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건 사진뿐?

잘 팔리기 위해서는 잘 찍혀야 한다. 식당을 해도 ‘비주얼이 나오는’ 메뉴를 만들어야 하고, 카페를 해도 사진이 잘 나오는 셀카 스폿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메뉴부터 인테리어까지 사각형의 프레임에 최적화된 유명 ‘맛집’의 사진을 확인한 뒤에 똑같은 사진을 찍으러 간다. 과거의 사진은 순간을 기록/기념하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예컨대 졸업식을 기념하기 위해, 또는 에펠탑 관광의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때도 여행 가서 사진이나 찍는 사람들은 비난의 대상이 됐지만, 그들은 적어도 여행의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인스타그램 시대의 우리들은 무언가를 하는 모습을 찍는 것이 아니라 찍기 위해 무언가를 한다. 사진을 찍기 위해 한복을 입고 경복궁에 가고, 눈덩이 같은 빙수를 먹고, 표지가 예쁜 책을 산다. 그에 발맞춰 공간도, 음식도, 물건도 사진 찍기에 최적화된 형태로 만들어진다(잘 찍혀야 잘 팔리니까!). 사진을 찍고 올리는 행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유희가 되어서 문화를 지배한다.

정방형의 카메라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미술관은 어떨까. 시각예술은 애초에 시각적 스펙터클로 환원되기 쉽다. 시각성의 최전선에 있는 예술작품들은 그 자체로도 스펙터클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술 전시장은 사진의 소재가 되기에 더없이 적합하다. 전시장에는 작품을 찍고, 전시장 풍경을 찍고, 전시를 관람하는 자신의 모습을 찍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사진 잘 나오는 전시장으로 소문이 나면 그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도 생긴다. 어떤 미술관들은 이런 상황에 발맞춰 전략적으로 사진에 적합한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대림미술관이 전시장 중간에 포토존을 넣는 수준을 넘어서 디뮤지엄은 아예 작품 자체가 사진을 남기기에 적합하게 구성된다.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유행’하기를 노린 전시가 아닌, 의외의 전시가 인스타그램에서 인기를 끌기도 한다.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전의 최고 스타는 론 뮤익의 대형 조각이다. 한 여자가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침대에 누워있는 이 극사실주의 조각 앞에서 관객은 포즈를 따라하며 사진을 찍는다. 한편 올라퍼 엘리아슨의 <세상의 모든 가능성>이 인기를 끈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인공 강우가 만들어내는 무지개는 그 자체로도 예쁘고, 그 안에서 우산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을 찍기에도 좋다. 그 인기는 이후 pkm갤러리에서 열린 <공존을 위한 모델들>로 이어져, 삼청동 작은 골목에 있는 갤러리의 유료 전시를 많은 이들이 찾았다.

사진 출처: https://www.facebook.com/lifeplus.h/posts/1313089348807949

온통 사진 찍는 세상이 되었는데, 그래도 미술관에서는 귀한 작품을 눈으로 감상하면서 작품과 ‘직접 만나는 경험’을 하라고 고지식하게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미술도 모르면서’ 사진이나 찍으러 온다고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미술관이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유명세를 타고, 그렇게 방문한 관객이 미술관에서 어떤 ‘재미’를 느끼고, 꾸준히 미술관을 찾게 된다면 그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사진이라는 유형의 물질을 남기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움과 만족감을 준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지면’ 그날은 어쩐지 성공한 하루로 기억된다. 나아가 SNS에서 올려서 좋아요와 댓글도 주고받는다면 더욱 완벽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사진의 재미와 만족감은 목적이 되는 활동의 그것을 압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진 찍기의 놀라운 속성은 본래의 활동보다 더 큰 재미를 가져다줌으로써 그 활동을 잊게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화려한 메뉴의 음식 앞에서 만족스러운 사진을 남기면, 그 음식의 맛과 그 자체의 즐거움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미술관에서 예쁜 사진을 남겨 간직할 때, 그의 만족감은 사진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눈앞의 미술작품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다. 만족스런 사진이 나올 때까지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뒤에서 작품은 단지 카메라의 배경으로 전락하고 만다.

SNS에서 뜨는 식당들이 늘어나면서, 사진으로 입소문이 날 것을 노리고 문을 여는 식당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들은 정방형의 카메라에 적합하게 메뉴를 만들고, 인테리어를 꾸며서 졸속으로 가게를 차린다. 주로 맛의 평가가 애매한 00 가정식, 숙련된 기술을 요하지 않는 브런치 가게, 정통과는 거리가 먼 파스타 가게가 생겨난다. 그러다 보니 홍콩 영화의 이름을 따왔지만, 영화 속 경양식집 인테리어를 흉내내고, 태국음식을 파는 식당이 등장하기도 한다. 속은 제대로 채우지 못한 채, 표피만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미술이 장사도 아닌데 미술도 그렇게 되리라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움직임들, 카메라에 적합하기 위해 조금씩 변화하는 전시장의 움직임들은 분명 심상치 않다. 관객들이 미술을 그저 인스타그램용 사진의 배경으로만 생각하는 데 미술이 알게 모르게 일조한다면, 그렇다면 기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진에 잘 찍히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작업들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은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모든 것이 잘 찍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시대에, 어떻게 찍어도 사진이 잘 나오지 않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인스타-스펙터클의 시대를 거스르는 미술을 상상해 본다.

“남는 건 사진뿐?”의 4개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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