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도대체) 무엇이 플랫할까? (1)

김뺘뺘는 최근 ‘서울루나포토페스티벌’의 ‘Chat’ 프로그램에서 한 시간 가량 토크를 진행했다. 본래는 미술 관련 텍스트를 번역할 때 자주 등장하지만 다소 난감했던 단어들—특히 surface, plane, flatness, 혹은 “평면 작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계획이었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유행어처럼 반복되는 이 단어에 대한 막연한 반감(“그래서 도대체 뭐가 플랫하다는 거야?”)이 앞섰던 것이 사실인데, 준비를 하다 보니 미술사 및 이론적 맥락부터 동시대 한국(서울)의 미술계에서 어렴풋하게 잡히는 분위기 같은 것까지 조금씩 건드리게 되었고, 결국 꽤나 거창한 제목과 개요를 달게 되었다.[1] 한정된 시간 내에 이를 모두 소화하려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토크는 김뺘뺘에게, 그리고 고맙게도 찾아와 주신 많은 관객분들께 아쉬움을 남겼다. 이에 토크를 준비하면서 펼쳐보았던 생각들을 Yellow Pen Club에서 차분히 풀어가기로 했다. 김뺘뺘는 남은 2017년동안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 플랫할까”를 두 어 차례에 걸쳐 연재하기로 한다. 첫 번째 글은 이야기의 단초가 되는 이론을 정리하고 화두를 던지는 데 할애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flat’한 이미지 소비 및 유통 환경과 이를 체화한 플레이어들(관객, 작가, 기획자 등)의 활동-창작 및 이를 매개하는 행위 전반-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서울-미술의 행위자들의 (작업) 언어와 전략들이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필터링/농축/피드백 하는지를 ‘flat’의 관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미리 양해를 구한다.)

물론 누군가에겐 이 이야기가 너무 늦었거나 뻔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고, 그저 낯설거나 전혀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미술계 전반을 아우르는 일반론을 세우겠다는 야심보다 꽤 좁은 범위에서 어떤 현상을 보다 선명하게 납득하고자 하는 내적인 필요성에서부터 시작된 것에 가깝다. 그리고 김뺘뺘가 이제까지 써온 리뷰들을 돌아보면서 어떤 작업 혹은 언어에 흥미를 느껴왔는가를 역추적하는 과정도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지극히 주관적인 측면도 있다. 못내 변명을 해대지만 아무튼 덧붙여질 이야기들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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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도대체) 무엇이 플랫할까 (1) 밑그림 그리기: 서울-플랫을 더듬어보며

 

1. 들어가며

이 글은 지난 몇 년간 서울-미술 현장에서 김뺘뺘가 체감한 기묘한 기류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실체를 결여한 어떤 느낌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우리가 숨쉬는 미세먼지와 같이 불가피하게 들이키고 있는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막연함을 견디지 못해 구체적인 출발점을 찾는다면, “flat”이라는 단어에서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Flat”은 지난 몇 년 동안 서울-미술(계)에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거론되면서 여러 연관어들—평면성, 납작함, 표면 등—을 아우르는 복잡한 네트워크로 증식해갔다. 개념-화폐처럼 운용되기도 하고 기술적인 언어로 동원되기도 했던 이 단어는 (서울의 거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마치 계보의 그림자는 이미 성공적으로 떨구어 버렸다는 듯이 재빠르게 변이했다. 이제는 무언가를 ‘플랫’하다고 기술한들[2]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거대한 빈칸이 되어버린 이 단어는 경계가 터져버려서 그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어떤 차원에서는 특수하고 흥미로운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 플랫할까?”는 최종적으로 서울-미술에서 플랫함이 교환되는 양식, 즉 서울-플랫이라 말해볼 수 있는 어떤 지점으로 가 닿으려 한다. 애초에 체계적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니 어디서든지 시작을 할 수 있다면 그만이다. 하지만 어쩌다 “flat”이 미술과 인접하여 이렇게 방대한 의미망을 갖추게 되었는지는 서구 미술사 및 담론의 맥락에서 획득한 함의들을 경유하지 않고는 진입하기 어렵다. 그러니 기왕이면 가장 뻔한 좌표지점을 입구로 삼아보자.

 

2.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F – 물질성과 멘탈리티

“flatness”(이하 “F”)를 미술사에 가장 강렬하게 새겨 넣은 이는 아마 그린버그일 것이다. 물론 회화는 언제나 깊이를 덜어내거나 더하는 역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만 그린버그는 나아가 F를 회화의 고유한 특징이자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규정했다. 때문에 미술의 맥락에서 F가 거론될 때는 회화의 지지체인 캔버스의 납작함, 즉 물리적인 속성으로서의 평면성으로 대변되는 그린버그식 모더니즘의 함의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3]

하지만 F는 모더니즘의 전유물로 머물지 않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속성과 연결된다. 미술사적 맥락에서 F에 천착했던 이론가들이 주목했듯이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및 미술을 규명하면서 F를 그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는다.[4] 그런데 이때 F는 단지 물리적인 속성으로 제한되지 않고 배후에 있는 의미의 상실, 혹은 새로운 피상성으로 요약될 수 있는 어떤 멘탈리티를 표방한다. 표면 자체에 대한 관심은 미술사 전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어 왔지만 제임슨은 20세기 후반 들어 표면 자체가 그 배후의 본질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는 점을 포착하고자 했다. 제임슨이 파악한 포스트모던즘적 상실은 변증법적, 존재론적, 해석학적, 정신분석학적, 기호학적으로 부과된 의미가 상실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 의미화 모델들은 공통적으로 표면과 심층의 이중 구조를 전제로 하고 전자를 후자에 대한 표현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무심코 하는 동작들(표면)은 심리적인 상태(심층)에 대한 증상이며, 기호(표면)는 발신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적 개념(심층)을 드러낸다는 식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국면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차원 그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 될 뿐 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깊이를 탐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F는 그린버그식 모더니즘과 제임슨식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로지르며 물질적 차원과 멘탈리티의 차원이 혼재된 계보를 따라 용례들을 축적해왔다. 그러니 일상적인 용례에서 “플랫하다”는 술어가 물리적 특성에 대한 기술과 가치 평가의 함의를 왕복하며 혼재된 양상을 보이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여기에 미술이 사회에 개입하는 언어 혹은 전략의 맥락까지 더해지면서 혼란이 가중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죠슬릿은 제임슨의 포스트모던적 F를 시각문화 내에서 진행된 스테레오 타입의 놀이와 전복과 연결 지어 이해하면서 F의 계보를 써 내려간다. 죠슬릿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매스 미디어를 통해 확산되는 규범과 스테리오타입, 즉 표면적인 요소들을 반복하고 재전유함으로써 그 실체를 폭로하고 기반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F를 플레이하는 전략은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죠슬릿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비본질주의적 주체 모델을 끌어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복적 전략의 유효성을 뒷받침 하는데, 이들에 의하면 정체성이란 순전히 가변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정체성은 특정한 본질으로써 규정될 수 없고, 오히려 유동적인 상황 속에서 공존하는 입장들이 서로 교섭하면서 발생하는 것이다. 필연성(깊이)이 아니라 차이(differential/깊이-없음)로 인해 정체성이 발생한다면, 가변적인 상황에서 표면을 다루는 것(a play of surfaces)은 곧 정체성을 새로이 구축하는 역동이자 전복의 전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또 다른 포스트모던적 준거로서의 히로키-플랫

이와 같은 논의는 F가 연루된 미술사적 맥락을 파악하기 위한 참조점이 되어 준다는 점에서는 유용하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적 F가 주체의 가변적 구성을 경유한 일종의 전위적인 시도라는 점은 현 시점에서 얼마나 유효한가? 표면의 유희가 궁극적으로 전복적인 전략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납작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전복을 성취해야 할 과제(pro-ject)로 설정하는 움직임은 되려 거대서사와 친연성을 지니지 않는가? 포스트모더니즘-플랫은 결국 지배적인 이미지의 경제를 뒤집어야 한다는 (부단히 정치적인) 사명감과 더불어 목적론적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깊이’를 끌어 안고는 ‘깊이 있는 피상성’과 같은 형용모순을 배태한다. 어쩌면 F는 일종의 깊이-없음의 부정형으로 이해되고 어떤 방식으로든 깊이를 보완해줌으로써 극복해야할 것으로 상정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편 아즈마 히로키의 포스트모던론은 보다 과격한 F를 상정한다. 히로키는 서브컬처의 이미지 생산 및 2차 창작의 양상을 분석하며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른 준거점을 제시한다.[5] 히로키에 의하면 동시대 서브컬처는 더 이상 포괄적인 세계관을 근간으로 한 개별적인 사례들로 파생해내지 않고, 데이터베이스로 구성된 거대한 비-이야기(심층)로부터 모에 요소들을 조합함으로써 작은 이야기들(표층)을 생산해내는 유희의 이중주로 구조화되어 있다. 진짜와 가짜가 더 이상 구별되지 않고 동일한 차원에서 뒤섞여 있는 심상을 그린 서구의 시뮬라크르 개념과 달리 히로키는 2차 창작의 원리를 심층과 표층의 분명한 구별을 전제로 한 이중 구조로 구체화한다. 다만 이때 심층이란 더 이상 표층을 통제하거나 의미를 부여해주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깊이를 상실한다. 그런데 포스트모던적 주체들은 거대 서사의 상실을 보완하기 위한 이야기를 날조하거나 이를 전위적인 돌파구로 삼으려 시도하지 않는다.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은 원본을 해킹해서 모에 요소들로 파편화하고, 이 파편들의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재전유가 아닌) 재조합을 통해 시뮬라크라를 거듭 생산해낸다. 이처럼 히로키의 포스트모던적 주체들은 표층의 작은 이야기들이 배후에는 이를 정당화해줄 거대 서사가 부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말해 그것들이 모에 요소의 적절한 조합으로 적당히 감동할 만하게 구축된 ‘가짜’라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기꺼이 마음을 쓴다. 그리고는 눈물을 닦고 시스템에 침투해 구성 요소들을 추출한 뒤 2차 창작을 꾀한다. 포스트-거대 서사형 인간들은 스스로가 꽤나 쓸모 없는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실질적인 가치와 형식적인 가치를 철저히 분리해서 소비하는 데에 최적화 되어 있는 분열적인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주체들은 라클로우와 무페가 제시한, 즉 사회적 규범을 파악하고 전위적인 반격을 가하며 능동적으로 자아를 형성해가는 주체와는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 ‘진짜’ 세계로 돌아와 이를 어떤 준거에 의거하여 판단하고 교정할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진짜-세계란 이미 거대 서사의 몰락과 함께 소멸되었고 2차 창작의 가짜-세계는 결코 그 대체제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그들 수중에 있는 것은 웃고 울게 만드는 스위치들을 달아 놓은 유형적 이야기들, 세계관을 전제로 하지 않은 설정들의 조합, 그리고 근본적인 차별점들이 아니라 사소한 설정의 차이들로 구별 가능한 표현 양식들만이 남아 있다.

 

4. 그렇다면 서울-플랫은…

이제 서울로 돌아와서 생각해보자. “Flat”이라는 단어가 미술사에서 어떻게 맥락화 되었는지를 추적하다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모던), 그리고 스테리오타입과 모에 등의 일련의 이론적 지지체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차고 나가며 추진력을 얻어야 할 발판 그 이상이 되기는 어렵다. 스테레오타입의 전복적 전략을 강조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 미술사적인 양식의 하나로 유효하다고 하더라도(여기에도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무엇보다 동시대적 멘탈리티와 호환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 우선 스테리오타입을 가지고 놀기 위해서는 불특정 다수가 디폴트 상태라고 인정하는 규범들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동시대 서울-미술의 기류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불신 혹은 무관심이 짙게 드리워 있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이든 한 사람의 자아이든 잘게 쪼개져 분열되어 있는 상황에 대한 민감성이 더 높아서 굳이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인식을 불러올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 가공된 스테레오타입을 구성해내고 이를 다루고자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날조된 것이기에 그 표면들을 ‘play’한들 자신의 꼬리를 물고 공회전 할 위험이 농후하다. (물론 이처럼 공회전하는 수밖에 없다는 점을 메타적으로 드러내는 전략은 가능하지 모른다.)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복’에는 조슬릿이 제시한 것과 같이 주체가 비본질주의적이고 가변적으로 구성된다는 것 외에도 그 주체가 (정치적으로) 유능하다는, 아니면 적어도 유능하다고 스스로 믿어야 한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두 번째 전제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동시대 서울-미술의 경향은 거시적 차원에서 유형화 된 요소들을 재생산의 재료로 삼기보다 스스로의 상황을 더 조밀하게 포 뜨는 데에 (때로는 자폐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보다 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미지 자체에 천착하고 이를 뒤집으려는 시도보다는 스스로의 맥락에서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입구를 찾으며 그 와중에 발견하게 되는 매개물들을 (때로는 피상적으로) 활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히로키가 서술한 포스트모던 또한 동시대 서울-미술과 오차 없이 나란히 두기는 어렵다. 물론 히로키는 거대 서사와 같이 표층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종류의 심층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임슨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선상에 있다. 하지만 데이터베이스와 시뮬라크르(2차 창작)의 이중 구조는 전위적 차원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근대와 달리 포스트모던의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는 심층을 어떻게 읽어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시뮬라크르의 차원이 창출되지만 이는 라클라우와 무페가 암시하는 것과 같은 자아의 주체적인 형성과는 거리가 멀다. 배후의 메시지에 무심하고, 그것과 무관하게 모에의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추출된 설정과 캐릭터만을 소비하는 초평면적 세계. 이러한 관점을 곧바로 지금 이곳에 이식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너무 과격하게 깊이를 결여한 나머지 거부감을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환경 자체가 그러한 병렬적 구조를 확보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가적 이데올로기나 가부장제와 같은 거대 서사의 근간이 흔들리고 이에 대한 신화는 벗겨졌을지언정 완전히 폐기되지 못하고 그 사체들이 도처에 트랩처럼 널려 있다. 그러니 굳이 정치적, 더 정확히는 전복적인 효과를 낼 의도가 없더라도 납작한 유희의 공간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창작자들이 가벼워지고 플랫해지고 싶다 한들 이들이 처한 시공간이 활동과 작업의 함의를 단지 유희적인 것으로 두지 않는다. 목적 없이 노는 것조차 정당화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시공을 잘게 쪼개서 자기검열 하는 감각이 기본 설정인 곳에서 유희적인 몰두는 막대한 자원을 투자하고 치열하게 싸워도 획득할까말까 한 신기루 같은 것이다.

서울은 플랫해서 슬프고 한스럽다. 900원짜리 아메리카노에 800원짜리 핑크빛 마카롱을 곁들여 산책을 하면서 미세먼지를 한바탕 뒤집어쓰면 그저 애환이 밀려든다. 기괴하면서도 기발한 태극기 패션과 생존형 농성 텐트를 지날 때마다 느끼는, 어딘가 한 구석이 쓸려 무너져 버리는 심상은 가시지 않는다. 평소보다 약간 비싼 저녁을 사 먹으며 그것이 “YOLO” 라이프 스타일이라며, 혹은 가성비는 괜찮았다며 분수없는 지출을 정당화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프레임이 여럿으로 갈라진 K-POP 아이돌 뮤직비디오 리액션 클립을 수없이 돌려본다. 충분한 정도의 복잡성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들, 원본과 출처에 대한 접근은 요원한 채 그저 스킨만 본뜬 세트장을 거니는 것 같다는 인상, 나의 욕망과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도시의 표면이 급속도로 회전/교체된다는 감각. 이러한 것들은 아무리 납작하게 구겨버리려 해도 피상성의 세계를 뚫고 구체화된 행태로 몸을 엄습한다. 그렇다면 급속도로 변화된 네트워크 환경에 최적화된 몸을 입고 기동성을 발휘하는 건 어떨까? 유년기에 PC를 접하고, 각종 서브컬쳐에 노출되었으며, 성인기에 접어들어서는 아이폰을 손에 쥐고 일련의 변화들을 몸소 체험한 과도기적 존재들은 그러나 끊임없이 버퍼링에 시달리고, 확장자를 바꿀 때마다 열화된 데이터를 복구하느라 애를 먹는다. 데이터를 입력하여 렌더링한 세계 속 유닛으로 휘발해 버릴 수 없는 개인들은 불능감에 시달리거나 거대한 실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성장 서사가 멸종 되어 업그레이드를 위한 각종 매뉴얼들, 가령 유학을 비롯한 학력 신장이나 운명공동체에 귀속되기와 같은 것들이 더 이상 돌파구가 될 거라고 믿을 수 없는[6] 한편 독창성에 대한 신화 또한 몰락하여 전혀 새로운 것을 들고 나타나겠다고 객기를 부리지도 못한다. 어째 어글리하고 유통기한이 지난 아이템만 잔뜩 물려받고는 새로 시작할 수도, 어떤 계보에 소속되기도 애매하다는 배은망덕한 사태 파악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감각에 접속되지 않은 이들에게 80년대생 창작자란 최종적 목적이나 고양된 가치가 결여된 것들을 즐기고 자신의 활동이 큰 맥락이나 조류에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나 욕망이 없는 ‘납작한’ 존재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 전복적 전략도 시뮬라크르적인 유희도 선택지에 없는 상황에서 이들은 그저 끼이고 찡겨서 납작해진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러한 조건적 납작함이 세대적 자조 혹은 분열된 자아에 대한 자기 연만을 긍정하는 알리바이가 될 수는 없다. 다만 서울-플랫의 특수한 조건들을 고려했을 때 비로소 동시대 미술 실천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나 게으른 몰이해를 비껴갈 여지가 생겨난다. 물론 서울-플랫이라는 것이 명시적으로 규명되고 미술 작업이 이에 대한 삽화로 들러붙는 모델은 상상할 수 없으므로 구체적인 사례를 더듬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어서 때로는 플랫해진 시각장을 파악하고 반응하는 데에 천착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울-플랫에 깊이를 더하지는 않되 그 부피를 키우고 간격을 확보하면서 사태를 정확히 파악할 시간을 벌기도 하는 움직임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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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지원,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 플랫할까,” 2017 서울루나포토 (http://www.seoullunarphoto.com/chat_01/)

[2] 가령 “그 전시 참 플랫했어,” “이 디자인은 정말 플랫해,” “지금 상황이 너무 플랫하다” 등 좋았다는 건지 싫었다는 건지 쉽게 종잡을 수 없는 아무 말들.

[3] 이와 같은 서술은 그린버그의 논의를 필요에 따라 과감하게 생략, 요약한 것이다. 그린버그의 평면성이 단지 물리적 측면에만 귀속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크라우스는 그린버그의 평면성이 실증주의적인 차원에 제한되어 있다고 비판한 반면 죠슬릿은 그린버그의 평면성이 실은 작가의 몸과 무의식의 차원을 담고 있다며 그린버그플랫에 모종의 깊이를 더해주는 방식으로 보완한다. (참고: Rosalind Krauss, Under Blue Cup, The MIT Press, 2011; David Joselit, “Notes on Surface: toward a genealogy of flatness,” Art History Volume 23, March 2000, pp. 19-34)

[4] 참고: David Joselit, “Notes on Surface: toward a genealogy of flatness”; Timotheus Vermeulen, “The New ‘Depthiness,’” e-flux journal, #61, January 2015.

[5]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동네, 2007.

[6] 물론 이 믿음은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기금을 받고 국공립 기관이나 갤러리의 초청을 받아 전시를 하는 등의 활동 자체는 지속된다. 다만 그것이 미술 씬 안에서의 선형적인 성장 서사를 구성하는지 혹은 순간적인 소비를 원동력 삼은 생존에 가까운지 혹은 이것도 저것도 아닐지에 대한 보다 섬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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