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인용하기’에서 ‘이론-되기’로

‘비평의 위기’라고들 한다.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구태의연한 수사라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그 말에 솔깃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할지언정 ‘위기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비평의 위기’라는 수사가 거대한 것에 비해 아무런 구체적인 상황도 지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비평이 어딘가 문제가 있기는 있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비평의 위기를 주제로 오가는 여러 말을 살펴보면 그 실체는 더욱 모호해진다. 누구는 개별 전시의 비평이 적은 것이 문제라고 하고, 누구는 개별 전시의 비평이 풍부해진 것에 비해 담론이 형성되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한다. 또 누구는 기존의 딱딱한 평론 형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누구는 구조적인 글쓰기가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수많은 말들을 헤집어보아도 비평의 위기란 도대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찾기는 어렵다.

여러 말이 설왕설래하는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이론에 대한 반감이다. 지나치게 ‘이론적’이고 난해한 논문형 글에 대한 반감, 유행하는 이론을 인용하는 글에 대한 반감, 다수의 참조와 각주에 대한 반감이 지배적이다. 그들은 비평에서 이론이 과잉되었다는 것을 문제 삼고, 그것이 비평의 소통 불능을 초래했다고 본다. 그런 반감들이 왜 생겼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이론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나는 것은 미궁에 빠진 비평의 상황을 타개하기에 좋은 방안은 아닌 것 같다. 과연 그 잘못이 이론에 있는가? 그것은 이론의 잘못이 아니라 이론을 ‘인용’한 것에 잘못이 있다. 이론과 작품 각각에 대한 충분한 고찰 없이, 적당히 연관되는 이론을 가져와 붙이는 것이 문제다. 작품이 단지 이론의 예시로서 기능하거나, 이론이 두드러져서 작품이 보이지 않게 되거나, 이론이 작품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들에 비평에서 이론은 ‘인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비평 인용은 추상적인 이론 언어와 작품이 적절하게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에 대체로 이상하고, 종종 어려울 수밖에 없다.

비평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비평과 이론 사이에 다른 연결이 필요하다. 비평이 단지 이론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평 스스로 하나의 이론이 되어야 한다.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층위에 있는 이론에 구체적인 작업을 끼워 맞추는 대신에 비평에서 이론을 비평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론 과잉의 비평이 소통 불가능하다는 지적은 이론을 들어냄으로써 해결할 것이 아니라 이론을 소통 가능한 형태로 번역해야 한다. 그것은 ‘쉬운 말’로 바꿔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개별 작품과 추상적 개념 사이의 연결고리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인 것의 층위로 옮겨와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로써 비평은 실천적 영역에 밀착한 하나의 이론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평은 단지 주관적인 감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소통 가능성과 타당성을 갖고 하나의 입장이 된다.

비평의 위기는 비평이 충분히 이론적이지 않기에 일어난다. 비평이 자신의 이론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때, 많은 이들이 한편으로 우려한 담론의 부재가 극복될 수 있다. 분명한 이론적 입장을 가진 글과 글이 만나 논쟁하고, 서로의 입장을 논박하는 과정에서 담론은 형성된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가 모여 새로운 이론의 양분이 되기도 한다. 담론의 부재가 비평의 위기의 한 양상이라면, 이론을 꺼리는 것은 위기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작업, 이론, 비평은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하면서도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마주치고 교차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중 하나의 위기를 하나로 해결할 수 없으며, 그들의 부단한 상호관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총체적인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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