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를 직시하기: 〈덕후 프로젝트〉가 보고자 한 것

북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진행한 <덕후 프로젝트 : 몰입하다>는 11명의 작가들이 저마다 덕후를 주제로 수집물이나 취미 활동을 미술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일상과 서브컬쳐와 미술계을 넘나드는 작품들은 신선하고 기발한 발상과 형식을 보여주는 한편 새로운 사회 문화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고 쉽게 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국의 문화계 전반에서 덕후라는 집단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한국 미술계 곳곳에서도 서브컬쳐적 레퍼런스를 가지는 작가와 작품들이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는 상황에서 미술관이 덕후 집단에 주목하는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이번 전시는 후기자본주의 소비문화가 낳은 철없는 아이들로 여겨졌던 덕후들의 정체성을 창작성으로 재전유함으로써 이들이 가지는 긍정적인 힘에 주목한다. 하지만 이 전시가 보여주는 덕후의 스펙트럼은 좋게 말해 넓고 나쁘게 말해 애매하다. 소위 오타쿠 예술은 아니메나 게임, 가상성과 소비문화와 같은 키워드들로 주로 정의되었으나 이 전시에서 덕후라는 이름으로 포괄하는 컨텐츠는 지극히 다양하여 한두 개의 키워드로 종합하기는 쉽지 않다. 과연 <덕후 프로젝트가>가 주목하고 호명하는 덕후란 누구이며 이로써 전시는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가?

‘덕후’라는 말을 정의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사람마다 덕후로 인정하는 범위도 다르고, 그 ‘덕질’의 대상도, 내용도, 덕후라는 주체를 보는 시선도 다르다. 따라서 이 전시에서 덕후를 무엇으로 보고있느냐에 대한 물음은 전시의 성격과 목표를 파악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전시에는 더 우선해서 제기되어야 할 하나의 질문이 있다. 왜 ‘오타쿠’가 아니라 하필 ‘덕후’인가? 물론 한국 사회에서 덕후라는 말은 오타쿠에 비하면 방송에서도 쉽게 쓰여지는 대중적인 표현이 되었다. 그렇지만 ‘오타쿠’와 ‘덕후’라는 각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일상에서 엄밀하게 구분되어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4월 28일 동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연계 심포지엄 <오타쿠에서 덕후까지: 동시대 덕후문화 읽기>는 그 제목부터 오타쿠와 덕후의 구분을 요청하고 있으며, 첫 발표자였던 조홍미 역시도 이 차이를 유의미한 것으로 주목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덕후란 한국식으로 번역되어 재창조된 오타쿠이다. 일본에서 ‘오타쿠’라는 말은 처음에 사회적인 범죄와 연결되어 부정적으로 알려지고 사회적 현상으로서 다방면으로 연구되어온 반면 한국에는 그 현상의 표면적인 이미지만이 수용되어 다른 양상을 띄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오타쿠에서 오덕후, 나아가 덕후라는 어휘의 변화는 유머러스한 어감과 함께 이 집단을 친근한 이미지로 수용하게 하였으며, 이와 함께 일본 서브컬쳐에 한정되던 ‘덕질’의 대상의 범주 역시도 폭넓어졌다고 말한다. 이에는 어느 정도 세대적 편차 역시도 함축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덕후는 오타쿠와는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는 새롭고 대중적이며 ‘한국적’인 창작 및 소비 집단인 것이다. 하지만 엽기 살해 범죄자의 잔영을 지우고, 오타쿠라는 ‘일본’적인 어감과 중심 향유 대상으로서의 일본문화를 지우고, 덕후라는 귀엽고 친근하고 유머러스한 어감으로 재편하는 그 일련의 과정은 긍정적인 재전유이기도 하지만 ‘오타쿠’라는 수입된 문화의 모난 부분을 지우고 무해화하려는 시도로 보이지는 않는가? 오타쿠가 가진 부정적 함의와 문화적 이질감은 여전히 이 사회에서 온전히 인정되기 힘든 것으로 보이며, 때문에 ‘덕후’라는 새로운 집단은 심포지엄 발표자의 자의적 구분 속에 남는 정도가 아니라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정체성의 기반이 된다. 당장 “일본 하위문화를 상징하는 오타쿠에서 출발하였지만, 오늘날 ‘덕후’는 문화와 경계를 막론하고 자신의 관심분야에 시간과 경험을 즐겨이 투자하여 전문적 지식이라 실력을 축적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덕후 프로젝트의 전시 서문에서부터 ‘오타쿠’와의 결별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오타쿠를 벗어난 덕후는 어떤 존재를 말하는가?

다시금 ‘덕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야겠다. 엄밀히는 <덕후 프로젝트>가 보여주려는 덕후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에 대한 전시의 대답은 상당히 선명하다. 전시의 부제이기도 한 “몰입함”이 그것이다. 이를 반증하듯 전시된 작품의 약 반수는 덕후로서의 작가들이 개인적으로 몰입하는 취미에 대한 아카이빙의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남들이 보면 하찮고 무용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비덕’들은 기겁할 정도로 집착적으로 수집되고 기록되고 분류되어 미술의 형태로 재생산되어 전시되었다. 주목할 것은 이 작품들이 일반적으로 ‘오타쿠’가 몰입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분야라는 것이다. 오타쿠가 빠져드는 대상이 주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서브컬쳐이거나 판타지, SF 등 장르적 속성이 강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면, 진기종의 <Match the Hatch> , 박미나의 연작, 김이박의 작품들과 김성재의 <수집에서 창작으로>에서 덕질은 각기 낚시와 액세서리 수집, 식물 돌보기, 아기자기한 피규어 수집주1이라는 실상 매우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취미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덕후 프로젝트>에서 ‘덕질’의 분야는 덕후를 가르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을 추구하는 열정과 몰입이 더 중요할 따름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순수하게 추구하면서 그로부터 창작의 힘을 끌어내는 것, 전시는 그 실천적 힘에 주목한다. 하지만 이 서사는 의심스럽다. 낚시와 원예마저 덕후의 영역으로 끌어오면서 덕후의 기반이 되는 열망의 대상은 확장된다기보다는 희석되고 만다.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에 대한 질문이 누락되고 남은 무색의 몰입을 신화화하는 것은 만성적인 번아웃 신드롬에 시달리는 현재 한국 사회의 젊은 세대들에게 결여된 진취와 열정의 덕목과 맞닿는다. 이렇게 보았을 때 “오늘날의 덕후 문화가 시사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바를 인지하고 이를 위해 자기 주도적으로 몰입하는 자세가 함의하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는 전시서문의 표현은 상당히 노골적이다. 몰입하는 능동성만을 그 정체성으로 둔다면 결국 덕후라는 집단에 내재한 다른 모든 사회적 작용과 반작용은 제거되고 그 열정만을 취하는 형세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전시를 본 많은 관객들이 “나도 이런 열정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말로 전시 리뷰를 마치는 것은 무슨 함의를 가지는가?

그런데 이렇게 덕후라는 새로운 집단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덕후 프로젝트>에는 한편으로 전통적인 ‘오타쿠’적 레퍼런스를 취하는 작품들이 여전히 호출된다. 영화 <킬빌>의 장면을 재구성한 신창용의 연작과 <스타워즈>의 화면과 캐릭터들을 재조합한 이권의 <평화의 시대>, <킬라킬>과 <에반게리온> 등의 장면과 캐릭터를 차용하고 조합한 이현진의 <“이것의 나의 드릴이다”>는 오마주의 대상이 되는 서브컬쳐 컨텐츠가 명백하며, 장지우의 <지우맨 에피소드 연작> 역시도 일본 특촬물주2의 전형적 문법들을 재현하면서 오타쿠적 레퍼런스를 강하게 내보인다. 아즈마 히로키가 지적한 바 있듯이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오타쿠들의 소비와 창작은 분명한 서브컬쳐적 레퍼런스를 집단 내에서 공유하고 그 안에서 세분화된 키워드들을 복사하고 조합하고 변형하면서 이루어진다. 오타쿠적 레퍼런스를 가진 미술 작품들 역시도 기존에 존재하던 소스들, 그 캐릭터와 연출과 서사적 클리셰들을 골라내고 조합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을 따른다. 이것은 원본 소스에 대한 강한 유대와 애착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몰입이라는 키워드와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 유형들이 다만 몰입적 자아의 한 유형으로서 상술한 덕후 예술들과 동치되는 것은 적절한가? 히로키가 주목한 포스트모던의 오타쿠적 태도에 대해 오쓰카 에이지는 대안적 창작집단으로서 새로운 창작성을 추구하던 80년대의 오타쿠와는 달리 2000년대의 오타쿠는 소비하던 것이 소모되면 새로이 자신의 것을 창작해내기보다는 다른 작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쉬이 옮겨간다고 비판한다. 이것은 이 집단 내에서 창작이 아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익숙한 키워드들을 안전하게 재조합하여 사실상 서로 다를 것 없는 자가 복제적 작품들만이 재생산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소비하는 오타쿠’가 만들어내는 창작물들은 특정 페티쉬 코드를 공유한 집단 내에서만 진자운동하다 이른 수명을 마칠 뿐이며, 이런 창조성을 기반으로 한 미술적 창작물들 역시 비판적 성찰 없이 시뮬라르크를 양산하거나 아마추어리즘에 머무른다는 혐의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개별적 작품들에 간단하게 이러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나, 오타쿠계 안팎에서 이러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덕후 프로젝트>에서는 이에 대한 고민 없이 덕후적 예술이든 오타쿠적 예술이든 모든 작품들을 ‘능동적 창조성’이라는 중화된 표현으로 헐겁게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술적 공간 내에 이러한 서브컬쳐적 문법이 도입되는 것은 일견 ‘새로운’ 무언가로 비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미술관이 이것을 품음에 있어서 새롭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추적하고 고찰하지 않는다면 단지 덕후적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이질적 풍경을 구경거리로 삼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젊은 세대에게 덕후라는 말은 이미 일상어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이 말이 기존의 오타쿠들이 열중하는 분야보다 훨씬 다양하고 넓은 분야에 접목되는 것은 물론 이 전시만이 아닌 대한민국 사회 일반에서의 현상이다. 하지만 덕후 문화를 미술 속에 가져와 창조적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는 이들이 몰입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창조성과 연관시키는지에 대해 면밀히 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 <덕후 프로젝트>는 작품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기보다는 덕후라는 말만큼이나 모호한 경계 안에 자신의 작품들을 그저 끌어안고 절로 ‘힙’한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주1 피규어 수집은 사실 대표적인 ‘오타쿠’적 분야라고 부를 수 있으나 김성재의 <수집에서 창작으로>에 전시된 피규어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나 세서미 스트리트 등의 아기자기하고 대중적인 피규어를 주로 전시하고 있다. 그의 창작 피규어 역시도 서브컬쳐보다는 동화적인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주2 특수촬영물의 줄임말으로 일본 서브 컬쳐 내에서는 주로 실사로 촬영된 수퍼 히어로나 괴수 장르를 통칭하는 표현이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특촬물로는 <파워레인저>, <울트라맨>, <고질라> 등이 있다.

“덕후를 직시하기: 〈덕후 프로젝트〉가 보고자 한 것”의 한가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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