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는 기존 시청 기록에 기반하여 내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메인에 배치하지만, 야심 차게 내놓는 신작의 티저는 나의 취향과 무관하게 대문짝만하게 걸어놓곤 한다. 속는 셈 치고 본 ‘인터랙티브 영화’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2018)는 정말 재미가 없었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 여러 번 봤다. 하지만 매번 별로였다. 영화는 1980년대 중반에 한 아마추어 게임 개발자 스테판이 ‘밴더스내치’라는 게임을 만드는 이야기를 시청자와의 ‘인터랙션’으로 만들어간다. 시청자는 스테판이 어떤 시리얼을 먹을지, 어떤 음악을 들을지와 같은 시시콜콜한 디테일부터 플롯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행동까지 직접 결정하고, 그 결정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시작부터 끝까지 종종 화면 하단에 질문이 적힌 바가 뜨고, 10여 초 안에 제시된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면 그 선택이 매끄럽게 반영된다. 커뮤니티에서는 결말이 크게 다섯 가지 정도로 추려질 수 있다고 추정하고, 공식 발표에 의하면 총 5시간 분량의 영상이 준비되어 있다. 재미가 없으면 다른 콘텐츠를 이용하면 될 일이지만 유독 이 영화가 왜 별로였는지에 대해 꽤 오래 생각했다. 특히 잊을법하면 튀어나오는 질문과 선택지에 대해서. 흔들리는 스테판의 눈 아래에 둘러진 검은 선택창, 누워서보다가 갑자기 경건한 자세로 마우스를 집어 드는 나의 손에 대해서.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넷플릭스나 유튜브로 영상을 볼 때 자막을 켜두는 습관이 생겼다. 멀쩡히 알아듣는 언어의 콘텐츠라도, 아니 그럴수록 더욱이 자막의 도움을 받았다. 투박한 폰트로 입력되어 있는 한 줄의 텍스트는 좁은 스마트폰 화면에 꽤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있는 편이 편했다.
물론 언제나 자막이 반가웠던 것은 아니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쏟아내는 영상 앞에 앉아 자막을 읽는 것은 꽤 번거로운 일이다. 영어를 모르고 한글도 떠듬떠듬 읽던 어린시절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헐리우드발 가족 영화를 보러 가족과 영화관에 종종 갔다. 알록달록한 스크린 우편에 세로로 떠있는 흰색 국문 자막은 좌절감을 맛보게 해주었다. 느릿느릿 자막을 읽다보면 화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놓치고, 한참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자막은 저만치 진도를 나간 뒤였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플롯을 따라잡기 위해 강제로 읽는 자막은 어린 나를 완전히 소진시키곤 했다.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90분가량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후에는 스스로 보상이라도 하듯 허겁지겁 피자를 먹어댔다.
학창시절 내내 들었던 인터넷 강의 속 텍스트는 그나마 나았지만,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웠다. 형형색색의 판서를 실시간으로 따라잡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강사가 한 바닥 써놓으면 잘 보이는 장면을 골라 한동안 멈춰야 했다. 필기가 많은 회차라면 실제 영상 길이의 1.5배 정도의 재생 시간이 소요됐다. 하지만 인터넷 강의는 구간별로 재생속도를 조정하거나 재생지점을 제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잡담하는 시간을 스킵하는 등의 방법으로 늘어진 시간을 만회할 수 있었다. 펼친 손보다 조금 큰 PMP 기기 속 작은 강사와 작은 글씨는 철저히 나의 통제 하에 있었다. 저화질에 확대도 되지 않는 직사각형의 화면이었지만 내 명령에 따라 배속하고 멈추고 건너뛰었으니 그럭저럭 쓸만했다. 영화관이나 TV 앞에서의 경험과 달리 총 재생 시간과 영상에서 다루는 내용의 순서를 확인하고, 내가 투자할 수 있는 시간과 집중력에 따라 콘텐츠를 어떻게 소화할지 결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통제의 감각은 2000년대 말에 유행하던 미드를 찾아보면서,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는 유튜브에 익숙해지면서 거의 젓가락질 하듯 체화되기에 이른다. 보고 싶은 영상을 골라 띄우고, 그중에서도 보고 싶은 부분으로 점프할 때 요긴한 것은 다름 아닌 화면 안의 텍스트였다. 유튜브나 넷플릭스, V앱과 같이 영상 콘텐츠를 매개하는 플랫폼의 메인 화면에는 다수의 썸네일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경쟁한다. 대표 이미지와 이를 부연하는 제목으로 구성된 다발은 사용자들이 여러 항목을 동시에 보고 순간적으로 판별하는 데 익숙해지면서 더욱 요란해졌다. 급기야 과감한 폰트의 텍스트가 썸네일 이미지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제목칸에 머물러 있던 텍스트, 즉 영상의 내용이나 장르를 표출하는 간략한 문구들—‘GRWM(Get Ready With Me)’, ‘MV Reaction’, ‘ASMR’, ‘TOP 10’—이나 영상의 내용과 무관하게 이목을 끌만한 요란한 단어들—‘OMG!!!’, ‘ㅇㄱㄹㅇ??’—이 이미지에 잔뜩 삽입되었다. 다른 한편 썸네일 아래 위치한 제목은 콘텐츠의 핵심을 요약하기보다 마치 해시태그를 잔뜩 단 것마냥 지저분해졌다. 복수의 헤더를 달고—‘[ENG SUB]’, ‘[MR Removed]’, ‘[FAN CAM]’—구어체로 줄줄이 이어지는 제목은 대체로 메인 화면에 표기가능한 최소 글자 수를 넘겨 끝이 ‘…’으로 흐려진다. 이쯤 되면 제대로 보이는 글씨는 썸네일 이미지 속에 있는 문구들뿐이다. 하지만 문제될 건 없다. 어차피 제목보다 중요한 것은 썸네일 이미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영상의 유형, 키워드, 주요 인물 정도이기 때문이다. 메인 화면에 제목이 생략되고 썸네일 이미지만 남게 된다 해도 크게 당황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란한 이미지들의 동시다발적 외침은 적극적인 선택의 과정을 요한다. 사용자들은 이미 틀어주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원하는 것을 골라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적극적인 선택의 행위는 수동적인 감상 경험과 만나 괴이한 수동적극성을 띤다. 넘치는 언어 및 이미지 정보 가운데 보고 싶은 콘텐츠를 손수 고르고, 영상의 어느 부분을 어떤 모드로 감상할지까지 세심하게 설정해둔 뒤 정작 벌어지는 일은 방치에 가까운 무관심 혹은 태연한 산만함이다. 언제든지 구간을 뛰어넘거나, 다른 영상이나 사운드를 동시에 틀어버릴 수도 있고, 다른 디바이스에 집중을 빼앗겨버릴 수도 있다. 마치 BGM을 틀어놓은 듯 태연하게 다른 일을 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여러 디바이스에 복수의 영상을 동시에 켜놓을 수도 있다. 여러 영상들의 썸네일이 경쟁하고 있는 바로 그 영상 플랫폼 인터페이스는 내가 띄워놓은 수많은 탭 중 하나일 뿐이다. 요즘 교수들은 신입생들이 인터넷을 많이 해서 그런지 책 한 권 제대로 읽는 법이 없다고 한탄을 하는데, 머지않아 ‘요즘 애들’은 10분짜리 영상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보는 일이 없다고 혀를 차게 될 것이다.
사용자의 수동적극성은 근래에 일종의 장르로 자리 잡은 영상의 유형과 각종 영상 공유 플랫폼이 사용되는 방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영상 속 텍스트는 적극적 통제와 수동적 감상으로 구성된 이 경험을 매개한다. 유튜브는 사실상 스트리밍 서비스다. ‘유튜브 프리미엄’의 빛나는 기능은 다름 아닌 다른 앱과 함께 구동할 수 있는 멀티태스킹이다. 다른 앱을 켜거나 화면을 꺼두어도 영상은 계속 플레이 할 수 있으니 마치 잔잔한 음악을 깔아두듯 영상을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한다. 이러한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두 시간 이상의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는 콘텐츠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플레이리스트 영상은 굳이 ‘볼’ 필요는 없으나, 듣다가 마음에 드는 곡이 나왔을 때 제목을 알고 싶거나 다시 한번 듣고 싶다면 화면 속 텍스트를 확인하게 된다. VLOG는 본격적으로 시시콜콜한 일상을 전시하는 장르로, 담고 있는 정보의 밀도나 흐름상 사용자가 영상에 온전히 집중하기보다 자신의 일상에 특유의 리듬을 부여하거나 분위기를 조성하는 기능을 하곤 한다. 심지어 말없이 자막으로만 진행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한눈팔다가 영상에서 방문한 곳이 어디인지 궁금하거나 소개하는 제품이 궁금하다면 화면 속에 적힌 텍스트를 보면 된다. 수동적극성의 극단은 텍스트로 된 슬라이드쇼 유형의 영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레이터의 얼굴이 나오지 않고, 저화질의 스톡 이미지나 캡처 화면과 함께 짤막한 텍스트가 지나가는 이러한 영상에 대해 주변에서는 글로 읽으면 훨씬 효율적일 텐데 괜히 번거롭게 영상으로 만든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았다. 블로그를 영상으로 옮겨온 듯한 이 조악한 콘텐츠는 효율성을 따지자면 그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기 어렵겠지만 지난 몇 년에 걸쳐 체득한 영상을 보는 태도에는 썩 잘 맞는다. 이런 자막-영상류야말로 검색을 통해 찾아서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막상 틀어놓으면 잠시 자리를 비워도 아무 문제없는 정도의 낮은 밀도로 구성되어 있는데다가 목소리 내레이션이 아닌 자막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적당히 스킵하면서 대강 보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집중력의 질이 떨어진 것인지, 집중력을 분산하는 능력이 유난히 발달한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지만 더 이상 한 가지 일만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요구하는 최저 집중력의 수준이 현저히 낮은 영상이 양산되고, 화면 속 텍스트는 분산된 집중력을 제어할 때 요긴하게 쓰인다. 텍스트는 산만한 시간 가운데 일종의 질서를 부여하고, 시청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며, 온전하게 집중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콘텐츠를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인터랙티브 영화 〈밴더스내치〉는 영상 감상의 수동적극성과 텍스트의 기능을 완전히 배신하고 만 것이다.
몇 가지 선택을 하다 보면 주인공 스테판은 자신이 외부의 힘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컴퓨터에 커피를 쏟아버리려는 자신의 손을 싸워보지만 실패한 스테판은 허공에 대고 자신을 통제하는 존재(이 경우에는 넷플릭스를 보고 있는 김뺘뺘)더러 정체를 밝히라고 절규한다.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내가 스테판을 통제하는 일이나 나의 선택이 영화에 녹아들면서 플롯이 점차 통제에 대한 주제의식이 선명해지는 것에 쾌감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내가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는 점에 분통했다. 짜여진 각본 속에 들어와 있는 건 다름 아닌 나였다. 대체로 스테판이 만드는 게임은 만들어지지 않거나 혹평을 받고 마는데, 유일하게 큰 히트를 치는 엔딩은 그가 통제의 본질을 간파하여 플레이어들이 철저히 개발자가 설계한 시나리오 안에서 플레이하도록 하는 경우이다. 내가 통제하는 캐릭터가 그를 대신하여 선택하는 세력을 의식하고, 플레이어를 철저히 통제하는 게임을 만들어 결국 우리는 모두 외부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쯤 되면 거의 제작자가 시청자를 조롱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 이슈가 된 통제는 메타 속의 메타 속에 숨겨진 원대한 것이 아니었다. 영화가 총 몇 분인지, 엔딩을 보려면 얼마나 남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특정한 시점에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검은색 단이 나타나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골라야만 다음 장면으로 연결된다니. 게다가 괜히 간지러워서 보기 싫은 장면을 건너뛸 수도 없다니 부당하게 짝이 없다.
콘텐츠에 대한 통제권을 건네줘도 즐거이 행사하지 않으려는 심보는 앞서 살펴본 수동적극적 영상 감상 태도와 텍스트의 역할로 설명된다. 영상 내 텍스트의 주된 역할이 정보의 전달이라면, 돌연 등장하는 선택창은 신선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으로 다가왔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상 속 텍스트가 일종의 스크롤바이자 타임스탬프라면, 그리고 시청자가 자신의 시간과 집중도를 통제하기 위한 지표로 사용된다면, 명목상 선택권을 시청자에게 돌려주겠다는 인터랙티브 포맷은 오히려 통제 권한을 박탈하는 장치가 된다. 외람되지만 원컨대 넷플릭스가 나에게 말을 거는 유일한 창은 장시간 시청 중에 혹시 내가 잠들었을까봐 “아직도 시청 중이십니까?” 하고 보내는 메시지였으면 한다. 이미 너무 많은 창이 켜져 있다. 미안하지만 모두에게 반응해줄 수는 없다. 다만 영상 속에 무언가 적어둔다면 곧 확인할 짬이 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