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작도하기: n개의 키워드들” (2) 김뺘뺘가 권시우에게

 

<김뺘뺘가 권시우에게: 유닛, 열화, 불능감, 질주에 대하여>

 

내가 전달받은 네 개의 키워드—유닛, 열화, 불능감, 질주—중 적어도 두 단어는 권시우의 글들을 접하면서 겨우 외연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열화”는 생소하다 못해 의미를 가늠조차 할 수 없어서 사전을 찾아보고 나서야 권시우의 용례에 유비적으로 접근해 볼 수 있었고, “유닛”은 그가 여러 차례 규정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못내 부자연스러워 내 문장에는 이 단어가 등장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키워드를 경유하여 권시우가 김뺘뺘에게 요청했던 것, 즉 비평이 무엇을 매개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자는 제안은 나로 하여금 출발 키워드에서부터 여타 맥락으로 뻗어 가기 이전에 다시 권시우의 텍스트들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번 기회에 권시우의 여러 텍스트들을 가로질러 비교적 명시적으로 제시된 “유닛”이라는 단어를 입구 삼아 한 단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이로부터 촉발된 질문이 다른 단어들과도 연결되는 방식으로 재구성해보았다.[1] 이처럼 텍스트의 필자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대신 오히려 접촉면을 확장하는 것이 텍스트의 외연을 넓히고 무언가를 매개하는 작도법이 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새로움이나 참신함을 억지로 추구하는 것이 가장 진부하고 폭력적인 해석을 도출하는 함정이라는 점을 상기하며 그의 글들을 차분히 읽었다.

 

1. 유닛

우선 가장 명시적인문장부터 시작해보자.

1) 유닛은 본래 특정한 단위 혹은 단위체를 의미하지만, 나는 이를 GPS좌표와 게임의 캐릭터/아바타, SNS의 계정 등을 포함해 주체가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가상의 객체를 의미하는 조어로 사용한다.

<비평실천>의 일환으로 쓴 권시우의 글 “유닛으로 질주하기” 중 “유닛”이라는 단어에 달려있는 각주이다. “주체”를 “가상의 객체”로 옮겨오고 있다. 다른 글들에서는 이 “주체”가 구체적으로 (특히 신생공간의) 관객으로 상정되어 있다.

“우리는 연결이라는 행위가 암시하는 것처럼 개별 공간들 사이를 실선으로 잇거나 몇 가지의 계열에 따라 그루핑하는 식으로 공간을 직접적으로 작도할 수 없다. 신생공간 혹은 그곳이 위치한 서울의 변두리를 찾아다니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 관객들의 GPS유닛은 조감된 화면 위에 어떠한 물리적인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줌아웃과 그로 인한 조감의 시점은 얼핏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이를 통해 신생공간 플랫폼을 시각적으로 재확인하려는 시도는 무용하며, 우리가 신생공간에 모종의 공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선 실선이 아니라 차라리 그 이면에서 유통시킨 데이터들의 얼개를 작도해야한다.” (<신생공간 유저들을 위한 오픈베타서비스>)

“신생공간의 동력으로 작용했던 큐브-SNS 연속체를 통해 변형된 것은 비단 작업 생산을 둘러싼 지형만이 아니다. 주지하듯 관객으로써 개별 신생공간을 방문하는 일은 주로 스마트폰에 내장된 지도 인터페이스 상에서 명멸하는 GPS유닛과 동기화된 채 이루어진다. 대다수의 신생공간들은 저렴한 임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도심의 변두리, 혹은 그 사이의 숱한 틈새에 산개해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도시의 파노라마는 스마트폰 전지적 시점과 실시간으로 대조되며 때로는 납작한 인터페이스로부터 부조된 듯한 이질적인 3차원 객체로, 때로는 도착지에 다다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우회해야만 하는 장애물로 대체된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관객들이 자연스레 체득하게 되는 것은 앞선 도시 경험과 연루된 ‘유닛’의 시점이다.” (<시뮬레이팅 서피스Simulating Surface> : 사용자 안내서)

 

관객-주체가 유닛이라는 단위로 치환 혹은 환원된 부분에서 이들의 경험에 새로운 레이어가 가설된다. 여기서 주지할 점은 유닛의 세계는 물리적인 세계를 결코 지워버리거나 그것과 완벽하게 포개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닛의 세계에서 공간 자체가 데이터를 표상하는 그래픽 이미지로서 실제의 두께감을 잃어버린 와중에도, 그와 별개의 영역에서 작용하는 현실의 중력은 여전히 주체지형지물 사이에 붙들고 있다. 우리는 양자를 분별할 수 있지만 혼종화된 세계를 결코 목격할 수는 없다. 결국 가소성 이후에 주어진 것은 일시정지의 버튼이다. 그것을 눌렀을 때 멈춰버린, 감속한, 불완전한 백업 파일이야말로 지금의 잉여세대가 처한 데이터베이스적인 일상인 것이다. 강정석의 작업을 포함한 1인칭 시점은 바로 그것을 쳐다보려 하고 그럴수록 표면들은 누적된다.” (<시뮬레이팅 서피스Simulating Surface> : 사용자 안내서)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현실세계가 “지형지물”의 차원으로 번역된다는 점이다. 일종의 유닛-세계관은 현실세계를 물리적인 표면과 그 위에 자리잡은 지형, 혹은 도시 환경에서는 도로나 건물 등으로 조직되어 있는 공간으로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세계에서는 주체를 구성하는 복합적인 사회문화적 맥락들이나 서로 다른 주체들이 관계를 맺고 갈등을 일으키는 차원이 생략된다. 조심스레 넘겨짚어 보건데, 권시우의 글에 자연스럽게 “접속”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하는 이들은 이처럼 현실세계를 “지형지물” 혹은 “두께감”과 “중력”으로 구성되어 있는 물리적인 공간으로 상정하는 접근방식을 체화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주체를 유닛으로 치환하며 구축한 유닛의 세계가 현실세계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명시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역설적으로 유닛-세계관은 현실세계를 규정하는 힘을 행사한다. 주체의 차이가 지워진(혹은 열화된) 유닛의 세계에서는 각 유닛을 다른 유닛으로부터 구별할 수 없다. 이처럼 유닛-주체는 “유닛”의 사전적 정의, 즉 “특정한 단위 혹은 단위체”의 의미를 충실히 따른다. 유닛-세계관은 주체를 단위화하여 유사-주체를 생산해낸다. 국적, 성별, 나이, 소득분위 등의 요소들이 지워진 채 좌표상에서 움직이는 점(단위)들은 지워져서는 안될 것이 삭제된 상태로 부유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매우 급진적으로 평등한 지평 위를 거닐고 있는 걸까? 다만 한 가지 살아남은 현실세계의 굴곡은 “세대”라는 변수이다.

“… 강정석의 세계 속 인물들은 지금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이 결국 표면으로써 미끄러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채 작가에 의해 주지된 의미 없는 행동들을 별다른 위화감 없이 소화한다. 달리 말해 그들은 표면이라는 전제의 ‘무가치함’을 어찌됐든 영상의 단일 프레임 속에서 상연하기 위해, 혹은 지금 관객이 목격하고 있는 스크린조차 표면일 뿐임을 상기시키기 위해 반복적인 슬랩스틱을 구사하는 셈이다. 이것이 과연 잉여 세대의 미학인가? 역설적으로 ‘세대’라는 관성은 계속해서 스킨으로서의 무가치함을 방해한다. 동세대 안에 종속된 인물들을 마저 열화시킬 수 없는 강정석은 슬랩스틱의 와중에도 빈번히 그들에게 말을 건네면서 최소한 스마트폰 1인칭 시점에 의해 포착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표면 ‘이전’의 구체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복기하고 있다.

스마트폰의 1인칭 시점은 분명 현실의 타임라인과 동기화한 장면을 포착하지만 그와 별개로 현실 공간의 깊이감은 어차피 표면으로써 귀결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거주하는 유사 주체들은 이를 일상적 차원의 중력으로 체감한 채 다소 기괴한 속도감으로 움직인다. 데이터에 의해 열화세계에서 세대적인 내러티브를 유지한다는 모순적인 전제는 이처럼 정크를 먹어치우며 체한 듯한 다중현실을 재생산한다.” (<시뮬레이팅 서피스Simulating Surface> : 사용자 안내서)

탈각된 여타 요소들과는 달리 세대적 변수가 현실세계와 유닛의 세계를 어렴풋하게 나마 연결하는 요소로 지목된 이유는 무엇인가? 유사-주체로서의 유닛들이 세대적인 내러티브 혹은 조건에 얼마간 종속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면, 유닛은 세대적 조건을 어떻게 “망상”하고 있는가?

Cf) 유닛으로 단위화된 주체들은 단위화된 주체는 또 다른 세계를 “사유”하지 않고 “망상”한다.

“이처럼 우리의 시선은 번번이 표면에 의해 차단되지만 앞선 작업들은 기어코 그에 의해 난반사된 현실의 잔상으로부터 별도의 세계, 혹은 세계 내 주체를 망상해낸다. 지도 인터페이스 상에서 명멸하는 GPS유닛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광범위한 GPS대역 자체에 개인의 의지가 개입할 만한 여지는 없지만, 스마트폰의 위치 서비스가 활성화되며(혹은 대역의 일부가 유닛의 형태로 집적되며) 사용자와 동기화하는 순간 그것은 지도 인터페이스 내부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독립적인 단위체로 표변한다. 결국 그러한 유닛의 1인칭 시점으로 여과한 또 다른 세계 망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시뮬레이팅 서피스Simulating Surface> : 사용자 안내서)

 

2. 열화

이처럼 유닛-세계관은 이미 얼마간 “열화”된 주체와 현실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열화라는 키워드의 용례를 살펴보면서 무엇이 휘발되고, 어떤 세계가 망상 되는지 살펴보자. 열화는 문장 안에서 “00이 xx을 열화하다” 혹은 “열화된 xx”와 같은 구조를 취한다. 그런데 이때 열화란 어떤 주체가 의지를 가지고 객체에 가하는 행동이기보다 기계적인 작동에 가깝다.

“6) 인간은 스캐너가 아니며, 애초에 스캐너 또한 이미지열화 저장할 뿐 독해 장치가 아니다. <THE GREAT CHAPBOOK>에 진열/집적된 무수한 삽화들은 단지 시각적으로 소비될 뿐이다. 소비가 거듭될수록, 망상의 폭은 일시적으로 확장된다.” (<THE GREAT CHAPBOOK> 릴레이 텍스트)

열화는 장치, 혹은 자동화 기계와 더 가까이 맞닿아 있는 한편 주체의 의식 혹은 의지를 전제해야 하는 “독해”와 같은 “활동”과는 거리가 있다. 현실세계의 주체가 이 열화-기계를 통과하면 무엇이 탈각되고 무엇이 남는가?

“이수경의 인물 드로잉이 <던전(Dungeon)>이나 ‘미소녀’라는 범주로부터 벗어났을 때 남는 것은, 혹은 그것의 본체는 취향이 부재하므로 거듭 재사용할 수 있는 분신이다. <F/W 16>의 한편에 전시된 드로잉북(혹은 카탈로그)에서 그들은 이수경의 덩어리 조각들 일부를 신상품으로 걸치거나 휴대한 채 다소 무미건조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복붙’이 가능한 인물은 일부분 미소녀 데이터의 작동 방식을 공유하지만, 그들은 단지 자신의 프로필 정보를 완전히 소거함으로써 획득한 자율성을 통해 그렇게 한다. 얄팍한 분신들은 현실에서 결코 생산/유통될 수 없는 신상품을 소화하기 위해 자율연상(복붙)되며, 실제로 남성-노인들가상의 카탈로그 속 인물들이 열거된 방식과 유사하게 열화된다. 순전히 인상 차원에서 수집 저장된 옷차림과 포즈는 남성-노인의 텍스처만을 드러낼 뿐, 특정 인물의 현존성은 몰가치해지는 것이다.

애초에 이수경이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드로잉의 과정을 통해 그것을 희석시키거나, 얄팍하게 만들거나, 자기 변주에 동원하기 위한 편의적인 대상으로 열화시킴으로써 성립한다. 반지하에서 진행했던 <Body Parts>와 같은 연작은 그러한 징후를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F/W 16>의 덩어리들과 엇비슷한 외형을 띈 유사 신체 조각들은 작가에 의해 드로잉 연상된 인물들을 부분으로 해체한 뒤 각각을 펠트와 천으로 기워내 질감을 부여한 결과다. 이때 각각의 신체 부분들의 합이 암시하는 것은 구체화된 인물이 아니라 인물의 형상을 띈 무엇이다. ‘무엇’은 구상 단계에서 팰트와 천으로 상징되는 현실에서의 텍스처와 부합하게끔 인물 내부에서 과장되게 변형되며, 그러는 와중에 신체의 윤곽은 드로잉의 무작위한 필치와 연동된다. 이로써 누적되는 출처 불명의 형상들은 텍스처 이전의, 혹은 텍스처를 예비한 미완의 재료들이다.” (<F/W 16>, 혐오의 오브제 전시하기)

열화-기계는 주체의 현존성과 구체성을 휘발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열화는 “의식”과 “의도”가 생생하고 자연스럽게 살아있는 상태와 대조적으로 “기계적”이고 “자동화”된 필터 혹은 함수와 같은 것이 설정되어서 이를 통과할 때 “현존성”과 “구체성” 같은 요소들이 탈각되거나 휘발되는 작동을 지칭한다. 열화-기계의 생산물은 “가상의 카탈로그 속”의 “편의적인 대상으로” 변모하거나 판매된다. 현존성과 구체성이 지워진 그 무엇들은 그 자리에 정적으로 머물지 않고, 제약없이 유통되는 새로운 경제에 최적화되어 유동한다. 열화된 그 무엇들이 유통되는 경제, 혹은 그것들이 존재하는 세계는 어떤 곳인가? 이 유통 경로와 세계 또한 의식이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자동화 기계인가? 그곳에서 주체 간의 차이는 단순히 휘발되는가, 아니면 열화된 방식으로 잔재하는가? 그렇다면 “남성-노인”과 같은 타자는 어떻게 망상되는가? 타자와의 관계망은 어떻게 재설정되는가?

 

3. 불능감, 질주

주체를 구성하는 차이, 그리고 현존성과 구체성을 잃은 주체는 열화라는 자동화 기계 앞에서 모종의 “불능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매체와 자동화 기계는 낯선 불능감을 창출한다. 그런데 “불능감”은 “불능”과는 다르다. 사실상 우리말에서 “불능”은 문장 안에서 쓰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불능”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문장을 당장 산출해낼 수 없다. (단 한가지 예외, “그 놈은 정말이지 구제불능이야”) 대체로 “불능” 대신 인접한 단어들인 “불가능” 혹은 “무능”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불능”은 차라리 중국어에서 “cannot/unable to”에 해당하는 조동사 不能 [bù néng]으로 이해할 때 접근 가능한데, 이렇게 이해하면 “불능”과 “불능감”의 간격은 더 멀어진다. “불능”은 반드시 다른 동사와 함께 사용되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없는지가 명시되어야 성립된다. 하지만 “불능감”은 무엇이 불능의 상태인지, 어떠한 것이 결여되어 있는지를 적시하지 않아도 충분히 쓰일 수 있다. “불능감을 느꼈다”라고 말하면, 그 자체로 문장이 성립되고, 다소 모호하게나마 의미가 전달된다. 이처럼 “불능감”은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진단이 아니라 어딘가 명확하게 접속할 수 없다는 감각, 혹은 호환되지 않는다는 느낌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에 더 가깝다. 사정이 이렇다면 의사도 묻지 않고 구체적인 차이들과 현존성을 탈각시킨 결과물들을 증식시키는 열화-기계 앞에서 스스로를 현존으로 자처하는 주체라면 필히 “불능”이 아닌 “불능감”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나아가 이 기계적 장치가 “무의미”하다고 평가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무의미”란 공히 폄훼의 무게를 지니지만, 그 진단 자체—이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 열화-기계와 유닛의 세계에 대고 무의미하다고 외치는 주체들의 지적은 비난이 아니라 사실 적시에 가까운 것이다. 때문에 주체들은 결코 불(무)능하지 않으면서(상황 파악을 성공적으로 했음에도) 불능감(상황에 주파수를 맞출 수 없다는 감각)에 시달리는 꼴이 된 격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현존성을 자처하는 주체들에게 “질주”의 맥락은 무의미하고 산만하다. “질주”는 “질주하다”라는 동사로 사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사로 쓰일 때 영 어색한 단어이다. 게다가 이 단어에는 방향성이라는 의미가 희미하다. 출발점과 목표지점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아도 성립하는 속도감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분노의 질주”는 결국 어디에 도착하는지 하등 상관이 없다. 빠르고fast 맹렬하면furious 그만이다. 때문에 의식이 있는 주체의 행동을 지칭하기 위한 동사로는 다소 부적합한 느낌을 준다. “그는 지각하지 않기 위해 강의실로 질주했다.” 어색하다. 자연스럽게 고치려면 “강의실로 전력질주했다”가 되어야 한다. 주체의 강력한 의지라는 층위를 동반한 “전력”이 붙어야 비로소 동사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질주”라는 상태는 빠른 속력만을 속성으로 취하며 스스로를 해명하지도 않고 그러해야 할 이유도 느끼지 않는다. 때문에 아직 유닛으로 동기화된 감각을 낯선 것으로 여기며 불능감에 시달려온 주체들은 각자의 서사를 이 질주 위에 차마 얹어 놓지 못한다. 개인-서사는 개별적이고 고유하며, 대체로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취한다는 관념에서 출발한다면, 이 질주의 속도를 결코 따라잡지 못할 뿐 아니라 편승하기에도 무리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원심분리기의 고속 회전이 질주의 감각과 친연성이 높은 이미지일 수 있겠다. 질주는 주체들 사이의 감각 차이를 기반으로 하여 이들을 분리하는 속도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본능에 가까운 감각으로 질주하고 있고, 누군가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질주 할 수 없다.

 

+ 이 피드백에서는 원글(“유닛으로 질주하기” )을 직접 다루지 않았다. 이 피드백이 원글에 대한 독해에 어떤 레이어로 작용하게 될까? 이 피드백이 또 다른 피드백을 매개하게 되길 바라며 마무리한다.

 

 

권시우:

1) 유닛

A. 일단 유닛이라는 단어는 신생공간의 관객들이 갖는 특정적인 경험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하다 튀어나온 게 맞아요. 흔히 신생공간의 역학에 대해 설명하면서 ‘큐브-SNS’연속체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그게 물리적 공간에서의 제한된 경험이 SNS의 타임라인을 매개로 유통의 속도가 빨라지거나, 그로 인해 일시적으로 외연이 넓어지거나 하는 등의 상황을 부연하는 것이잖아요. 저는 이로 인해서 물리적 공간의 현존성이 불완전해지고 굉장히 유동적인 상태로 바뀐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게 반드시 SNS를 매개로 해서만 벌어진 결과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강정석 작가의 ‘인스턴스 던전들’ 관련한 글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사전에 경로를 설정하고, 그에 따라 도심을 가로지르고, 신생공간을 발견해내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 서술하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지도 인터페이스와 대차대조하면서 형성되는 관객의 시점 자체는 분명 그냥 고스란히 주어진 현실을 바라보는 해상도와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고, 이게 현실의 오브젝트들이 나열된 리얼한 풍경과 지도 인터페이스 상의 납작한 그래픽 텍스처 사이에 은연중에 혼선이 빚어지면서 형성되는 착시가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져본 셈이죠.

이에 대해서 가장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납작한 지도 인터페이스 상에서 부조된 듯한 풍경’이라는 문장일 거예요. 현실에는 실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 혹은 사용자 주체에게 착시로서 각인되는 순간. 만약 GPS유닛 자체에 1인칭 시점을 부여한다면, 이와 유사하게 자신을 둘러싼 풍경을 바라보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것은 말 그대로 납작한 그래픽 텍스처를 메스mass로 쌓아올린 것이기 때문에 텅 비어있고, 도시 인프라와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지만 실제 인프라의 역학과는 무관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맥락이 부재한 말 그대로 모델링된 세계인 거죠. 그런데 이게 착시에 불과하기 때문에 엄연한 의미에서의 3d는 아니고. 굳이 표현하자면 2.5d에 가까운.

결과적으로 유닛이란 나를 대입해볼 수 있을 만한 가상의 시점인 셈이죠. 그렇게 느슨하게 의미를 설정하고 나니까, 반드시 GPS좌표뿐만이 아니라 데이터 차원에서 우리가 운용하는 다양한 계정 혹은 객체들을 수렴해볼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앞서 언급했던 SNS계정이나, 게임의 캐릭터, 아바타 등등. (그런데 앞서 나열된 것들이 유닛의 범주 안에서 어떻게 서로 다르게 작동하는지 아직 세세하게 분별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아요. 사용하는 맥락에 따라 조금씩 문맥을 고쳐가면서 사용하고 있어요.) 이때 중요한 것은 외부의 현실이나, 데이터 세계가 작동하는 이면의 메커니즘과 무관하게 오로지 앞선 계정 혹은 객체들이 확보하고 있는 제한적인 시점과 연동된 상태에서 사용자인 내가 무엇을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러한 유닛들을 운용하는 경험이 현실에서의 경험과 종종 합선을 일으키는 순간에 대해 주목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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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제가 <시뮬레이팅 서피스: 사용자 안내서>라는 글에서 세대에 대해서 언급한 이유는 강정석 작가가 자신과 동세대에 속한 인물들을 다루기 때문이지, 유닛 자체와 큰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강정석 작가 작업의 중요한 전제는 자신의 시점을 카메라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맡겨버린다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 형식이 홈비디오였고, 2010년 이후로는 스마트폰 내장형 카메라로 변화한 셈이죠. 스마트폰 내장형 카메라의 시점의 가장 두드러지는 장점은 언제든지 휴대하고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편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잖아요. 강정석 작가는 그냥 자신의 일상을 경유하는 와중에 촬영을 하기 위해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고, 그 순간 가장 가까이 있는 대상이 소위 동세대의 인물인 거죠. 그런데 이때의 동세대란 사회학적인 범주라기보다 자신의 일상과 가장 밀착해있는 대상이 주변의 친구들인 거고, 그게 자연스럽게 동세대의 인물들로 환원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수동적으로 얻어진 영상 클립들을 편집하고 이어 붙여서 또 하나의 클립을 만들고, 애초에 수동적으로 얻어진 장면들의 총합이기 때문에 별다른 가치를 부여할 수 없고, 그래서 가볍고, 가벼운 영상들을 링크를 통해 유통시키고, 이런 과정의 반복인 것 같아요. 그런 맥락에서 일련의 영상들은 주변의 일상을 의도적으로 열화시킨 결과처럼 보여요. 자신이 클립으로 운용하고 편집할 수 있는 편의적인 대상으로 환원하는 거죠. (스마트폰을 매개로 일상에 대한 권한을 의도적으로 제한한다는 점에서 유닛의 시점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 속의 동세대 인물들은 스마트폰과 동기화된 작가와 친연성을 가지고 있고, 일방적으로 열화시킬 수 없는 독자적인 개인들이고, 이런 점에서 교착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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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유닛의 세계란 기본적으로 모델링의 세계고, 대강의 텍스처만 존재할 뿐 말 그대로 텅 비어있죠. 바로 텅 비어있기 때문에 각종 망상들을 동원할 수 있는 여지가 발생하는 것 같아요. 그에 대한 가장 명시적인 사례가 김희천 작가의 <바벨>이라고 할 수 있죠.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해서) GPS유닛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경로들에 내러티브를 부여하고, 그 위에 재차 디스토피아 정서가 부여되고, 마침내 상연되는 서울의 3D모델링의 풍경은 앞선 내러티브와 정서의 반영이 되어버리는 거죠. 이를테면 데이터로 포화돼서 모든 게 몰가치해져버린 세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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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열화

일단 제가 자주 사용하는 열화라는 표현의 용례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 통상적인 의미: 열화 출력하다(프린트), 데이터 혹은 픽셀 차원으로 번안되다(래스터 이미지)

– 본래의 정보값을 잃어버리다.

– 대강의 텍스처나 표피와 같이 대상의 일부분만을 취해서 번안한다.

– 원본을 망가뜨리다. 혹은 망가진 원본 자체를 표현할 때.

= 이 모두에서 공통적인 맥락은, ‘정보값을 잃어버리는 과정이 개인에게 의식되지 않고, 순전히 자동화된 방식에 따라 이루어진다.’입니다.

애초에 열화라는 표현이 유닛의 경우처럼 다소 느슨한 의미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열화된 대상이 거주하게 되는 세계 또한 단일하지 않고, 그것이 열화된 방식에 따라 다양한 분기로 나뉘게 됩니다. 이에 대한 대략의 다이어그램을 그려봤습니다. 단 프린트 출력물이나 래스터 이미지와 같은 통상적인 경우는 제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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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가상 차원에서 열화된 경우

– 현실의 특정한 대상이 임포트되어 데이터의 흐름 속에 일방적으로 휩쓸리며 형해화된다.

만약 이때의 특정한 대상이 자아나 세계를 의미한다면, 김희천 작가가 바벨 3부작을 통해서 재현하려 했던 데이터로 포화된 디스토피아가 이러한 사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현실의 특정한 대상을 임포트하여 일정한 레이아웃과 규칙 속에서 편의적으로 운용한다.

이를테면 포토샵과 같은 광학적 편집 도구로 일상에서 발췌한 이미지를 재료 삼아 작업하는 경우를 사례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실의 오브젝트나 공간 등을 CAD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3D로 모델링하고 이를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보고 조작하거나 재편집하는 과정도 이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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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현실 차원에서 열화된 경우

– 데이터를 의태한 이미지, 오브제 등을 제시한다. 이것들은 데이터의 수열성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고, 더 이상 유동적으로 재편집할 수 없는 상태로 현실 속에서 굳어버린다.

ex) 김정태 작가의 래스터 이미지가 프린트 회화로 제시될 때. 강정석 작가가 <GAME1>에 동원한 픽셀들이 매우 조악한 형태로 제시되고, 이것이 스티로폼 박스와 유비될 때.

– ‘캐라’처럼 대상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대상의 실체와 무관하게 오로지 확보한 데이터들만을 재료삼아 재조합하고 그 결과를 제시한다.

이때의 ‘캐라’란 캐릭터의 일본식 조어로서, 돈선필 작가는 <피규어 텍스트>에서 이를 “캐릭터로서 유지해야 할 특질이나 개성, 속성을 얼굴이 아닌, 신체의 주변부로 확장”해 코드화된 일련의 복장이나 아이템 등의 구체적인 사물들의 조합으로 재현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수경 작가는 이러한 맥락에서 남성 노인을 ‘캐라화’해 인물의 현존성을 휘발시키고, 단지 직관적으로 포착한 인상들만을 짜깁기해 형태를 유동적으로 변주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합니다.

제가 나열한 가상의 다이어그램을 통해 상기해볼 수 있는 것은, 열화의 자동화된 감각에 휩쓸려 열화가 도출해낼 수 있는 상이한 결과값들이 무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화라는 표현을 독해할 때는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대한 재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빈칸

3) 질주 / 불능감

앞서 질주와 불능감의 용례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는데요. 제가 <유닛으로 질주하기>란 글에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강정석 작가의 <GAME1>과 김희천 작가의 <썰매>가 질주와 불능감이라는 키워드를 전연 다른 방식으로 소화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강정석 작가는 게임에서 최대한 빠른 랩 타임을 끊기 위해 플레이하는 ‘스피드러너’의 1인칭 시점을 빌어서, 그러니까 스피드러너가 수행하는 질주를 통해서 가상현실에 몰입하고자 하지만 이러한 몰입의 과정은 불능감이라는 전제 때문에 번번이 차단당합니다. 반면 김희천 작가에게는 가상현실에 대한 불능감이 부재한 채 이미 데이터로 포화된 디스토피아 속에 상주하고 있고 그 속에서 자신이 수행하는 질주를 만끽하죠. 즉 이미 과몰입된 상태입니다.

두 작가는 모두 데이터에 최적화된 인간 혹은 자아를 지향합니다. 하지만 한편은 그에 실패하고, 한편은 그에 성공한다기보다 비약에 성공합니다. 강정석 작가는 게임과 주변기기, 가상현실에 대한 촘촘한 얼개의 텍스트를 활용해 현실상의 자아를 납득시키고 회유하려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시각적으로 포착되는 것은 가상현실 자체가 아니라, 스크린 혹은 모니터상에 투사되고 있는 가상현실의 클립일 뿐입니다. 반면 김희천 작가는 자신이 구성한 내러티브를 통해 이미 데이터로 포화된, 현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대체적인 세계관을 구성하고 자신을 그 속에 위치시킵니다. 이때 작가는 다른 사람들을 굳이 납득시키고 회유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스스로가 데이터에 최적화된 채로 데이터 세계 속에 있다고 가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명확해지는 것은 우리는 아직 데이터에 최적화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공과 실패의 여하와 무관하게, 데이터 인간이 되기 위해선 텍스트나 내러티브와 같은 인위적인 장치를 매개로 삼아야만 합니다. 두 작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러한 교착 상태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1] 인용한 권시우의 글들은 집단오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 키워드를 추출한 원 글인 “강정석 x 김희천 x ?: 유닛으로 질주하기”는 “비평실천” 기획의 의도를 따라 비공개로 작성되었다.

““텍스트 작도하기: n개의 키워드들” (2) 김뺘뺘가 권시우에게”의 한가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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