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Tables〉: 채석장과 컨베이어벨트

이상훈 개인전 <Two Tables> (313 art project, 2017.10.12.-11.4.)

한적한 성북동의 가옥집을 개조한 전시장에는 서사성의 편린조차 배제된 기계적인 회화들이 강한 존재감을 내세운다. “그리기의 체계를 연구하는 작가”라는 표현에 들어맞게도 이상훈의 그림들은 회화에 조합된 질료들의 물질성도, 회화적 구성이 보여주는 환영도 최대한 배제시키고 점, 선, 면, 색과 같은 이차원 조형을 구성하는 원개념들의 조합을 보인다. 그의 ‘채석장’에서 이루어지는 채굴은 한 화면 상에서 화합하는 통일된 이미지를 내보기기보다는 회화라는 결과값의 공식을 이루는 체계와 재료들을 분절하여 펼쳐놓은 도면의 역할을 한다. 질료적 실험을 내세우는 회화는 다양하게 존재해왔다. 그러나 공간 313에서 선보인 <Two Tables>전에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압박감이 감돌았다.

회색의 직사각형 위에 더 옅은 회색의 정삼각형, 연청색 배경에 그려진 색면은 언뜻 보기에는 집을 연상시키고, 그 안을 원색의 그물이 뻗어나간다. 물론 뻗어나간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색면 옆에 나열된 다음 색면 위에 더 긴 선이, 혹은 다른 색의 선이 추가되어 그려져 있는 것이 마치 애니메이션의 한 프레임으로 보일 뿐이다. 정확한 박자로 나름의 규칙성을 가지고 변격해가는 수십 개의 ‘집’들은 그 안팎으로 색과 선과 면과 무늬가 변동되며 긴 행렬을 이룬다. 원형적 도형 및 색으로 그려진 색면들이 나열되고 변격하는 캔버스는 이러한 각각의 조형적 요소가 회화 이미지를 구성하는 과정을 양화하여 분절적으로 계측하고 기록한다. 엄밀하게 나뉘는 색면의 경계와 정확한 박자로 나열된 이미지는 아날로그 공간에 디지털의 환영을 불러온다.

한편으로 그의 캔버스는 색 조합의 기반이 되는 일차색(빨강, 노랑, 파랑, 하양, 검정)의 안료와 그 이차색으로만 구성되며 색 체계의 원형적 구조를 탐구한다. 회화를 그리는데 있어 색의 배합과 도출은 일종의 수식화된 공식을 거치는데, <Y test>는 이러한 색조합의 공식을 더욱 직관적인 도식으로 표현한다. 같은 도형으로 그려진 색이 만나면, 예를 들어 삼원색에 속하는 빨간색과 노랑색이 연결되면 그 이차색인 오렌지색이 되며, 이 오렌지색과 나머지 삼원색인 파란색이 연결되면 검정색이 도출된다. 부정할 여지없는 명료한 체계로 보이지만 실제로 이것은 허위이다. 삼원색인 빨강, 노랑, 파랑을 1:1:1로 혼합하면 검정이 된다는 것은 절대적 법칙으로 인식되는 익숙한 공식이지만, 실제의 염료 PR과 PY와 PB를 섞으면 어두운 갈회색이 될 뿐 완전한 PBk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관념적 색체계는 실제의 색 스펙트럼을 분절적으로 개념화한 일종의 수량화의 결과물이며 <Y test>의 캔버스에 표현된 것은 실제의 색안료들의 조합이 아닌 색상이라는 이념을 바탕으로한 기댓값일 뿐이다.

이러한 철저한 체계화는 회화의 내적 구성뿐만 아니라 이를 이루는 질료적 측면에서도 이루어진다. 회화의 표면은 가히 편집증적으로 매끈하게 구현되어 붓 터치는커녕 물감이 자연스럽게 마른 균열조차 보이지 않는다. 철저한 계측 하에 짜여지고 크기별로 줄 세워 걸린 캔버스는 그 프레임에 박힌 못의 간격까지도 강박적으로 균일하여 마치 공산품을 보는듯하다. 이로써 작가의 창조적 터치 대신 기계적인 단순 작업 노동의 영상이 자리하며, 실제로는 집착적인 계산과 컨트롤에 의해 채워졌을 평면은 오히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비예술적 화면으로 화한다.

채석장이라는 작가의 표현은 이 지점에서 의문을 불러온다. 작가가 다루고자 하는 원재료란 채석장에서 막 채굴된 자연 그대로의 원석이 아닌 개념과 체계에 의해 분절되고 재단되고 가공된 이후의 그것이다. 현상을 다듬어서 만들어진 개념체계는 역설적으로 질료에 선험적 속성으로 부여되고 나아가 질료를 속성 그 자체로 만든다. 철저하게 인공적인 절삭과 접합을 거쳐 어떤 유격도 허용하지 않는 캔버스의 표면은 채석장의 작업대라기보다는 매뉴팩쳐 생산라인의 조립대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보인다. 매뉴팩쳐 컨베이어벨트가 근대적 생산체계의 표상이라고 한다면 그 뒤에 아른거리는 것은 강하고 오만한 이성 주체의 그림자다. 전시장을 감돌던 압박감의 정체는 아마도 그 모든 것을 철저한 컨트롤 아래 두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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