했다. 작품의 테마가 아니라 아티스트의 테마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작가들을 엮는 방식과 그들이 전시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었는지 생각해보면, 모아두는 것 말고는 특별한 점이 없었던 거 같다. 작품들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던 게, 작품 중에 다른 전시장에서 이미 봤던 것들이 더러 있었는데 다른 전시장에 있었을 때보다 그 매력이 훨씬 반감돼있었다.
<실키 네이비 스킨>은 충실했고 공이 많이 들어간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전시에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나름의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전시를 부정적으로 평가했을 때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전시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폄하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기획 전시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실키 네이비 스킨>이 세 작가의 기획전이라고 했을 때 더 많은 가능성의 지점이 펼쳐지지 못한 부분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세 명의 어떤 리듬감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꼭 그 세 명이어야 했는지도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어떤 작가 세 명을 모았을 때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획이기도 했다. 어떤 방면에서는 의문을 던지는 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김뺘뺘 기획이 반드시 주제가 있고 이에 맞춰서 작업이 놓여 있는 것이 기획의 다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유명한 무명>은 나름대로 감각적으로 작업을 놓으려 했던 것 같다. 그 전시 주제는 주제라기보다는 빈칸에 가까운 것이고, 묶어놓기 위해서 던진 키워드 같다. 시각적인 요소나 장치들을 가지고 공간을 구성하고 작업을 배치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게 너무 인위적이었고, 김희천, 이윤이, 남화연의 작업은 그 공간에서 매력이 반감되었다. 정말 재미있게 보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작업이 숨이 죽어버린 느낌이었다.

총총 국제갤러리에서 ‘이런 사람들하고 전시를 해보고 싶어서 기획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뺘뺘 갤러리처럼 자본이 있는 공간에서 할 때는 그만의 메리트가 있어야 할 텐데 오히려 재미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곧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하는 전시가 궁금하다. 2016년도에서 신생공간들에서 재미있게 봤던 작가들이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고 국공립 기관들에서 전시를 할 텐데 기대가 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에 이야기가 나오듯이 이러한 행보를 쉽게 ‘권력화’라고 말하는 건 망설여진다. 신생공간이 발판이었느냐는 말도 있는데 발판이었으면 또 어떤가 싶기도 하다. 된 사람과 안 된 사람을 구분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웃긴 것 같다. 이 흐름에서 섣불리 ‘배제’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예를 들어 A를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한테 왜 B는 안 했느냐고 해명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루크 나도 권력화라고 보기는 힘든 것 같다. 일군의 작가들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신생공간의 힘이 맞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만든 공간인 것 같기도 하고.

김뺘뺘 일반화해서 특정 공간이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는 틀로 분석하기보다는 그 움직임들을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16년도에 있었던 개별 전시들과 개인전들이 중요했다고 본다.

루크 돈선필 개인전 <민메이 어택:리-리-캐스트>는 보고 싶었는데 못 봐서 아쉬웠다.

김뺘뺘 재미있었다. 최근에 낸 도록도 재미있었다. 아, 올해 <탄산>도 재미있게 봤다. 백수현, 박보마, 김도효의 작업 흥미롭게 봤다.

루크 정금형 개인전 <개인소장품> 재미있었다. 작가가 이제까지 해온 걸 잘 보여줬다. 전문성을 가지게 되기까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총총 정금형이 항상 퍼포먼스를 했는데 그와 다른 방식으로 전시한 게 재미있었다. 퍼포먼스를 어떻게 전시할 것인지 많이 고민하고 전환의 방식을 모색한 것 같다. 정금형 작가의 퍼포먼스 자체가 그렇게 전시하기에 적합한 것 같기도 하다. 정금형이 에르메스에서 전시하기로 했을 때 다들 어떻게 할지 궁금해했는데 기발하게 잘한 것 같다.

루크 퍼포먼스를 어떻게 기록에 남길 것인지는 늘 문제시되는 것이니 그런 방식이 내게는 신선했다. 다양한 물건들이 있는데 퍼포먼스로 이어지는 느낌이 기발했다.

김뺘뺘 정금형 작가 퍼포먼스의 특징 중 재미있게 봤던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애써서 움직이게 하는 보충적이고 억지스러운 움직임들이었다. <재활훈련>에서도 꿈쩍도 안 하는 오브제와 무언가를 하려고 지난하게 움직였다. 온갖 대체물들이 첨가되고 덧붙이는 점이 인상 깊었다. 그런 보충물 혹은  대체물들이 한꺼번에 널려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시청각의 <December>에서 보여준 정금형 작업도 재미있었다. 이제는 정금형의 시그니쳐라 할 것이 확실히 생긴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새로운 것이 있을까? 하는 편견이 있었는데, 에르메스에서 한 번 깨지고 <December>에서 또 깨졌다. 퍼포먼스 기록 영상들 중에서 퍼포먼스를 시작하기 직전까지의 장면만 이어 붙여놓았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안내하는 장면들이 계속된다. 맨 끝에만 퍼포먼스의 절정의 순간이 나온다. 사람들의 기대감, 웅성웅성하는 분위기, 소품이 준비된 모습, 준비 자세를 보여준다. 자신의 시그니쳐도 확실하지만 이를 다른 맥락으로 전유해서 보여주는 방식들도 재미있다. 이건 물론 기획자의 역량일 수도 있겠지만.

총총 나는 기획자가 했다고 생각했다. 시청각에서 정금형이 전시를 한 적이 두 번 있는데, 매번 주변적인 요소들이 전면에 나온다. 퍼포먼스를 직접 보여주기보다 어떻게 만들고 포장하고 이동하는지, 그리고 이번에는 <December>의 기획에 맞게 퍼포먼스의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시청각은 그곳에서 전시하기 어려운 작가를 잘 활용하는 느낌이 있다. 시청각에서 하는 전시들이 그런 경향이 있다. 한 작가의 전형적인 작업을 보여주기보다 기획을 재미있게 만들어서 우회하는 경향이 있다. <정서영전>처럼 어떤 전시들은 아니었지만…

김뺘뺘 정서영 개인전이 그래서 의외였다.

루크 <정서영전>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르겠다.

총총 <정서영전>이 열리던 시기가 올해 제일 재미있는 시기였다. 좋은 전시들이 몰려 있으니까 여기저기 다니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축제 같은 느낌이랄까? 오히려 전시가 드문드문 열리면 미루다가 놓쳐버리는데, 시즌처럼 전시가 몰리면 힘내서 열심히 보러다니는 것 같다.

김뺘뺘 나는 전시가 너무 많아서 힘들었다. 그렇다고 다 보지는 못했는데 압박이 많은 느낌이었다. 비엔날레들도 있고 중요한 전시들이 동시에 너무 많이 열렸다.

루크 나도 그 시기에 본 잭슨홍 개인전 <Autopilot>이 재미있었다. 글이 나올 만큼 인상 깊었다. 생각보다 좋은 공간이었고. 전시를 볼 때 인상이 많은 걸 좌우하는 편인데, 잭슨홍의 개인전은 그런 점에서 좋았다. 기대한 것과는 다른 것을 보여주는 전시였다.

김뺘뺘 그런데 그 전시는 사진으로 보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서 굳이 가서 봤어야 했나 싶었다. 장면들이 너무 이미지적이었다. 사진이 더 예쁜 느낌이랄까? 아니면 사진을 위한 장면 같은? 리듬감은 분명히 있는데 생각을 더 많이 하게 하는 작업은 아니었다.

루크 그 안에서 걸어 다니는 게 재미있었다. 오브제를 고민하면서 유원지를 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총총 그럼 <정서영전>도 좋아했을 것 같은데?

루크 그런데 <정서영전>은 오브제 자체의 수수께끼가 너무 컸다.

총총 하긴 잭슨홍의 오브제는 유추할만한 맥락들이 있는데 정서영은 그런 것이 상대적으로 더 제거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나는 잭슨홍과 정서영이 비슷한 느낌에서 좋았다.

김뺘뺘 정서영 작업은 너무 좋았다. 왜 좋은지 알았으면 말로 썼겠지? 시청각 전시는 크게 기대를 못 했는데 오브제의 크기나 위치 등이 적절해서 단지 그곳에 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있는 힘이 컸다. <파도>는 구작인데도 그 공간을 위해 제작한 것처럼 놓여있었다.

루크 정서영의 오브제들 사이의 통일점을 못 찾겠다. 그래서 힘들었다. 전체적으로 뭔가 하나로 묶어낼 말이 안 잡혀서. 좋기는 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않는다>는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서 좋았다.

김뺘뺘 적절한 거리를 만들고 치밀하게 설정되었는데, 작가의 치밀함이 굳이 의식되지 않아서 좋았다. 어디가 어떻게 치밀한지 모르게 쫀쫀했다.

루크 시점을 제한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간이 좁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볼 수 있는 위치가 한정적이다. 조각적인 오브제는 내가 돌아다니면서 보고 싶은데 방석이 있으니까.

김뺘뺘 그건 시청각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비슷한 시기에서 아트선재에서 볼 수 있는 작업은 다르다. 돌아다니지 않고는 볼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그래서 시청각에서 전시를 한다고 했을 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루크 한정된 각도에서만 볼 수 있는데 어떻게 의미를 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이 됐다.

총총 <정서영전>은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와는 달랐다. 일민미술관에서 했던 전시는 사진으로 봤고 미디어시티에서도 봤는데, 오브제들이 깨끗한 상태였다. <정서영전>의 작업들은 시청각에 원래 있던 물건들 같았다. 그래서 느낌이 달랐다.

김뺘뺘 다른 한편으로는, 시청각이 아무래도 생긴 지 좀 된 공간이니까 새로운 느낌은 없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그러려니 했는데 정서영의 작업이 들어오니까 공간이 달라보였다. 다들 김웅현 개인전은 어떻게 봤는지?

총총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 신생공간 대결산 종합선물세트. 신생공간들에서 했던 방식들 중에 재미있었던 것들을 다 가져온 것 같다. 오래된 창고에서 퍼포먼스 하고, 문 닫은 병원에서 전시를 하고는 신도시에서 게임을 하는 코스가 ‘신생공간스러운’ 전시의 총결산 같은 느낌이었다.

김뺘뺘 이야기를 계속 지어내는 게 재미있었다. 게임이나 역사 속의 모티프를 가져와서 말도 안 되게 말장난처럼 비약을 해서 엮어버린다. 낭설을 만드는데 너무 열심히 만드니까 믿어주게 되는 구석이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음모론 같은 이야기들이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표출된 욕망들 다루는 나름의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면돌파가 아니라 옆에서 치고 들어와서 균열을 가하거나 오염시키는 방식이었다. 심지어는 전시 직후에 비선실세의 실체가 드러나서 소름 돋았다. 낭설과 정설의 위계가 다 무너지는 순간이랄까. 시의적절한 전시였다. 내가 대전 출신이라서 더 열광한 것일 수도 있다. 대전 사람들한테 심어진 엑스포 정신 같은 것이 분명히 있다. 자랑스러운 과학 도시에서 자란 엑스포 키드고, 전부 과학 공부해서 과학자 될 줄 알았고… 그런데 김웅현이 던져준 영상에서 대전의 학생들이 실험 대상이었다는 둥 얘들이 없어지면 PC가 업그레이드 된다는 둥 하니까 너무 반가웠다. 학회 발표도 재미있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인데 너무 진지해서 가짜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2016년의 미술계 사건들

김뺘뺘 올해 제일 와 닿았던 건 성폭력 이슈와 문체부 검열 사태였다. 너무 한 번에 터져서 아직도 잘 소화가 안 된 것 같다. 검열 이슈는 비선실세의 농간과 문체부의 문제, 관료주의, 그리고 기관 조직의 문제들과 맞물려서 있는 데다가 너무 노골적으로 ‘리스트’까지 있다는 게 밝혀지니까 허탈했고 다소 무기력했다. 예술이 정말 취약한 기반 위에 올라가있는 걸 다시 확인했다. 한편 성폭력 이슈는 익숙한 이름들, 한두 번은 마주친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라 그런지 나에게 실제적으로 위협으로 느껴졌다. 충분히 나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의 나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가해지목자인 유명 모 큐레이터가 사실 그간 있었던 모든 흐름을 주도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마치 주변에 있던 모든 활동들이 그에게 헌납되어 모두 몰락해버리는 느낌이라 절망적이었다.

루크 신생공간은 따지면 그 연쇄로 터져버린 것 같다.

총총 “헌납”이라기는 그렇지만 상관관계는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명백한 인과관계라고 하기는 또 그렇다. 연관이 있다고는 해도 신생공간 전체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의아하다. 그들에게도 동일한 책임을 묻는 것은 과도하다. 그런데 어느 정도 그런 시선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신생공간 자체가 이미 하향길이었는데 이러한 사태와 결부되어 터져서 급격한 내리막길에 이르게 된 거 같다.

김뺘뺘 이와 관련해서 고민한 건 ‘상징권력’이었다. 신생공간의 작가들이 갤러리나 주류 기관에서도 전시를 할 수 있었던 것, 모 큐레이터가 이런 피해를 끼칠 수 있었던 근거 등을 이야기할 때 상징권력이 언급되고 있어서 그것의 실체를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미술한다고 부자 되는 것도 아니고 이걸 정확히 어떤 종류의 권력이라고 딱 말하기도 애매한 어떤 것 같아서 혼란스러웠다.

총총 아주 대단한 권력은 아닐지라도, 분명 어떤 권력관계가 있고 이득이 있었던 것 같다. 특정 인물과 어떤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 더 많은 일이나 전시 기회를 갖게 된다면 일종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뺘뺘 물론 가해지목자 중 권력형 성폭력의 경우에는 용납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모 큐레이터의 경우에는 개인 간의 신뢰관계로 움직이는 구조의 그늘들을 파고들면서 피해자들에게 접근했다는 점이 소름 끼친다. 작업을 매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대화할 수 있는, 개인 간의 암묵적인 신뢰 같은 것이 결국에는 한 사람이 폭력을 휘두르는 데에 사용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바로 그러한 현대적 개인들의 태도가 사건을 더 키웠던 점도 있었다고 본다. 아까 상징권력 이야기를 했던 건 사실 <굿-즈>와도 상관이 있다. 모 큐레이터의 활동이 상징권력의 차원에서 독해되면서 그의 실제적인 기여도와 무관하게 <굿-즈> 자체 혹은 참여 작가들도 마찬가지로 상징권력이 되지 않았냐는 지적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번져가는 것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이렇게 해석하면 마치 모 큐레티어가 <굿-즈> 및 신생공간의 움직임들을 모두 주도한 것처럼 인정해주는 꼴이 되는 것 같은데 가지치기가 필요한 것 같다.

루크 모 큐레이터 개인의 문제로 다 돌리기에는 어떤 권력의 시스템이 작용하고 있던 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계속 엮어서 이야기되는 것 같다. <굿-즈>에 책임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고, 그냥 <굿-즈>라는 행사 자체가 본질적으로 약간은 ‘무해함’을 표방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냥 미술을 덕질하는 사람들이고 그냥 소소하게 하고 싶은 거 하는 사람들이고 대신 제도에 어떤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 이름이 엄청 제도에 박힌 것이 아니라 동인들로서 코믹월드에 부스 내듯이. <굿-즈> 참가가 그렇게 경력이 되었나?

총총 미술계에서는 경력이 되었던 것 같다. <굿-즈>라는 네임이 어떤 권력을 가진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참가 자체가 일종의 포트폴리오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김뺘뺘 나는 사실 그런 태도를 좋아했다. 가진 것은 없지만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서로 희생하면서 가자고 했던 것이 ‘대안’을 기치로 내건 움직임의 태도였다면 거기서 나타나는 폐해도 분명히 있었다. 집단 내에서 비교적 힘이 없는 사람들이 희생을 하게 되고, 나름 이름을 얻는 사람들은 비교적 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애초에 현재 구조에서 어차피 돈을 넉넉히 벌거나 당장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영원히 갈 것도 아니고 접을 때 너무 슬퍼하지 말자, 하며 쿨하게 가는 것이 매우 좋았다. 그런데 그 태도가 문제적일 수 있었던 걸까, 고민하면서 생각이 복잡해진다.
원래는 나 스스로를 딱히 미술계의 일원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일을 겪고 나니 결국 나도 연결되어 있는 문제고 각자의 몫을 고민하고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총총 그렇다고 해서 예전 태도가 낫냐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루크 그냥 내가 <굿-즈>에게 받은 느낌은 그거다. ‘우리는 그냥 작고 소소하고 무해한 집단이에요’라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좋다 나쁘다의 평가를 떠나서 ‘우리는 영향력이 없어요’ ‘우리는 그냥 우리 하고 싶은 거 해요’ 라는 것이 이름부터, 공간 구성까지 다 느껴졌다고 생각하는데. 근데 사실은 그렇게 소소한 영향을 가지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뺘뺘 사후적으로 보니까 커진 거지 당사자들은 소소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루크 2015년에 굉장히 어울리는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 안에서도 어떤 권력이 파생되었냐고 하면 그런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모 큐레이터와는 관련 없더라도. 물론 권력이라기에는 미약하지만 최소한 아까 총총이 말한 포트폴리오와 같은 것이 나왔다.

총총 계속 이야기 한 것처럼 시스템 차원에서도 어떤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고, 또 우리 모두가 사실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각자의 몫을 고민하고 책임져야 하는 거라고 본다. 그렇지만 미술계에서 ‘청년 무언가’로 불리던 모든 움직임들을 그와 결부시키고, 과도한 책임을 묻는 것에는 반대한다. 마치 그 모든 움직임들도 동일하게 ‘나쁜 것’으로, 비도덕적인 것으로 판정하려는 태도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김뺘뺘 모 큐레이터 사태를 지켜보면 이것은 너무도 전형적인 권력형 갑질이었다. 사태가 공론화되자 그의 언행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이런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 왜 그 사람이 계속 활동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고 그게 나에게 굉장히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총총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 사태가 공론화되면서 그가 쫓겨난 것은 매우 고무적이라 생각한다. 사실 그런 집단은 한국사회 어디에나 있는데, 이 사건이 터졌을 때 모두 보이콧하고 욕하고 내쫓은 것은 이 공간의 소비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문제라고 자각할 수 있었던 덕이다. 또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이 집단의 소비자들이 아까 우리가 말했던 낡은 태도를 가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또 그런 사람이 나왔을 때도 이 사람들을 문책하고 매몰차게 내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김뺘뺘 나도 좋은 선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나름대로 책임을 지고 있다.

 

2017년의 미술계를 위하여

총총 그럼 이제 그다음은 뭘까? 올해의 사건들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그리고 이제 신생공간도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젊은 작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김뺘뺘 현재는 역시 페미니즘 이슈가 실제로 작업 및 전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 상반기에 주제로서 많이 대두될 것 같다.
신생공간이 예전 같지는 않다 해도 그 흐름이 새로이 조직한 근육 같은 것이 있다고 본다. 제도적인 여건과 가능성을 살펴보고 치밀하게 계획해서 판을 벌리되, 우리끼리 잘 하고 만족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관객층을 호명할 수 있는 똑똑한 판단들이 더 있을 거라 기대된다. 물론 제도 자체는 신생공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움직이겠지만. 
문체부 예산 자체가 많이 깎였다. 국현은 예산이 20억이 늘긴 했는데 순회전시를 빌려오는 데에 더 쓰는 것 같이 보인다. 우리가 국현에서 보고 싶은 게 앤디 워홀 순회전 같은 건 절대 아닐 텐데. 제일 돈을 많이 지원받는 곳이 광주 비엔날레와 국현인데 사실 그 두 기관이 미술계 전반에 대한 기여를 못 하고, 어떤 순환이나 낙수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한국 미술계에도 그 무엇을 돌려주지 못했다. 한국 작가 신작은 하나도 없었고. 아까 얘기한 중진작가의 도약 계기는 비엔날레에서 경우도 있지 않나. 참여했던 작가들은 그런 기회를 못 얻었다. 예전에는 신생공간에서 하는 활동들에서 약간의 허술함과 어설픔이 느껴지고 그것도 하나의 재미인 반면에 제도권에서 하는 건 깔끔하고 완성도 있지만 재미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오히려 포스트-신생공간의 움직임들이 완성도까지 획득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총총 국현이 제대로 하는 것이 2017년에 거는 하나의 해결책일 것이다. 정권이 바뀌고, 문화 관련 행정도 변화한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국현에는 돈이 있으니 유의미한 기획들을 만들고 유의미한 지원들을 하고 그 안에서 좋은 전시가 일어나는 것이 하나의 솔루션일 것이다.

김뺘뺘 민원이라도 넣어야 하나. 17년에 내가, 혹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얘기할 때 내 살 깎아먹는 것 외에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당장 기관 취직을 시도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어떤 새로운 것을 한다고 할 때 어디에도 나를 위한 기금이 없다. 그러니까.. 모르겠다 하하

총총 예술은 기금 없이는 할 수가 없을까?

김뺘뺘 그래서 <굿-즈> 같은 것이 나온 것이 아닐까? 15, 16년의 큰 흐름에서 나는 주역이 아니라 목격자였다. 그래서 그 시스템에 피부로 맞닿아서 대안을 내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그저 소비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내가 앞으로 뭘 한다고 생각했을 땐 굿즈나 신생공간이 모델일 수밖에 없는데 그게 지속 가능한 모델은 아니었으니까 고민이 된다. 신생공간이 없어진다고 해도 그런 종류의 공간들이 산발적으로 생길 것은 같은데. 돈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굿즈 만들어서 텀블벅 할거고..

총총 너무 슬프다. 텀블벅 사는 사람도 결국 돈이 없어가지고 얼마 팔리지도 않는다.. 그 안에서 다 돌고 도는 것 아닌가?

김뺘뺘 돈이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 있는 거야…

루크 플라토도 닫는 시점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냐

총총 망했다.. 나는 플라토가 닫는다는 거 듣고 크게 걱정이 됐다. 삼성이 발을 뺀다는 미술에 돈을 쓸 때가 아니라는 것을 감지한 것 아닐까? 이제 삼성이 나가면 하나둘씩 다들 빠져나갈 것 같다. 그래서 직감적으로 너무 걱정됐다.

김뺘뺘 정권이 바뀌면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을까?

총총 그럴 순 있을 것 같다. 지금으로써는 그게 하나의 희망이긴 한데, 낙관하기는 어렵다.

루크 심지어 미술계에도 차은택이 연관이 되어있었다. 비리가 정리되면 조금 트이긴 할 것 같다.

김뺘뺘 그리고 박원순 시장이 보여주기식이든 본인 관심사이든 뭐든 여러 시도를 하고 예산을 풀었던 건 사실이다.

총총 맞다. 시장이건 대통령이건 누가 그 자리에 있고, 어떤 정책을 펴고, 그에 따라 예산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는 정말 너무 중요한 것 같다.

루크 이 부분은 큰 돈이 오가는 문제라서 우리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현재 우리의 시점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할 것 같다.

총총 그럼 우리는 얼마 없는 우리 돈을 쓰는 수밖에 없는 걸까? 조금이라도 열심히 써야 하나!

루크 글도 좀 쓰고 텀블벅도 해주고

김뺘뺘 그런데 텀블벅이 후원 개념이라기보다 금액 만큼의 리워드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정착된 것 같다. 즉 선구매지 후원은 아니다. 나도 뭘 하고 싶어서 돈을 어떻게 구할지 고민을 하다가 그나마 손에 잡히는 것이 텀블벅인데 생각을 해보니 전시라는 매체에 활용을 하려고 텀블벅을 한다면 작가들은 작업하는 것도 바쁜데 무언가 또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열화된 버전의 파생물을 만들어내게 하는 것이 작가의 입장에서 좋은 것일지 의문이다.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의 순수익이 남아서 돌려줄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총총 텀블벅은 선구매가 맞지만 선구매 자체가 후원이 될 것 같다. 지금 당장 돈을 땡겨와야하는데 내가 선구매를 해줌으로써 뭐라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돈이 없으면 아예 시작도 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것을 해서 리워드로 돌려주는 것이 텀블벅 후원의 의미 같다.

김뺘뺘 출판 같은 경우 텀블벅은 적절한 것 같다. 그리고 <퍼폼 2016>처럼 입장료를 미리 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전시를 좋아하고, 전시를 통해서 뭔가를 하고 싶은데… 전시를 매체로 생각한다면 텀블벅이 어딘가 안 맞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서 고민이 된다. “전시 보러오세요”를 하면서 무엇을 리워드로 내걸 것이며, 얼마를 달라고 할 것인지..

총총 그럴 바엔 전시 입장료를 받는 것이 낫겠다.

루크 난 입장료는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동인 온리전도 후원을 도입하는 추세인데 기본이 입장권, 플러스 누구 작가의 엽서, 누구 작가의 족자봉 이런 것들 리워드 선택해서 후원 하게 한다.

김뺘뺘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면 좋겠다.

총총 작은 공간들에서 하는 전시에서 입장료를 낸 기억이 거의 없는데, 아카이브 봄에서 했던 김허앵 개인전 때 입장료를 냈었다. 천원이었는데 엄청 좋은 스티커를 줘서 돈을 내는 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시청각도 소책자를 싼값에 파는데 그게 일종의 입장료일 것이다. 근데 사실 그 정도 돈을 받아서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김뺘뺘 맞다. 돈이 되려면 적어도 오천 원씩은 받아야.

루크 이런 곳에 가는 사람들은 어차피 매니아라는 전제가 대부분 깔려있지 않나. 그래서 그런 걸 사게 하면 괜찮을 것 같다. 동인계에는 팜플렛을 산다는 개념이 있다. 이 팜플렛을 사는 것이 입장 조건이고 그 가격 자체가 입장료다.

김뺘뺘 맞아, 돈을 내야하는 것 같다. 사실 우리가 그런 개념이 별로 없고 국공립도 돈 내는 것에 대해 반발이 좀 많은 편이다.

총총 시립이나 국현은 입장료를 안 받거나 적게 받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니까 시민들에게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루크 반면에 신생공간은 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 가는 사람들이 동네 주민이나 지나가다가 들어가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전시를 목적으로 가는 사람들이지 않나. 전시비를 뭐 이만 원씩 받고 이래서 공연보다 비싸게 할 것도 아니고 나는 오천 원까진 괜찮다고 생각한다. 미술계에서 좀 돈 내고, 돈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전에 트위터에서 어떤 분이 우리를 소개해주었다. 그분은 글을 만들어내는 작업 자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을 해주는 것 같았고, 그래서 우리를 좋게 봐준 것 같았다. 글 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의 하나라고 생각을 한다. 검색했을 때 리뷰라도 하나 나오고 그러면 힘이 좀 더 생기고 그러니까. 정말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입장료 내고, 텀블벅 하고 글 쓰고 하는 것 아닐까.

김뺘뺘 두 가지 실천이 동시에 가야 하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제도에 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국현을 이렇게 싫어하면 그런 의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제도를 계속 비판하고 검열에 대해서도 과민반응을 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은 우리가 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고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해내는 힘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가야되는 것 같다.

 

미술 글쓰기의 현재, 그리고 우리는?

총총 비평과 비평매체, 출판물에 대한 지적과 고민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미술 잡지가 비평 매체로서 충분한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비평과 현장, 관객과 작가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갈증이 새로운 매체에 대한 바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문학계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겹치면서 올해 대대적인 매체 혁신을 단행했다. 나는 그 혁신들이 모두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분명 배울 점과 희망적인 지점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계에서도 좋은 매체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문예지 혁신의 결과물을 두고 보면, <릿터>가 그중에 가장 좋았다. 문학이 자기고립에서 벗어나고자 고민한 흔적이 보였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만한 시의적절한 주제를 담으면서, 문학에 관심 없는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미술에서도 그런 시도를 해보면 좋을 것 같다. 미술에 대해 충실히 쓰면서 확장해 나가는 글 같은 것을 우리가 시도했으면 좋겠다. ‘미술 글’이라는 것의 풀을 넓히는 시도를 해보고 싶다.

김뺘뺘 미술계에서는 기존 매체들의 역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의적절하고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한계는 분명히 있다. 관습적으로 지속되는 동안에 서서히 독자층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매개의 역할을 원활히 하지 못하고 있다. 잡지마다 편차가 있겠지만 신생공간을 비롯한 여러 전략들을 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글들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먼저 유통되기 시작했다. 지면에 글이 출판되고 인터넷 버전으로 나오는 순서가 뒤집혀서 온라인 플랫폼에 신속한 반응이 올라오고 그것이 지면으로 옮겨지는 모습도 보인다.

최근에 미술계에서는 <계간 시청각> 준비호가 나왔는데, 명확한 선언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윤지원이 쓴 글이 좋았다. <계간 시청각>이 뭘 하려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 와중에 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좋았다.

총총 잘 나왔으면 좋겠다. 촘촘하게 쓰인 글이 있었으면 좋겠다. 대부분 미술 책은 결국 도록인데, 글이 아니라 작품사진이 주인공이다 보니 글은 약하다. 글이 나쁘다는 것보다 책을 읽는다는 느낌을 못 준다. 글다운 글이 있는 매체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시청각에서 나오는 책들은 텍스트가 촘촘해서 내 취향에 잘 맞다.

김뺘뺘 최근에 돈선필의 <민메이 어택: 리-리-캐스트> 책 좋았다. 그 글들을 모아놨을 때 각자의 방향성들이 다 다르다. 몇 번을 뒤적거렸는데도 이 책의 정체를 잘 모르겠다. 시청각에서 했던 전시는 피규어에서 시작해서 시각문화나 생활 전반을 볼 수 있는 필터 같은 것을 제공했었는데 책은 전시에 대한 책이라기보다 전시의 확장판 같기도 했다. 그 책이 엮여 있는 풍경이 또 하나의 전시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루크 이기원의 <이미지 조각모음>은 어땠나?

김뺘뺘 시도는 대단했다. 엮어서 책을 내는 것 자체가 지난한 과정이니까. 하지만 다른 플랫폼에서 볼 수 있는 글을 모은 건데, 그게 굳이 종이 매체로 옮겨와야 했던 건지는 의문이 든다. <이미지 조각모음>은 개별 글보다는 책이 되면서 글에 나름의 구성 체계가 부여되었다는 점이 중요했던 것 같다.

루크 코너 나눈 건 좋았다.

김뺘뺘 임영주의 <돌과 요정>도 책이 하나의 작업인데 밀도 있고 좋았다. 작가가 돌이라는 다소 일반적인 주제를 잡되 자신의 관점에 의거해서 집요하게 연구를 했고, 우리 사회 한 켠에 여전히 존재하는 어떤 믿음이나 욕망 같은 것들을 건드리는 데까지 나아갔다. 책이 흥미로웠던 것은 그 책 자체로도 완결성을 가질 정도의 정보량을 지니면서 동시에 텍스트와 이미지 정보들을 엮은 작가의 주관이 강하게 작동했기 때문에 분명히 작업처럼 읽히기도 했다. 출판물이자 작업인 결과물 중에 주목해볼 만한 것들이 꽤 있었다.

총총 그래도 올해 우리가 함께 글쓰기를 시작한 거는 정말 잘한 일 같다. 그런데 소개 글은 그럴듯하게 써놓고, 그에 비해서 우리가 너무 글을 안 썼다.

김뺘뺘 우리가 미술계 내에서 어떤 매체로 작동할 수 있을까? 우선은 온라인 매체로 시작했지만 이것이 어떻게 확장되어 글 혹은 작업을 매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우리가 비평적 관객이면서 동시에 생산자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뭔가를 더 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은 있다.

총총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라. 일단 우리는 글을 무지하게 써야 한다.

김뺘뺘 그런데 나는 홈페이지에 있는 글을 출판하는 건 하고 싶지 않다.

총총 우리가 글이 이만큼밖에 없는데…

김뺘뺘 우리가 부족한 거 나도 아는데… 우리가 필진으로 쓰는 플랫폼이긴 하지만 우리가 쓴 글을 출판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출판 기획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시의적절하게 나와야 하는 이야기를 틀을 잡고 만드는 인터뷰나 대담집, 번역문, 글 같은 것. 작은 책자의 시리즈물이었으면 재밌겠다.

루크 뭔가를 한다고 해도 처음에는 우리가 쓴 글로 해야하지 않을까.

총총 우리의 글이 충분히 쌓여야 그것도 할 수 있다. 그래야 같이 할 사람도 생기는 거지.

루크 지금 우리 글 가지고 우리가 뭔지 어떻게 알겠니.

김뺘뺘 그러게, 우리 너무 노바디인데 이것저것 못하겠군. 시리즈물 기획하면 연한 노란색, 중간 노란색, 진한 노란색으로 만들자. 이 플랫폼이 실제 결과물로 파생되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총총 중요한 건 우리는 새해에도 열심히 보러 다니고 열심히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뺘뺘가 원하는 대로 책을 만들거나 말거나 할 수 있다. 뺘뺘는 기획 의도, 목차, 구성 전부 준비해서 기획서로 써오면 내가 한 번 고민해보겠다.

 

“2016년 결산 잡담”의 한가지 생각

  1. 입장료 문제에 저도 매우 동의합니다. 그리고 동인계에는 팜플렛을 사는 걸로 어느정도 룰이 잡혀있다니 부럽네요. 옐로우펜클럽 많이 많이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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