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작도하기: n개의 키워드들” (1) 권시우가 김뺘뺘에게

2017년 2월 4일, <비평실천>(2017.2.1-2.7 @산수문화)의 일환으로 권시우와 김뺘뺘는 “텍스트 작도하기: n개의 키워드들”이라는 워크샵-토크를 진행했다. 권시우는 사전에 김뺘뺘에게 다음과 같은 룰에 의해 진행될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1. 각자 지금까지 써왔던 텍스트 중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한 편을 정한다.
2. 선택한 텍스트와 관련된 4개의 주요 키워드를 추려낸다.
3. 4개의 키워드는 가상의 지면(빈 문서)을 구성하는 4개의 꼭짓점인 셈이다.
4. 돌아가며 선택한 텍스트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키워드들의 개요를 설명한다.
5. 패널들은 나열된 개별 키워드들에 대한 논의를 진행한다. 반드시 글의 내용에 대한 논의일 필요는 없으며, 키워드 자체로부터 자율 전개되는 논의일 수 있다.
6. 진행되는 논의는 가상의 지면(빈 문서)을 채우는 새로운 텍스트이자, 사전에 선택한 텍스트에 대한 메타 텍스트로 구실한다.
7. 이하 반복.
8. 결과적으로 선별된 n개의 텍스트와 그에 부속된 n개의 메타 텍스트가 생산된다.

이를 위해 권시우와 김뺘뺘는 각각 <비평실천> 프로젝트를 위해 작성한 “강정석 x 김희천 x ?: 유닛으로 질주하기”와 Yellow Pen Club에 2016년 12월에 게시된 “fldjf-서비스에 대한 만족도를 평가하기”를 선정했다. 선택한 글에서 각자 4개의 키워드를 발췌하여 상대방에게 제시했고, 이를 토대로 서로의 글과 비평적 태도에 대한 직간접적인 피드백 혹은 주석과 사변으로 구성된 논의를 진행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그 자체로 메타 텍스트로 기능하는 동시에 향후에 각자의 혹은 공동의 텍스트들을 상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게 해주는 지표가 되었다. 이 대화의 내용을 공유하기 위해 Yellow Pen Club은 2월 4일에 이루어진 대화의 내용과 이후에 시간이 얼마간 지난 후에 두 필자의 반응을 추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업로드하기로 한다.

1. 김뺘뺘가 제시한 네 개의 키워드에 대한 권시우의 피드백 및 주석 & 이에 대한 김뺘뺘의 반응
2. 권시우가 제시한 네 개의 키워드에 대한 김뺘뺘의 피드백 및 주석 & 이에 대한 권시우의 반응

이 텍스트들이 참여한 두 필자들 뿐만 아니라 다른 비평적 관객들에게도 자극이 되어 보다 확장된 논의로 전개되고 증식해 가기를 기대해본다.

 


 

<권시우가 김뺘뺘에게: 샘플, 서비스, 리얼, 대체물에 대하여>

 

1) 샘플

“샘플은 동일한 종의 상품 전체를 대표한다. 누구든 쉽게 만질 수 있지만, 대신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 채로 잘 포장된 상품들을 뒤로 하고 혼자만 봉인이 뜯겨있다. 진짜 상품을 대신하여 끊임없이 소진되는 자리에 놓인 것이다. 물질적으로는 다른 상품들과 다를 것이 없으나 더 이상 본연의 기능대로 쓰일 수 없다.”

샘플의 다른 판본에 대해서. 샘플은 “동일한 종의 상품 전체를 대표”하고 “진짜 상품을 대신하여 끊임없이 소진되는 자리에 놓인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현실의 쇼핑몰에서 진짜 상품이 마모되거나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소비자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대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웹상에서 샘플은 어떤 식으로 활용되는가?
<민메이 어택:리-리-캐스트> 도록에 실린 윤향로의 글 ‘쇼핑몰-레퍼런스-미술작품의 해상도’는 온라인 쇼핑몰에서의 소비 경험을 언급하며, 웹상에 게재된 상품의 이미지와 실제 상품 사이의 해상도 차이에 대해서 재고하고, 온라인 쇼핑몰에서의 소비 경험은 앞선 이미지들을 재료 삼아 그것이 현실상에서 랜더링되는 과정을 시뮬레이션해보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이때의 샘플(로서의 이미지)은 상품과 동일한 물질적 형태를 지니기보다, 애초에 물질로서의 위상과 감각이 부재하며 현실과는 아예 별개의 독자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해상도를 확보한다.

A. 웹상의 샘플과 현실에서의 샘플 사이에 위상학적 차이가 존재한다면, 박보마의 샘플은 둘 중 어느 것과 동기화해볼 수 있을까? 혹은 양자는 어떻게 서로 다르게 박보마의 샘플에 영향을 주고 있을까?
– 현실에서의 샘플은 소비되는 맥락의 차이가 있을 뿐 진짜 상품과 물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웹상의 샘플은 소비되는 맥락에 부합하게끔 자신의 물질성을 무효화하고, 웹의 관성에 따라 스스로를 (래스터 이미지로서, 때로는 360도 전방위 이미지로서, 기타 소비자의 시선을 유도하기 위해 연출된 장면으로서)재구조화한다. 박보마의 샘플은 리얼을 의태하되 원본과 아예 다른 질감을 지닌다는 점에서 후자에 좀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B. 웹상의 샘플은 얄팍한 표피거나 모니터상에 투사된 애매한 2.5d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소비를 위한 시뮬레이션 과정은 결국 표피와 2.5d, 상품의 정보나 후기글 등을 활용해, 실제의 상품과는 차이가 있는 추상적인 상품의 ‘형상’을 조합해낸다. 박보마가 물리적 공간상에 부려놓은 프린트물, 글리터, 리본 등의 자재들(“벽에 기대어 있거나 바닥에 널부러진 얇은 것들”)이 일종의 현상학적인 경험을 유도하고 있다면, 이때 연상되는 ‘형상’은 무엇일까? 그것들을 (샘플 이미지를 토대로 한 시뮬레이션처럼) 조합해낼 수 있는 여지가 있을까?

C. 샘플과 장식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박보마는 <실키 네이비 스킨>에서 fldjf studio의 서비스의 일환으로 공간에 장식을 제공했다. 샘플이 리얼한 것을 대체한다면, 이 과정에서 리얼은 어떻게 (얄팍한) 장식성으로 변화되는가? 반대로 리얼의 속성 중 어떤 것들이 장식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는가?

D. 박보마의 샘플이 상품을 대신해 “끊임없이 소진되는 방식”에 대해서. 일련의 작업들은 통상적인 샘플과 달리 사용자와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없다. 원본을 흉내낸 질감들은 물성을 잃어버린 채 단지 프린트물에 투사되거나,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섬약함을 지니거나, 글리터나 향기, 스프레이처럼 분사될 뿐이다. 이처럼 접촉이 부재한 상태에서 소진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 이를테면 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듯, 관객에게 유도되는 시선을 통해 작동할 수 있다. 샘플은 물리적인 접촉을 대신해 시선만으로 어렴풋이 감지되고 미끄러지고 혼선을 빚길 반복한다. 이는 결국 오작동의 시뮬레이션을 위한 장치가 아닐까? 즉 수행적인 시선만이 작동할 뿐, 그로 인해 포착되는 명확한 ‘형상’은 없다.

 

김뺘뺘:

A. 웹상의 샘플은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만한 재미있는 주제다. 원글에서 “샘플”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코스메틱 로드샵의 아이템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샘플들은 동일한 공정을 통과하여 생산된 상품이지만 묘하게도 판매용 상품과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샘플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갔기 때문에 불규칙한 자국들로 훼손되어 있고, 해당 제품을 사오면 조명이나 분위기 등이 숍과 달라서 그런지 갑자기 다른 제품처럼 느껴져서 당황할 때가 종종 있다. 샘플이 해당 제품에 대한 경험을 완전하게 대리해줄 수 없다면 어째서 샘플일 수 있는가, 혹은 애초에 물리적으로 동일한 공산품의 경우라도 샘플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각보다 견고하지 못한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결코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그럭저럭 대리자의 역할을 하기는 한다. 박보마 작가가 놓아둔 오브제들을 볼 때 “리얼”한 무엇 혹은 전시장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을 완전하게 대리하거나 지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럭저럭, 어떤 원리에서 구성된 최소한의 분모 같은 것은 여전히 갖고 있는 채로 불완전한 대리자 같은 위치를 점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문에 웹상의 샘플과 현실에서의 샘플 사이의 위상학적 차이를 생각하기 이전에 이런 촉각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이미 “리얼을 의태하되 원본과 아예 다른 질감을 지닌다”는 서술이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언급해주신 웹상의 샘플의 경우 실제 상품을 상상해낼 때 더 많은 변환의 장치들이 필요하고 물질적으로도 전혀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박보마의 “샘플”에 더 밀착되어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B. “샘플”의 일상적인 용례로부터 박보마 작가의 “샘플”들이 갈라지는 특징은 대리자의 역할을 하되 대리하고자 하는 원본이 없다는 점이다. 전시장에 구현해 놓은 회로 바깥의 어떤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직접적인 지시의 관계들은 교란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범주들을 가지고는 어떠한 “형상”을 조합해내기가 쉽지 않다. 연상의 관계들이 한 걸음 더 물러나 있기 때문에 매번 볼 때마다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풍경도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그게 중요한 매력이라 생각된다. 조합이야 누구든, 어떤 방식으로든 구성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더 개연성 있는 조합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최근 전시 “화이트의 가짜 노력, 유리 에메랄드 프리 오픈”(2017.1.21-2.11 @아카이브봄)에서는 특히 3층 공간에서 색채와 질감의 리듬감이 돋보였다. 반복되고 변주하는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강조점을 달리하여(예를 들면 흰색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해 본다든지, 서로 다른 질감들이 어떻게 대화하고 있는지를 위주로 본다든지) 각자가 여러 레이어를 만들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경험하게 되는 형상은 작업이 지시하고 있는 바깥보다 공간 안에 놓인 요소들의 놀이 혹은 경제를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떠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C. 그리고 내가 샘플이 리얼한 것을 대체한다고 했을 때는 현전, 혹은 리얼리티에 해당하는 리얼이 가짜 혹은 표피적인 것에 의해서 대체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샘플이라는 것이 개입했을 때 리얼하다는 것을 어떻게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샘플과 실제 제품 모두 동일하게 리얼한데 어떤 것은 샘플이 되고 어떤 것은 포장되어 상품이 된다면, 리얼하다는 것 자체가 본질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서의 지위를 주장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러니까 사실 샘플과 리얼은 대조적인 개념이라기보다 “샘플”이라는 존재양식이 있을 때 비로소 “리얼”하다는 것의 위상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관계항이 설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샘플이 리얼한 것을 대체했다고 리얼이 장식성으로 변화하는가는 좀 더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물론 리얼한 것을 더 이상 본질적인 것으로 고려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아주 얄팍해지는 것이 맞다. 이 때 리얼한 것은 장식이 되기를 거부해봐야 소용이 없다. 아주 빠르게 대체되고 오염되고 만다.

D. 이런 맥락에서 위에서 언급한 오브제들의 질서 혹은 경제 속에서 “끊임없이 소진”되는 그림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오브제든 박보마의 몸이든 그 어떤 것도 물리적인 “터치”를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선을 줄 수는 있다. 물론 그 시선은 한 곳에 계속 머물 수 없고 다른 오브제로, 또 다른 오브제로 튕겨갈 것이다. 따라서 “수행적 시선만이 작동”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이로부터 “포착되는 명확한 ‘형상’”은 없겠지만 발견되는 리듬감 같은 것은 있다고 생각한다.

 

2) 서비스

“fldjf-서비스는 약속은 하되 실체 있는 만족감을 주지 않고, fldjf-초대장들은 명백하게 유혹하려는 수사를 사용하지만 의심스러울 뿐이다. 하나의 공수표를 또 다른 공수표로 메꾸기를 반복한다.”

<VILLA-A>의 숙박 서비스에서 제시되는 휴양지의 이미지는 서비스를 매개로 실제로 도달하거나 사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환영이나 홀로그램에 가깝다.
그러나 박보마는 이를 통해 서비스의 허구성을 폭로한다기보다, 허구성을 토대로 삼아 ‘어딘가에 있을 법한’ ‘그럴 듯한’ 서비스의 레이아웃을 제작하고 그 안을 채워 넣기 위해서 각종 레디메이드 이미지, 무의미한 현혹들, 깨져버린 문장과 형상들을 동원하는 것 같다. 달리 말해 서비스의 레이아웃은 실제의 경험을 제공하거나 반영하길 포기한 상태이므로 텅 비어있다. 그럼에도 이를 유지하기 위해 일종의 더미 데이터가 요구되고, 작가는 이를 본인이 “럭셔리”라고 표현하는 분위기로부터 자율연상된 듯한 각종 파생물들을 통해 기입한다.

A. 투숙객들의 피드백 대신 기입된 “나는 시범용이다. 나를 클릭하고 수정해라. 글을 더하여 당신과 당신의 서비스에 대한 좋은 것을 표현해라. 당신의 고객이 당신이 얼마나 멋진지 그들 친구에게 후기를 남기도록 해라”라는 문구를 포함해, 박보마는 자신이 제공한 서비스에 관객이 반응하기를 권유한다.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혹은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인다고 했을 때, 이는 텅 빈 서비스 속에서 무엇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 평가할 대상이 없으므로, ‘좋았다’ ‘나빴다’ 등등의 자동화된 반응만이 가능할 뿐이다.
– ‘럭셔리’라는 모호한 분위기가 설정되어있으므로, 실제로 어떤 반응을 보이건 그것의 구체적인 문맥과 무관하게 ‘럭셔리’의 하위 목록으로 수렴될 것 같다.
– 즉 관객의 반응은 무의미하다? 관객은 무의미한 반응들을 보탬으로써 더미 데이터의 총량을 증가시킬 수 있다.

B. 박보마가 지향하는 ‘럭셔리’에 대해서. 이는 군더더기 없는 해상도의 호화로운 사치재라기보다 그를 모사한 공산품의 감성에 가깝다. 이를테면 보석보다는 유리, 강철보다는 스테인리스, 금보다는 글리터 등등. 호화로움이 명확한 대상으로 압축되어있지 않으므로, 그를 암시하는 분위기가 중요해지고, 결국 ‘럭셔리’란 가변적인 상태/분위기에 불과한 것 같은데.
– 망가진 신텍스의 언어들로 이루어진 문장들은 때때로 멜랑콜리한 감성을 드러낸다. 분절된 문장 단위가 시구처럼 읽히기도 하고, 잘못 번역된 단어가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 의도하든 그렇지 않았든, 박보마의 문장들이 무언가를 묘사하려하고 끝내 실패하는 과정으로 독해될 수 있다면, 그 과정은 정확히 무엇을 지향하는 것일까?
– 더미데이터란 자동화된 빈 칸 채우기이므로, 망가진 신텍스의 언어는 자동화의 흐름을 수동적으로 따른 결과처럼 보이기도 한다.

C. 어차피 명확한 아웃풋이 중요하지 않으므로, 박보마는 서비스를 명목으로 휴양지, 바캉스, 일상에 대한 불투명한 인상들, 여성성이란 기호 등등을 막론하고 모든 것을 ‘럭셔리’와 같은 추상적인 상태로 환원할 수 있는 자율성을 확보한다. 마치 주어진 대상을 서비스 필터링을 통해 파쇄하여 부러 그것의 의미망을 느슨하고 허술하게 벌려놓는 것 같다.

D. 그러므로 박보마의 서비스는 느슨하고 허술한 의미망을 지속적으로 확보해나가고, 그 속으로 관객을 위치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더미데이터로서의 파생물은 명확한 인과를 전제한 아웃풋이 아니고 작가의 자의에 의해서만 조절되므로, 얼마든지 계속해서 업데이트해나갈 수 있다. 더미데이터의 총량은 럭셔리라는 망상의 부피와 비례한다. 양자가 증가할수록 소실점은 흐릿해지고 의미는 모호해지고, 그러한 전제들이 박보마의 서비스의 주요한 추동인 것 같다. 이를테면 계속해서 유추만 해나가면서 분위기를 직감하는 과정이 서비스의 대가인 셈.

 

김뺘뺘:

A. 서비스에 대해서 언급하신 부분에 대부분 동의한다. 늘 박보마 작가의 작업의 초대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상투적인 표현들로 점철되어 있어서 굳이 나를 호명하는 것 같지는 않는 것 같다가도, 그 표현들이 너무 노골적이라 어떻게든 반응을 해야할 것만 같다. 반응을 한들 통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층위에서 주고 받는 발신자-수신자의 관계는 성립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어딘가 중간에 낀 상태로 버려진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당혹스러움 때문에 박보마 작가의 작업들이 취향의 문제—내가 보기에 예뻤다, 내 취향은 아니다 등—로 이야기되기 쉬운데 그게 “좋은”(이 단어를 쓸 때는 늘 조심해야하지만) 반응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 애쓰게 된다.

B. 럭셔리에 대해서 언급하신 부분도 대체로 동의한다. 원 글을 쓸 때는 “’럭셔리’란 가변적인 상태/분위기”보다는 만족을 약속하는 서비스의 측면에 더 집중해서 봤던 것 같은데 호화로움을 암시하는 분위기로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다. 사실 깨진 링크 같은 신텍스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 중이다. 자동번역기를 돌린 듯한, 어디서 본 듯 하지만 그 어디서도 본 것 같지 않은 문장들이 랜덤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아서 헷갈린다. 사실 원래는 박보마 작가가 구사하는 언어만 가지고 글을 쓰려고 하다가 실패했는데, 좀 더 고민해보고 싶다.

C. 언급하신 “느슨하고 허술하게 벌려 놓은” 의미망이 때로는 (나름의 의미로) 촘촘하고 계산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자율성을 확보한 “추상적인 상태”가 모호함으로 머물기보다 어떤 감각을 찌를 때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하기가 어려워서 자꾸 이런 저런 말로 시도하고 실패하게 된다.

D. 그리고 관객의 경험에 대해서 “유추만 해나가면서 분위기를 직감하는 과정이 서비스의 대가”라고 표현한 부분에 동의한다. 그것이 서비스의 대가인 동시에 서비스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3) 리얼 / 대체물

“fldjf-초대가 리얼한 초대를 기묘하게 비틀고 어설프게 흉내내는 것 같지만, 리얼한 것들 중에 흉내내기가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리얼 언어의 습득은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포장지에 불과한 말들을 앵무새마냥 따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한 번도 발화된 적 없는 문장을 말한들, 그것은 이미 수도 없이 반복된 약속들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결국 코드를 따르고 반복하는 것의 문제이다.”

A. 이미 대체물만으로 유지되는 경제 속에 재차 리얼한 것이 개입했을 때, 그 경제는 단순히 파열되기보다 리얼한 것을 재차 대체물로 포섭한 뒤 자기 조직화의 과정을 거쳐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에서 리얼한 것이란 리셉셔니스트로서 개입하는 작가의 몸, 그녀가 단속적으로 흩뿌리는 10원 짜리와 같은 실물 경제의 화폐 등으로 상징된다. 일련의 샘플들이 유도하는 혼란스런 시선 속에서 작가의 몸은 그 자체로 현존성을 지니기보다 시선을 유도하고 흐트러뜨리는, 혹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게끔 만드는 또 하나의 ‘오브제’로 기능한다. 마찬가지로 10원 짜리는 별다른 효용가치 없이 공간 속에 부려진 각종 자재들의 목록에 추가될 뿐이다. 그 안에 진입한 관객들 또한 침묵을 강요받은 채 서로의 표면만을 훑을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납작하게 처리된다.
대체물의 경제 속에서 계속 난반사되는 시선들은 원본을 잃어버렸기에 서로를 대체하고자 하는 헛된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울보다는 대상을 불완전하게 비추는 유리 파사드 같다.

B. 샘플들 사이에 리얼한 것이 개입했을 때 리얼함은 무효화되지만, 그 역의 상황에서는 샘플이 리얼함을 대신하며 전면에 부각된다. 결국 진짜 상품은 샘플의 경제를 작동시키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샘플과 대체물을 명확하게 구분해보고 싶다. 둘은 얼핏 동의어 같지만, 엄밀히 말해 박보마의 샘플은 현실, 리얼, 진짜 상품 등을 대체한다기보다 그것들을 난반사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망가뜨린 것에 가깝다. 어설프게 번역된 문장은 리얼 언어로 역산할 수 없다. 주어진 샘플을 토대로 실제의 오브제를 시뮬레이션한 결과는 언제나 실패한다.
어차피 망가질 것이라면, 박보마가 리얼한 것을 선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C. 앞서 언급했던 온라인 쇼핑몰에 게재된 샘플로서의 이미지들은 현실의 관점에서 봤을 때 단순히 납작한 표피거나 모니터 속에 갇혀있는 어설픈 2.5d의 구성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역으로 웹의 관점에서는 진짜 상품들이야말로 현실의 중력에 적응하기 위해 불필요한 무게감과 디테일 등을 감내해야하는, 무엇보다 물리적으로 마모되거나 손상될 처지의 고리타분한 오브제처럼 보인다. 결국 샘플로서의 이미지로 존재하기 위한 열화의 과정과 그로 인해 주어지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저화질’의 해상도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온라인 쇼핑몰을 통한 구매가 실패했다고 말했을 때, 이는 내가 이미지를 토대로 한 시뮬레이션의 결과가 진짜 상품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와 엇비슷한 맥락에서 사용자들은 연속적인 일상을 인스타그램 그리드에 들어맞는 이미지들로 재편집하거나, 스마트폰의 화각에 최적화된 특정적인 순간을 선별해내는 데 익숙하다. 이처럼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의 해상도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작용함으로써 리얼과 대체물의 경계가 점차 흐릿해지는 것 같다.
“(…)리얼한 것들 중에 흉내내기가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라고 자문했을 때, 그리고 리얼 언어가 코드화된 관습에 불과하다고 단정할 때, 리얼의 모호함은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김뺘뺘:

A. 대체의 경제를 유리 파사드에 빗댄 부분은 적절한 서술이라 생각한다. 이어서 “결국 진짜 상품은 샘플의 경제를 작동시키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한 것도 동의한다.

B. 질문해주신 “박보마가 리얼한 것을 선별하는 기준”은 (박보마라는 작가 주체가 작업의 의미를 결정짓기 때문은 아니고) 작업들이 단순한 무의미 혹은 모호함으로 향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연결이 느슨하고 구체적인 지시체를 향하지 않으며 대체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가운데 발생하는 무언가가 있다. “선택”들이 있고, 어떤 “경제” 혹은 “질서”, 감각에 더 치중한다면 “리듬” 같은 것이 분명히 있다.

C. 그리고 마지막에 온라인 쇼핑물과 관련해서 언급해 주신 것은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점이라서 반가운 코멘트다. 리얼한 것과 코드화된 관습에 대한 것은 사실 박보마 작가의 작업을 만나기 이전부터 머리를 맴돌던 생각인데, 박보마를 포함한 몇몇 작가들의 작업을 접하면서 더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리얼한 것을 코드화된 관습으로 규정하면 이로부터 불가능성과 가능성이 동시에 배태된다. 우리가 말을 할 때 그것이 이미 설정된 질서를 따르고 있다면 더 이상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신비감 혹은 직접성 같은 것이 사라질 것이다. 내가 솔직한 심정을 말하고자 하지만 매개체인 언어는 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주기보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쳐간 경로를 다시 밟도록 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의 진정성, 리얼함 같은 것은 영영 잃게 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가능성이기도 하다. 특정 단어는 결코 특정 맥락이나 의미에 절대적으로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이미 있는 경로에 샛길을 만들 수가 있다. 박보마가 구사하는 언어나 오브제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이미 사용되고 있는 언어나 물질들을 가져올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완벽하게 “유니크”하다고 볼 수는 없고 기이한 기시감을 안겨주지만 동시에 자주 가는 길과는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언어나 물질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리얼”하다는 것에 대한 다른 방식의 이해가 가능해지는 것, 즉 구체적으로 정박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대체되거나 언제든지 샘플로 “전락”하게 되는 것으로서의 리얼이 구축되는 것이 박보마 작가의 작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 “텍스트 작도하기: n개의 키워드들” (2) 김뺘뺘가 권시우에게

““텍스트 작도하기: n개의 키워드들” (1) 권시우가 김뺘뺘에게”의 한가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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