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반무마니를 시키는 법’에 다녀와서

우리는 우리를 페미니스트로 만드는 사회에 살고 있다. 2016년의 한국 사회를 지나온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건을 지나온 여자들은 이제 예전처럼은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니 이제 무얼 하지? 여자들은 말로만 페미니즘 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한다. 페미니즘 도서를 사서 읽고, 페미니즘을 주제로 하는 학회에 몰려가고,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활동에 후원을 하고, 성차별적 시각을 표출하는 정치인에게는 단호하게 보이콧을 외친다. 문화예술계에서도 만연한 성폭력과 성차별에 대한 폭로 이후, 기존의 폐단을 해소하고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한 노력이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파일드-파임라인 어드벤처의 <반반무마니를 시키는 법>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개선 방안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여러 필자가 각자 주목한 사건을 기록하는 프로젝트인 파일드-타임라인은 2016년의 활동을 정리하는 행사로 ‘파일드-타임라인 어드벤처’를 개최했다. 행사는 시각예술, 영화, 도시공간, 기본소득 등 다양한 주제로 채워졌는데, 각각의 프로그램은 모두 그 주제의 일부를 페미니즘에 걸치고 있었다. 그중 하나인 <반반무마니를 시키는 법>은 집단 구성원의 성비를 동등하게 맞추는 남녀동수제를 소개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해보는 자리였다. ‘반반무마니’라는 행사명은 디자인 업계에서의 젠더 불평등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남녀 동수의 원칙을 제시한 것을 두고 “5:5로 하면 다 되나요? 무슨 반반 치킨도 아니고…”라고 빈정대던 댓글에서 유래한다. 남녀 성비를 동등하게 맞추는 것이 형식에 불과할 뿐, 실질적으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에 대해 <반반무마니>는 해외 사례를 들어가며 그것이 왜 필요한지 설명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남녀 동수를 구현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할지, 그 방법에 대해 논한다. 그러므로 <반반무마니를 시키는 법>은 반반치킨 운운하던 이에게 ‘반반무마니’의 보편성을 알려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를 ‘시키는 법’을 찾는 데까지 나아간다.

먼저 발표자는 (주로 문화예술 분야의) 해외 사례를 발표했다. 스웨덴, 호주, 미국, 영국의 경우에 남녀 동수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정책을 운용하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남녀평등 지수가 높은 나라에서는 남녀 동수의 원칙이 얼마나 보편적인지 설명했다. 즉 남녀가 평등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비율을 높이는 것이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단계임을 분명하게 한다. 그리고 여러 분야에서 여성의 비율을 높이기 위한, 최대한 ‘반반’을 만들기 위한 정책들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살펴봤다. 문화예술 관련 지원금 사업에서 수혜자 중 여성의 비율을 할당하는 제도나 대학, 공공기관 등의 여성 비율을 높이기 위한 공적 정책, 남성이 연대하여 자신들의 특권을 공고히 하는 것에 반발하여 여성이 조직한 대안적 모임 등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반문할 수 있다. “기계적으로 비율을 맞추는 것이 ‘정말’ 여성 문제를 해결하는가?”라고. 그러나 사실 이 질문은 무의미하다. 동등한 성비를 요구하는 것은 실효성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행사에서는 구분되어 설명되지 않았지만, 여성과 숫자에 관한 문제에는 두 가지 다른 입장이 있다. 하나는 남성과 여성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여성이라는 요인이 차별적으로 작용하는 경우에 여성에게 일정한 비율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차별받는 집단인 여성을 위해 할당제가 마련된다. 예컨대 여성 감독의 영화의 수가 현저하게 적기 때문에 문화예술 기관에서 영화 산업에 대한 지원금의 일정 부분을 여성 감독에게 할당하는 것이다. 마치 스크린쿼터제처럼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약자에 위치한 집단을 지원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 집단의 구성이 자연적 성을 따라 5:5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대의제 체제에서의 의회와 같이 전체를 대표하는 부분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된다. 세상의 절반이 여자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를 대표하는 집단의 절반이 여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남녀의 성비를 5:5로 동등하게 맞출 것을 요구하는 ‘남녀 동수’ 운동은 ‘parité’라는 이름으로 1990년대 초 프랑스에서 시작됐다. 남녀 동수 운동은 보편주의에 반대하여 추상적 개인을 상정함에 있어 천부적으로 주어지는 성별이라는 조건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근대 시민사회가 성립하면서 사회 구성원의 단위가 된 추상적 개인은 출생, 인종, 종교 등의 요소를 제외한 보편적 인간을 상정하는데, 남녀 동수 운동은 성별이라는 요소를 포함하여 추상적 개인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추상적 개인에서 성별이라는 요소가 배제되는 것이 오히려 남성을 보편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하게 했기 때문이다. 즉 (남성) 개인이 사회 구성원의 기본값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녀 동수 운동은 추상적 개인에게 성별을 부여하여 남성 개인/여성 개인을 기본 단위로 상정하고, 그에 따라 선출 공직에서 남녀의 성비를 동등하게 맞출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남녀 동수 운동은 여성이 여성을 대변하기 위해 일정한 비율을 할당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 개인/여성 개인이 각각 절반씩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대표하는 집단에서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 할당제와 남녀 동수 운동은 서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여 성 평등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가는 셈이다. 두 입장은 결과적으로 세상 어디에서든 남녀의 성비가 5:5가 되는 것을 지향한다.  성비가 5:5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부자연스럽고, 불평등한 사회의 산물이다. 여기서 ‘기계적으로 성비를 맞추는 것’의 실효성을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계적으로 성비를 맞추려는 노력이 오히려 가장 자연스러운 결과, 가장 자연 상태에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것은 실효성을 떠나서 당위적으로 실현돼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반반무마니를 시키는 법>의 2부에서는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이정미 의원과 함께 ‘우리의 현실’을 점검하고 남녀 동수 정책을 실현할 방안을 모색해봤다. 앞서 살펴본 아름다운 사례들과 대비되어 한국의 상황은 더욱 처참하고 절망적이었다. 국회의원, 행정부 장관 등 정치인 중 여성의 비율이 현저하게 낮으며, 여성을 위한 법률이 만들어지기 매우 어려운 조건에 놓여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정미 의원이 제시하는 한국에서 반반무마니를 ‘시키는 법’은 아쉬웠다. 시민입법이나 국회에서의 워크숍 등의 방안을 몇 가지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의원의 답변은 ‘투표가 중요해’라는 일반적인 답변으로 환원됐다. 그는 여성주의 정책을 입법할 수 있도록 적절한 정당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으나, 과연 그 적절한 정당이란 존재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답은 없었다. 여성주의적 비전을 제대로 내세우는 정당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투표를 이야기하는 국회의원의 제안은 공허하게 들렸다. 결국 구체적인 방안과 구체적인 단계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적극적,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모인 청중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좋았던 것은 이정미 의원과의 시간은 내가 그동안 본 정치인과 청년의 만남 중 어느 것과도 달랐다는 것이다. 정치인이 청춘에게 한 수 가르쳐주는 토크콘서트도 아니었고, 정치인이 청년들의 절박한 요구를 외면하는 자리도 아니었다. ‘청년 세대가 운영하는’ 을지로의 작은 공간에 정치인은 초대되었고, 우리는 그의 말을 경청하지만, 주저 없이 반박했고 다른 의견을 말했다. 기획자는 본래 국회의원을 “불러 놓고” “이거 해, 저거 해”라고 요구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곳에서 국회의원은 ‘대접’받지 않았다. 페미니즘이라는 공통의 문제를 풀기 위해 만났지만, 그것이 ‘우리 편’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렇게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다 함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해보겠다는 의지로 모였으면서도 각자 다른 지점을 고민하고 다른 방향에 대해 말하고, 조금씩 어긋나면서 함께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에게 페미니즘의 필요성이나 남녀 동수 운동의 당위성 같은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그 정도는 가뿐하게 넘어가고 그다음을 이야기하고, 그다음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피로감을 얼마나 낮춰주는가.

여성해방 문학은 그 성숙의 정도에 따라 대개 고발의 단계, 비판적 재해석의 단계, 참다운 해방의 비전을 제시하는 단계로 구분된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어떤 이들의 적극적인 발화와 행동 덕에 각성과 고발의 단계를 지나왔다. 이제 그다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갈 수 있는지는 누구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불안과 희망, 분노와 의지를 갖고 그 길을 찾아 나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반반무마니를 시키는 법>은 아직은 모호하고 정리되지 않은 공통의 의지가 정치적·정책적 차원의 대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그다음’으로 나갈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 매우 뜻깊은 시간이었다. 고발의 단계를 지나온 우리 사회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 끝내 참다운 해방에 이르기까지 그 길을 찾고, 만들고, 걸어나가는 긴 여정의 첫걸음은 무엇보다도 즐거웠다.

 

덧붙임

– <반반무마니를 시키는 법>을 포함한 ‘파일드-타임라인 어드벤처’ 행사 전체에 관한 기록물이 5월경에 출간된다.

– ‘남녀 동수’ 운동에 관한 내용은 『Parité!: 성적 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조앤 W. 스콧 지음, 오미영 외 옮김, 인간사랑)를 참고했다.

– 글의 말미에 언급한 여성해방 문학의 단계에 관한 내용은 지난 2월 24일에 있었던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읽는 한국현대문학사> 10강에서 접한 내용이다. 더불어 『여성 해방의 문학』(또하나의문화)을 참조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