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컬쳐 페인팅 프로그램 연대기: 오에카키에서 클립스튜디오까지

90년대 말부터, 특히 2000년대 초 이후 한국의 디지털 환경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윈도우가 널리 보급되어 텍스트 메뉴 대신 이미지 아이콘이 통용되고, 키보드 대신 디지털 2차원 평면에 마우스를 움직여 사용하는 것이 조작의 기본이 되었다. ADSL의 보급과 함께 인터넷 의사소통에 본격적으로 이미지가 활용되기 시작했으며, 디지털 카메라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짤방, 이모지, 아바타 등의 각종 이미지 개념이 소통에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지금의 유아 세대가 책보다도 터치스크린을 먼저 접하는 세대라는 인식이 있듯 이 세대는 처음으로 디지털 이미지를 통해 의사소통하게 된 세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가정에 프린터나 스캐너를 구비하게 되었고 와콤의 그라파이어 시리즈와 같은 고성능 저가형 타블렛주1이 등장하며 포스트 인터넷 동인주2들의 새로운 디지털 창작의 장을 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어린 동인들은 수작업 그림 창작을 겪지 않고 디지털 페인팅을 통해 처음 창작활동을 시작한 최초의 세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동인들에게는 항상 그들을 위한 디지털 페인팅 프로그램이 함께했고, 디지털 페인팅 툴 역시도 그들과 함께 성장하고 상호작용해오며 발전했다. 페인팅 프로그램은 단순히 그 시기의 기술력만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유행하는 그림의 트렌드부터 주 향유층의 그림 실력, 기술 향유 수준, 구매력, 연령대가, 그리고 그들이 활동하는 커뮤니티의 환경과 웹 플랫폼이, 화상의 공유 방식이 모두 프로그램에 상호 영향을 미쳐왔다. 이것은 어느 정도 세대론적 관측에 기반하는데, 당시 창작을 시작했던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생의 어린 동인들이 현재는 웹툰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 등 현재의 서브컬쳐 컨텐츠 창작의 주축이 되고 있으며 페인팅 프로그램의 유행이 그들의 성장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경향을 가지기 때문이다. 포스트 인터넷 시대를 살아온 한국 동인들이 어떻게 그 기술과 상호작용해왔는지 이 글에서는 대표적인 그림 프로그램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연대기를 작성해보고자 한다.



오에카키bbs와 비툴, 새로운 창작소통의 방식

BTool의 인터페이스

일본어로 그림그리기(お絵かき)라는 이름을 가진 오에카키 bbs는 2000년대 초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던 JAVA 기반 그림그리기 게시판이다. 오에카키 자체는 기실 그림그리기 툴로서는 윈도우즈 그림판과 다를 것 없는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웹 해상도에 맞춘 300*300px의 작은 캔버스가 기본이 되는데다 그리는 도중 저장도 되지 않고 오류가 나면 복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것은 한일 할 것 없이 높은 인기를 구가했는데, 이것이 페인팅툴로서 라기보다는 하나의 커뮤니티 툴로서 작동하였기 때문이다. 웹에서 바로 그림을 그리고 간편하게 포스팅할 수 있다는 점은 더욱 빠르고 다양한 형태의 교류를 가능케 했다. 게다가 기능이 매우 간편하여 창작집단이 아닌 일반 사용자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었던, 따지면 가장 대중적인 그림툴이었다. 커뮤니티 사이트에 하나쯤은 존재하던 오에카키 게시판에서는 즉석에서 릴레이로 비슷한 주제의 그림을 그리거나 내용을 이어가는 등의 창작들이 이루어졌고 실력이 뛰어난 오에카키 사용자들이 주목받고 팬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개인 사이트에 설치된 오에카키 게시판에서도 주인장뿐만 아니라 방문자들이 들러 방명록 대신 그림을 선물하고 가거나 방문자들끼리 코멘트를 나누는 등 일종의 사랑방처럼 이용되었다. 하지만 그 인기만큼 빈약한 그림 그리기 성능 향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후 임시 저장이나 반투명 브러쉬, 복사, 텍스트 입력 등 오에카키보다 추가되고 보완된 기능을 가진 다양한 파생 그림 bbs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한국 동인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비툴이다.

비툴은 오에카키 bbs의 파생 프로그램으로서 2004년 반디라는 한국 개발자가 개발한 역시 JAVA 기반 그림 게시판이다. 초기의 오에카키에 비해 성능 면에서 매우 발전했는데, 필압이 적용되고 투명도를 조절 가능한 브러쉬를 쓸 수 있게 되고 반전, 복사, 기본적인 텍스트 입력도 가능해졌으며 임시저장과 중도 저장 후 이어그리기, 캔버스 크기 조절 등의 기능도 추가되어 더욱 전문적이고 본격적인 창작이 가능해졌다. 오에카키가 당시의 네티즌들에게 두루 사용된 반면 비툴의 사용자는 대부분 최소한 그림을 취미로 가지고 있는 창작집단이었다. 많은 동인 홈페이지의 갤러리나 일기장이 비툴로 대체되기 시작하고 더욱 고퀄리티의 창작들이 업로드 되었다. 하지만 비툴의 등장이 끼친 가장 큰 영향으로는 현재도 한국 동인계의 매우 커다란 부분을 담당하는 자작 캐릭터 커뮤니티, 소위 자캐 커뮤의 형식의 원천이 되는 ‘비툴 커뮤니티’의 등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자캐 커뮤는 특정한 세계관에 소속되는 캐릭터를 각자 창작하고, 운영자의 조율에 따라 캐릭터들이 활동하고 교류하고 갈등하면서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일종의 롤플레잉 커뮤니티이다. 지금은 그 플랫폼이 카페, 카카오스토리, 트위터 등으로 다양화 되었지만 초기에 비툴이라는 특정 그림 bbs 형식을 중심으로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한국 동인의 특유한 현상이다. 비툴이 그만큼 당시 그림 동인들 사이에서 상용화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툴 자체의 환경이 교류에 적절한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과 코멘트를 함께 나열해주는 인터페이스는 기존의 게시판이나 갤러리 형식보다 빠르게 그림을 읽고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어그리기 기능이 있어 다른 사람의 그림 위에 바로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장면을 이어나가기 쉽고, 비툴이 아니라 다른 프로그램으로 그린 그림도 올릴 수 있어 형식의 제약도 줄어든다. bbs 그림툴들은 업로드 후 바로 페이지에 노출된다는 특성상 최대 캔버스 사이즈에 제약이 있었는데, 이것은 빠른 소통과 적은 트래픽 소모를 중요시하는 커뮤니티의 성격상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2005년부터 시작된 비툴 커뮤니티는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섭렵하며 동인들의 메이저 컨텐츠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비툴 커뮤니티 활동은 돌연 급속도로 동결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발자의 비툴 유료화선언 때문이었다. 비툴의 판권을 가진 사이트 “비툴세상”과 “커뮤러”들 간의 긴 갈등 끝에 비툴은 결국 서비스를 종료하기에 이르렀고, 비툴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비툴 커뮤니티의 형식은 지금까지도 로드비라는 파생툴의 형태로 남아있지만 이제는 그 게시판 형식만 유사할 뿐 직접 그림을 그리는 그림툴이 아니라 다른 툴로 그린 그림을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자캐 커뮤 역시도 개인이 만든 홈페이지 대신 카페, 나아가 트위터나 카카오 페이지 등의 새로운 SNS 형식에 따라 변화해나간다.



오픈캔버스와 포토샵: 디지털 페인팅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Open Canvas 1.1의 인터페이스

오에카키와 그 파생툴들은 본격적인 디지털 페인팅 툴이라고 하기에는 전문성도 안정성도 떨어지며 따지면 교류용 게시판의 형식에 가깝다. 오직 해당 게시판에서만 게시되어 소비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은 이러한 bbs형식의 그림툴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bbs의 그림툴의 한정된 기능만으로 극한의 퀄리티를 산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동인들은 그와는 별개로 PC에 페인팅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그림을 그려왔다. 이러한 PC 페인팅 프로그램 중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페인팅 프로그램은 단연 어도비의 포토샵Photoshop일 것이다. 소위 ‘포샵질’이나 ‘합성 짤방’ 등의 유행으로 한국에서는 인터넷 발전 초기부터 대중적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 전문가용 화상 편집툴로서 일반인들이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아니다.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페인팅 전문 툴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 디지털 그림을 시작하는 사람이 사용하기는 힘든 측면이 있어 의외로 모든 동인들이 포토샵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었다.주3 처음으로 타블렛으로 마우스로 디지털 화면 속에 선을 긋고 색을 바꿔 칠하고 레이어를 구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할 초기의 동인들에게는 더욱 단순하고 직관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켜 2000년대 초 크게 유행했던 프로그램이 오픈 캔버스 1.1, 소위 ‘오캔’이다.

오픈 캔버스는 디지털 페인팅 프로그램으로서는 아주 기초적인 기능만을 탑재하고 있다. 하지만 브러쉬의 투명도나 필압을 조정할 수 있고 레이어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초보 그림동인들에게는 그림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불러왔다. 특히 레이어의 분리는 한 표면 위에 그림을 그리는 현실에서의 페인팅과 달리 다른 부분에 수정이나 손상을 가하지 않고 가필할 수 있는 디지털 환경에서만 가능한 창작 방식이다. 또한 터치를 실행취소하거나 가산 레이어 등으로 반짝이는 효과를 주는 등 현실에서는 어렵거나 불가능한 기능으로 그림 창작을 훨씬 손쉽게 해주는 것이 바로 디지털 페인팅의 매력이었던 것이다. 현실의 회화과는 다른 디지털 이미지와 페인팅의 특성들을 익히고 새로운 창작의 방식을 시도하는 것이 동인들의 당면과제였다. 특히 오캔에는 여타 페인팅 툴과는 다른 특별한 기능이 존재했는데, 바로 인터넷을 통한 동시 창작 기능, 소위 넷캔이었다. 이를 이용하면 최대 4인의 사람들이 한 캔버스에 동시에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당시의 동인들은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이 그리는 것을 구경하거나 그리는 법을 배우거나 또 함께 그리면서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고 함께 실력을 키워나갔다. 오캔의 성공은 물론 그림 그리기에 꼭 필요한 기능을 충실히 담았기에 가능한 것이었겠지만, 무엇보다 이것은 디지털 페인팅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초보 디지털 동인세대의 요구를 만족시켰고 그들의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재미있는 것은 오픈 캔버스 1.1은 오픈 캔버스라는 프로그램 시리즈의 베타버전이며, 2000년대 초에는 이미 훨씬 전문적이고 디지털 페인팅에 특화된 기능을 담은 오픈 캔버스 3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1.x 버전의 유명세에 비해 3.x 버전의 사용자는 매우 드물었는데 가장 직관적인 이유는 오픈캔버스 3은 유료라는 사실이다.주4 앞서 비툴의 유료화 선언이 비툴 유저를 급격히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도 포함하여 2000년대 초 학생이었던 동인들은 그림 프로그램에 지불할 정도의 재력이 없었을뿐더러 웹상으로 결제할 방도도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동인들은 오픈 캔버스가 가진 기능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쉽사리 대체할만한 프로그램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2008년 정말로 뜬금없이 한 페인팅 프로그램이 동인계를 휩쓸었다.



사이툴: 고성능 페인팅 툴에의 요구

Paint Tool Sai의 인터페이스

Paint Tool SAI, 통칭 ‘사이툴’은 SYSTEMAX Software에서 개발한 페인팅 프로그램으로, 2008년 출시와 함께 프로와 아마추어를 여하하고 그림 창작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오픈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페인팅에만 특화된 프로그램으로서 매우 직관적인 인터페이스와 간편한 조작을 자랑한다. 특히 프로그램 용량 자체가 가벼운데도 전반적인 처리 속도가 매우 빠르며 특유의 손떨림 보정이 더해져 소위 ‘손맛’이 살아있는 매끈하고 빠른 선화를 그릴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꼽힌다. 해상도가 높은 그림도 가볍게 처리하는 덕에 동인지 등 출력용 그림을 그릴 때에도 곧잘 사용되며 단숨에 포토샵과 함께 동인들 페인팅 툴 점유율을 양분하였다. 사이툴 역시 유료였지만 이제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으로 성장한 동인들에게 5만원대의 가격은 충분히 부담가능한 정도일 뿐만 아니라 다른 페인팅 프로그램과 비교하면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한글 패치 역시 쉽게 구할 수 있어 사용에 대한 부담 역시도 덜한 편이었다. 사이로 그린 그림들은 포토샵이나 페인터와 같은 전문가용 페인팅툴에 뒤지지 않는 퀄리티를 자랑했다. 버전 2의 런칭에 힘입어 사이툴은 지금 현재도 높은 점유율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 아성도 시간을 이기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처음 런칭된 이후 약 5년간 거의 아무것도 업데이트되지 않았을 정도로 툴 보완이 이루어지지 않았는 점이 큰 문제가 되었다. 날을 거듭할수록 PC의 성능 자체가 발전하고 디지털 환경에서의 기본적인 해상도가 높아지며 창작자가 추구하는 화상의 수준도 높아졌지만 사이툴은 이에 대한 대응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감당할 수 있는 그림의 용량은 제한적이었으며 따라서 캔버스 크기와 생성 가능한 레이어 수에도 한계가 있었다. 나아가 꼭 필요한 기능만 있는 심플한 구성 역시도 슬슬 문제가 되었다. 오캔이나 비툴 등을 거쳐온 기존의 동인들은 사실상 최소한의 기능들을 가지고 어떻게든 그럴싸하게 얼버무리는 것에 익숙해져왔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그림 실력과 테크닉의 수준이 올라간 만큼의 발전된 기능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이툴로는 도형을 그릴 수도 없고 만화의 칸을 그리기도 쉽지 않으며 캔버스의 비율을 가늠하는 기능도 없었다. 3D 오브제 활용이나 투시선 등 다양한 정보와 자료들을 고려하기 시작한 동인들의 그림 수준을 감당하기에 사이툴은 너무 빈약했던 것이다. 2014년 개발사가 부랴부랴 버그를 수정하고 나아가 64bit에 대응하는 새로운 버전까지 나왔지만 더 다양한 기능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사이툴의 전성기에 즈음하여 웹툰과 웹소설 산업, 그리고 모바일 게임 시장이 급속도로 발달하며 젊고 트렌디한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다. 이와 함께 이제 2-30대에 접어든 동인들의 많은 수가 프로로 데뷔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그림을 업으로 삼고 더 이상 보급형 타블렛이 아니라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액정 타블렛을 사용하며 안정되고 높은 퀄리티의 그림을 창작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소재’ 창작과 클립스튜디오

클립 스튜디오EX의 인터페이스

사이툴이 주춤하고 태블릿 PC 등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며서 새로운 기능들로 무장한 프로그램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파이어 알파카, 메디방 페인트 등 여러 프로그램이 각기 개성을 뽐냈고 특히 CLIP STUDIO PAINT(이하 클립 스튜디오)는 유료툴임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인기를 얻었다. 클립 스튜디오는 원래 디지털 만화 전문툴로 애용되었던 코믹 스튜디오를 개발했던 CELSYS가 그 후속으로 내놓은 복합 일러스트레이션 툴이다. 코믹 스튜디오의 기능이 흑백 출판만화에 특화되어있었다면 클립 스튜디오는 흑백만화뿐만 아니라 만화와 일러스트레이션, 3D오브제 조작 및 선화 추출, 애니메이션 제작까지 커버 가능한 다양한 기능을 갖추고 있었고 윈도우뿐만 아니라 맥과 리눅스에도 대응하는데다가 포토샵과도 잘 호환된다. 특히 강력한 만화창작 기능에 더해 채색이 가능해짐으로서 컬러 웹툰 창작에 유용한 것이 알려지자 많은 웹툰 작가 및 작가 지망생들이 클립 스튜디오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보급형인 PRO는 사이와 맞먹는 5만원대의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되며, 전문가용인 EX는 23만원 상당이기는 하지만 월 500엔(약 5000원)의 할부 시스템으로 사용 가능하다. 이러한 가격은 이제 사회인이 된 동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너무 큰 부담으로 다가오지는 않게 된 것이다. 초심자가 사용하기에는 약간 버거운 기능들도 많지만 기능의 복잡함에 비해 인터페이스가 직관적이며 이미 사이나 포토샵으로 그림 훈련을 많이 거친 창작자들로서는 적응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클립스튜디오의 인기는 풍부한 기능뿐만 아니라 서브컬쳐 동인들의 새롭고 특징적인 창작 양상을 적절하게 공략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동인 창작자 사이에서 통용되는 용어 중 하나인 ‘소재’라는 것을 먼저 설명해야겠다. 소재란 브러쉬, 패턴, 효과, 보정용 텍스쳐, 그리기 번거로운 특정 오브제의 선화, 배경 자료에 이르기까지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되거나 그림에 추가하여 완성도를 더욱 높여줄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출판 만화의 스크린톤과 유사한 것인데, 동인들은 자신이 직접 커스텀하거나 그린 소재들을 커뮤니티에 공유하고 또한 공유받아 적용하며 창작의 외연을 넓혀갔다. 일러스트 커뮤니티인 pixiv나 Deviantart에서 소재로 검색하면 수만 건에 달하는 다양한 창작 소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소재의 활발한 사용은 디지털 페인팅의 특징이기도 한데 수채화나 유화질감의 브러쉬, 컬러차트 등 직접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단순히 그림에 붙여넣기해서 그림을 보충하는 소재 이용이 보편화되면서 온전히 본인이 그린 것이 아니라 기성의 재료를 콜라주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창작물이 만들어질 수 있게 되었다. 아즈마 히로키를 굳이 빌려와 말하자면 포스트모던 서브컬쳐 문화에 있어 내러티브나 캐릭터 메이킹뿐만 아니라 화상 자체의 창작도 데이터베이스 내의 파편적 조각들을 조합하는 양상으로 이루어진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포스트모던 시대 오타쿠들의 세대적이고 집단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창작에 사용되는 프로그램 역시도 이러한 경향에 맞추어 발전하고, 이 경향을 강화시킨다.

바로 클립 스튜디오의 제작사 셀시스는 이 소재 활용 기능을 아예 프로그램에 추가하여 소재 공유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켰다. 셀시스가 제공하는 소재 공유 전용 홈페이지주5에 가면 브러쉬부터 배경자료, 컬러셋까지 유저들이 직접 공유한 다양한 소재들을 찾을 수 있다. 이를 사용하려는 유저가 로그인하여 다운로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자동으로 유저의 클립스튜디오에 이 소재가 다운되며, 다운받은 소재는 프로그램 내에서 드래그 앤 드롭으로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 기존에 공유되던 소재들은 대부분 상업적 이용이 금지되어있고 사용을 위해서는 소재집을 구매하거나 개별적인 구매가 필요했는데, 소재 페이지에 공유되는 모든 소재는 상업적 이용이 허용되어 웹툰이나 상업용 일러스트 작가들도 저작권 부담없이 사용할 수 있다. 소재의 자유로운 이용 덕에 프로에게는 그림의 완성도를 높이면서도 배경이나 소품 등에 소모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초심자들에게는 쉽게 그럴싸한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클립 스튜디오는 트렌드에 맞는 다양한 창작자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강점은 기본적인 페인트 기능이 강력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이것만으로는 클립 스튜디오의 성공을 설명하기 힘들다. 실제로 사이툴의 브러쉬 질감을 더 선호하지만 만화창작이나 효과 표현 등을 활용하기 위해 클립 스튜디오를 병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프로그램들은 나름대로 ‘한국 서브컬쳐 창작계’ 내에서 시대에 따라 큰 지분을 차지하며 사랑받아온 프로그램들이다. 그런데 활용성이 높은 포토샵은 제쳐두고라도 실제로 ‘회화’에 가까운 그림을 창작하는 데는 사이나 클립 스튜디오보다도 코렐 페인터나 아트레이지와 같은 프로그램이 더욱 효과적이다. 이러한 페인팅 프로그램의 그럴싸한 질감과 높은 표현력은 실제의 수채화나 유화 등과 거의 유사한 느낌을 주지만 이런 프로그램이 동인들에게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이들의 창작에 있어서는 그런 현실적인 표현력보다도 플랫하고 명료한 그림체, 소위 ‘아니메 스타일’의 그림에 최적화된 기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이나 클립스튜디오의 기능은 철저하게 서브컬쳐 창작자, 소위 오타쿠들에 필요와 욕구에 의해 발전한 것이다. 사용자의 성향에 따라 선호하는 SNS가 서로 다르듯 페인팅 프로그램도 또한 창작의 방향에 따라 사용하는 유저의 층이 다르며 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사용자끼리는 나름의 동질감을 가진다. 트위터 등의 커뮤니티에는 사이/클립스튜디오/포토샵의 작법이나 팁 공유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친한 동인들은 작업 화면을 공유하며 실시간으로 서로의 작업을 보고 조언을 해주는 등 친목을 다지고 그 문화를 공고히 한다.

또한 소재의 사용이 보편화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서브컬쳐 내의 창작은 창작자의 예술적 기본기나 장인과 같은 철저한 독창성을 기대하지 않는다. 특히 동인들의 주 서식처가 트위터로 바뀌며 그들의 그림들도 아카이빙 되어 보존되기보다는 인스턴트하게 소비되고 타임라인 너머로 사라지게 되며 되고, 동인들은 깊이 있고 정교한 그림보다는 트렌디하고 일단 ‘그럴싸하게 보이는’ 그림을 추구하게 된다. 투시나 원근법을, 혹은 인체 비율이나 구도를 철저하게 공부하는 대신에 소재집이나 이메레스주6를 베끼거나 따라 그리는 것이 흔한 작법이 되었고, 클립스튜디오나 이와 동세대의 새로운 디지털 페인팅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는 메디방 페인트와 파이어 알파카 역시도 하나하나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는 표현력보다는 그리기 귀찮은 부분들을 작업하는 번거로움을 최대한 줄여주고 편하게 얼버무릴 수 있는 기능들을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또 한편으로 이렇게 기성의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되어있다는 것은 그 정도로 서브컬쳐의 창작에서 상황, 체형, 자세, 구도, 배경과 소품까지도 그 창작의 베리에이션이 넓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쉽고 적극적인 창작이 가능하다는 바로 그 점이 동인들이 꾸준히 창작의 동력을 유지하고 그들의 애정과 욕망을 형태로 만들어낼 수 있게 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동인들이 사랑하는 페인팅 툴의 변화는 기술 자체의 발전이기도 하지만 그 기술을 이용하는 세대의 발전이기도 하다. 소득의 증가, 실력의 향상, 사용하는 기술의 다양화 그 모두가 프로그램의 선택에 반영된다. 프로그램 역시도 그들의 욕망에 반응하여 그들이 원하는 창작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해 그들의 목소리에 반응해 발전해간다.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새로운 창작의 개념을 탄생시키고 발전시키며 교류해왔던 이들은 또 어떤 문화를 만들어나갈 것인가.

 

주1 마우스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펜 형태의 입력장치. 마우스와는 달리 압력이나 기울기 등을 인식하여 더욱 정밀하고 실제 펜 느낌에 가까운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주2 이 글에서 다루어지는 창작자들은 편의상 그림 동인으로 칭하고 있지만 프로와 아마추어를 따지지 않고 2000년대 초기에 디지털 일러스트 프로그램으로 서브컬쳐 그림을 창작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통칭하는 엄밀하지 않은 개념이다. 이에 소위 말하는 연성러, 커뮤러, 그림러 등등의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모두 포함될 것이다. 또한 여성 동인 창작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한국 동인 시장의 성격상 여성 동인의 경험에 상당히 기반한 설명임을 미리 밝혀둔다.

주3 하지만 다른 프로그램들이 특정 시기에만 유행했던 것과는 달리 포토샵은 꾸준히 업데이트되어 최신의 기능들로 무장하고 있으며, 한번 포토샵에 익숙해진 동인들은 계속 포토샵만 사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분석을 생략하지만 포토샵은 여전히 최고의 화상 편집 및 페인팅 프로그램으로 자리하고 있다.

주4 전문적인 기능을 사용하려는 동인들은 대부분 오캔 3보다는 포토샵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가격으로 따지면 포토샵 쪽이 훨씬 비쌌지만 상대적으로 구입이 용이하고 블로그 등지에서 사용법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었으며 프로그램의 불법적 이용에 대한 인식도 저조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크랙 버전을 이용하는 경우도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주5 https://assets.clip-studio.com/ko-kr

주6 image response의 일본식 줄임말로 특정한 상황을 표현하도록 하는 제시어가 쓰여있거나, 어떤 자세나 구도를 제공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로 덮어씌워 그릴 수 있도록 만든 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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