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에 대하여

국공립 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미술 공간에서 진행하는 ‘토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매 주말(=수, 목, 금, 토, 일)마다 서울 곳곳에서 다양한 토크들이 열린다. 전시를 열면 당연히 연계 프로그램으로 토크가 따라붙고, 전시가 없더라도 미술 공간에서는 토크를 기획하고 진행한다. 언제부터 미술에 대한 ‘말’과 이를 담는 이벤트가 필수적인 것이 되다시피 많아진걸까? 이 문제에 타당한 계보를 구성하여 대답하려면 미술관의 역할에 대한 인식 변화, 혹은 동시대 큐레이토리얼 담론이 겪은 (서구에서는 흔히 ‘educational turn’이라 부르는) 전환 등을 망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토크에 대하여”는 그런 과업을 달성하려는 텍스트는 아니다. 지난 몇 년동안 적지도 많지도 않은 수의 토크를 다니며 얻은 단편적인 인상들을 모아 그 시간들은 무엇이었는지, 그러니까 도대체 토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를 생각해보았다.

 

→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시는지…”

 

일반적으로 토크는 전시보다 짧은 시간(보통 2시간 내외) 동안 이루어지며, 별도의 장치를 활용하지 않는 한 그 자리에서 공유된 내용은 신속하게 흩어진다. 때문에 관객은 특정한 시공간에 마치 약속을 지키듯 도착해야만 하고, 그 시간 그 곳에 한정된 내용을 접하게 된다. 토크 일정을 확인하고, 캘린더에 표시하고, 늦지 않게 찾아가서, 이야기를 들으며 인상 깊었던 내용들을 받아적어 오는 일련의 활동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보통 관객은 전시를 본 후 흥미롭다고 판단하거나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토크를 찾아가기 때문에 작가나 기획자와의 만남 자체가 즐거운 일이 되기도 한다. 조금은 어수선한 시작, 등받이가 없는 흰 간이의자, 가끔 무료로 제공되는 다과와 커피, 소스 이미지와 영상들…

 

→ “저는 이 토크가 단지 이 전시에 대한 이야기로 한정되기보다 더 넓은… 동시대 미술계의 현안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었으면 좋겠거든요. 자, 이제 패널분들이 이 주제에 대해서 한 마디씩 해보시면 되겠네요.”

 

이 글을 쓰기 위해 이제까지 참석했던 토크들을 떠올려보면 그날 그곳에서 전달된 내용보다 분위기가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끔찍하게 더운 날이었다든지, 사람이 너무 적게 와서 내가 꼭 질문을 해야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달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발표’의 내용이 떠오른다기보다 다소 주변적인 요소들이 먼저 생각난다. 가령 모더레이터와 작가가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가 떠오르기보다 그 둘의 사이가 딱히 좋아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더 강렬하게 기억나고, 어떤 작업에 대한 설명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인상 깊었던 짤막한 표현 같은 것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이렇게 토크는 언어활동이지만 글과 달리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현장으로 가지고 오기 때문에 각 대담자의 캐릭터와 이들 간의 케미, 주최측과 관객의 (때로는 상충되는) 기대, 흥망 여부에 따른 분위기 같은 비언어적인 정보가 더 손쉽게 공유된다. 다시 말해 토크는 (특히 설정된 의도가 전시나 작업에 대한 해설이라면) 기획 의도를 보란듯이 배신하는 관객들이 차려 놓은 상에는 손을 안대고 전혀 엉뚱한 것들만 잔뜩 머리에 담아가게 되는 기묘한 사건이다.

 

→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두 분 중에 한 분의 이름이 더 두드러지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해외에서도 성공한 작가로서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미술계는 말도 안되게 열려 있는 곳이에요. 나같은 바보도 받아주고! 그러니 학위도 뭐도 필요없고 나를 믿어줄 단 한 사람만 있으면 작가로 성공할 수 있답니다.” “아닙니다, 학위는 필요합니다, 우리처럼 되면 안되니까요!” “저희는 죽었다 생각하고 맘대로 하시면 됩니다.”

 

다시 말해, 토크는 전시나 작업에 대한 명시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효율적인 매체로 작동하는 경우가 드물다. 사실 1-2시간 만에 집약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특수한 스킬과 전략을 요하는 것이다. 때문에 작정하고 준비하지 않는 이상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특정한 컨텐츠를 전달하는 상황을 상정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모델은 삐걱이게 마련이다. 물론 토크가 반드시 정보 전달을 목표로 두어야 하며, 이를 성취하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모든 토크가 나름의 의미에서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각 관객의 상이한 기대치와 대응해야 하고 특정한 시공간과 결부된 맥락들이 중첩되어 작동하는 토크들에 일관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성공의 비결, 혹은 실패의 원인 같은 것은 규명하기 쉽지 않다.

 

→ “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나 디스크립션을 쓸 때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본인이 작업을 통해서 ‘한’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써내려가는 거에요. 하고 싶은 거 말고 한 거만 쓰시면 될 거 같네요.”

 

하지만 성공적이지 못한 토크의 전형은 있게 마련이다.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실패한 토크의 유형은 준비되지 않은 토크이다. 이는 곧 토크의 특징적인 속성과 맞물리기 때문에 더욱 주목해 볼만 하다. 시간을 두고 곱씹으면서 전개하는 글과 달리 말은 그 자리와 시간을 채우고는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서는  (정반대의 경우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보다 더 가볍고 쉬운 것이 된다. 때에 따라 이 특징은 사전에 준비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알리바이가 되고 만다. 느낌으로 대담자를 결정하고, 대략 패널이 구성되면 그 이후로는 내용을 ‘느슨하게’ 준비하기로 한 후 현장에서 ‘상황 봐서’ 토크를 진행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충대충의 습성은 토크의 핵심을 ‘즉흥성(으로 둔갑한 미진함)’에 두는 함정과도 결을 나란히 한다. 미리 스크립트를 준비하거나 사전 조율을 타이트 하게 한다면 즉흥성과 현장성이 희생 당하게 되므로 사전 준비를 ‘못’한다기보다 ‘안’하는 것이라며 주최측 스스로와 관객 모두를 기만하는 것이다. 물론 즉흥성이 토크 전반에 긍정적인 역동을 만들거나 이정표와 같은 위치로 끌어올릴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주로 치밀한 준비 끝에 마련된 다분히 특수한 맥락 위에 토크가 얹히고, 각 참여자가 스스로의 역할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밀도 있는 논쟁을 감당해낼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될 때 비로소 일어난다. 기적을 노리는 것이 요원하다면 최악은 피해야할진데, 최악의 토크는 단연 즉흥성을 표방하되 성의 없는 타입케스팅이나 물량 공세로 패널을 구성한 뒤 개연성을 찾아볼 수 없는 거시적인 주제를 다루고자 하는,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주최측의 투명한 욕망만이 유일한 정보가 되고 마는 종류의 토크일 것이다. 이런 세팅에서 간혹 패널들의 합이 잘 맞거나 특정 개인이 역량을 발휘하여 생산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경우는 있으나, 이를 기대하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일이다.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준비된 내용은 빨리 동날 터이고 얼마 안 가 관객에게 마이크를 넘기게 될 것이다. 여러분, 질문 없으세요?

 

→ “요즘 작가들이 상황이 어렵다보니 주변이 있는 재료들을 가져다가 쓰잖아요. 재료비 얼마 안 드는 것들 위주로…” “ㅇ.ㅇ??”

 

한국 사회는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또 정확하게 개입하는 관객을 길러내는 데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질문의 시간은 바보 될까봐 나서기를 두려워 하는 사람들의 어색한 침묵과 질문할 기회를 자신의 단독 토크 타임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한 자들이 쏟아내는 의문문 형식의 과시용 멘트를로 채워진다.

 

→ “언어화 될 수 없는 무언가를 하는 거 다 좋은데 어쨌든 언어화를 하려고 해야 되지 않겠어요? 모모 작가는 솰라솰라 작가를 한번 참고해 보아요. 큰 도움이 될 거야.”

 

문제는 이런 일이 대다수의 토크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위의 내용은 몇몇의 사례에 대한 서술이기보다 내가 경험한 토크 전반을 요약한 것에 오히려 가깝다. 어쩌면 토크라는 사건을 유효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라 그 자체로 전문 영역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토크가 일어나게 될 시공간적 특수성, 연계된 전시나 프로젝트의 핵심, 관객층의 구성 및 기대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목표 지점을 설정하여 패널을 구성하고 환경을 조성하는 등의 사전 준비를 진행하는 담당자를 상상해본다. 하지만 새로운 종류의 전문인은 고사하고 이미 존재하는 영역들에 대한 전문성에 대한 존중도 옅은 상황을 생각한다면 요원한 가능성으로 느껴질 뿐이다. 아마 앞으로 쏟아질 수많은 토크들은 견딜 수 없을만큼 피상적이고, 미진하고, 불만족스러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토크를 이제 가지 말아야 할까?

 

→ “네네, 제가 외람되게 선생님의 말씀에 반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렇지만은 제 생각에는 관객, 독자의 측면이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저는 그렇게 생각되는데요.호호”

 

꼭 그렇지만은 않다. 존재의 이유를 의문시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보 전달 측면에서 비효율적이고, 획득하는 게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는 유사-정보가 넘치는 시공간에 그래도 내 몸을 지참하여 찾아가야 한다면 그 이유는 뭘까? 토크에서 얻을 수 있는 1차 데이터는 다른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한 번만 더 생각했더라면 굳이 하지 않았을 말들, 글로 써야 했다면 섞여 들어갈 필요가 없을 추임새들. 그리고 토크의 기획이 느슨하다(혹은 게으르다)면 이 데이터를 관객의 입장과 필요에 따라 제멋대로 가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 글에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조각들은 내가 이제까지 참석했던 토크들 중에서 굳이 노트를 찾아보지 않고도 기억이 나는 말들을 거칠게 복기해본 것이다. 정보라 말하기도 민망한 조각들을 모아서 생각해보려니, 나는 알게 모르게 ‘관계’에 대한 지표를 위주로 데이터를 추출하고 재조합해 왔던 것 같다. 국공립 기관의 관계자가 작가를 대하는 태도, 작가와 기획자 간의 긴장감, 비평가가 은연 중에 상정하고 있는 독자층. 이러한 것들도 정보라면 정보일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정보는 추후에 내가 글을 쓰거나 일을 벌이고 판단을 할 때 참조점이 된다. 그러니 특정한 시공간에서 나름의 맥락 속에서 튀어나온 말들을 길어다가 나의 타임라인 속에 적어두고 나름의 징후로 재구성할 수 있다면 토크는 어쨌든, 또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분명 훌륭하다고 판단하게 될 토크도 있을 거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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