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각, 2017.10.19.-11.19.)
전시장에 들어서면 습관처럼 제일 먼저 도면을 집어 들고 전시를 따라간다. 도면의 위치와 나의 위치를 조정해가면서 작품을 하나하나 확인해가며 따라갈 때 도면은 지도와도 같다. 도면은 처음 만나는 전시에서 길을 찾게 해주는 소중한 존재다. 그러나 종종 도면이 배포되지 않는 전시도 있다. 관객에게 도면은 있는 것이 훨씬 좋지만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전시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도면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전시의 필수 요소는 아니다. 전시를 구성하는 요소에 도면은 들어갈 수도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는 괄호 안의 단어 같은 것이다.
전시의 요소는 요소인데 그렇다고 필수적인 요소는 아닌 것에는 도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포스터나 리플릿, 도록, 입간판 같은 것들은 필수는 아닌 선택이다. 미술 전시에서 그것들은 ‘작품’은 아니지만, ‘작업’이기는 하면서 애매하게 미술과 미술 아닌 것 사이를 오간다. 그렇기에 제목도 (필요) 없다. 그러나 <도면함>에서는 제목처럼 ‘도면’이 주인공이 되고, 작품 언저리를 맴돌던 것들이 작품이 된다. 미술 전시장에서 단순한 가구와 예술 작품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는 기물들이, 작품을 미리 그려보거나 다시 돌아보기 위한 팝업북이, 다른 전시에 관한 말과 글이, 전시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쌓인 자료들이 작품이 된다. 그 작품들은 모두 이 전시를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실은 그 앞의 다른 전시에 기원을 두고 있는, 2차 창작물에 가까운 것이다. 전시의 무게중심은 어쩔 수 없이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박미나&Sasa[44]의 작업으로 쏠리게 된다. 그동안 선보였던 모든 전시의 부속물들을 차곡차곡 모아서 보관한, 그 꼼꼼한 기록의 집적을 나도 모르게 넋 놓고 보게 된다. 도면은 물론이고 계약서부터 주고받은 메일, 스케치, 포스터 등 완성된 작품의 뒤에서 그것을 받쳐주던 요소들이 이제 작품으로 전면에 나온다. 그리고 그 꼼꼼한 기록의 목록은 2003년 쌈지스페이스에서의 전시에서 시작한다. 쌈지스페이스라는 멀고 아득한 이름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사라진 호암갤러리와 삼성미술관, 플라토, 지금과는 느낌이 사뭇 다른 인사미술공간과 일민미술관을 지난다. 대형 필름 카메라로 전시전경을 찍던 시절. 미술책에 ISBN을 안 다는 경우도 허다했던 시절. 삼성과 전시를 하며 “프로페셔널과 일한다는” 느낌이 들던 시절. 지금보다 모든 게 낫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지금과는 달랐을 것 같은 시절을 스친다.
그래서 지금, 시청각에 앉아 쌈지스페이스의 벽면에 스티커를 붙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떤 이상한 시차를 감각하게 한다. 그때의 그곳들은 이제 없다. 그 공간들이 차지했던 자리를 어느 다른 공간이 제대로 대체하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렀다. 큰 규모의 개인전과 기획전이 드물어졌고, 해외 작가의 신작을 국내에서 보는 것도 어려워졌다. 대신 시청각이 있고, 여러 소규모 공간들이 있고, 일시적으로 모여서 펼쳐지는 이벤트들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청각에서 만드는 전시들이 공유하는 어떤 풍경은 그 자체로 자기지시적인 면이 있다. 다른 미술관에서 선보였던 작품의 부속물을 작품의 재료로 삼는 것은 지금의 미술 상황과 시청각의 자리를 참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단 <도면함>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MOVE & SCALE>이 그랬고, 시청각 문서를 재료로 삼는 전시들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단어나 호기심에서 시작하는 전시들이 그랬다. 그것은 시청각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전시이기도 하고, 가장 잘 어울리는 전시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품은 아니지만 작업이기는 하면서 애매하게 미술과 미술 아닌 것을 오가는 것들”처럼, 시청각의 전시도 어떤 경계 사이를 오간다.
그러나 <도면함>이 자신의 원본으로 삼는 전시 대부분은 꽤 멀어진 것들이다. 겨우 몇 년 전 일인데도 지금의 감각에서 그 전시들은 지나간 시절처럼 느껴진다. 크고 매끈한 전시공간에서 전시를 보는 것보다 작고 일시적인 전시공간을 찾아다니는 일이 훨씬 자연스러워진 날들이다. 이런 것이 정말 ‘숭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거대한 작품 앞에 섰던 것은 꽤 예전 일이고, 요즘은 작고 아름다운 굿즈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마법주스를 마시고 몸이 작아지는 앨리스처럼 미술은 달라진 상황에 알맞게 자기 몸을 바꿨다. 전과는 분명히 달라졌지만 무조건 비관할 일도 아니다. 덕분에 새롭게 볼 수 있는 것들이 또 아름답고 좋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잘 이용하는 전시와 작업을 내놓는 일은 무엇보다 영리하고, 적절하다. 그것들을 향유하는 일은 기대되고 신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조금은 멜랑콜리한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