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일 하세요?

소설을 읽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휴가가 주어지면 책을 쌓아놓고 읽고 싶다는 상투적인 바람이, 나에게는 타의에 의해 실현되었다. 지난여름, 힘들게 석사 학위를 받을 때만 해도 어쨌거나 앞날은 밝을 줄 알았다. 그러나 미술관 언저리의 크고 작은 일거리를 전전하면서 가을과 겨울을 보낸 뒤에도 나는 어디에도 속해서 일하고 있지 못했고, 이제 주어졌던 일마저도 끊긴 시간에, 나는 무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책이나 읽었다.

이십 대 초반에 나는 문학을 사랑했지만, 순문학만이 가지고 있다는 순수하고 영원한 것으로서의 예술성이 뭔지 알려면 문학만 읽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비슷하게 반복되는 것만 같은 동시대 소설이 어느 순간 지겹다고 느꼈던 것이 문제였던 것 같다. 늘 등장하는 ‘부재’, ‘결여/결핍’, ‘(불)가능성’, ‘경계’ 같은 단어들을 보면서, 평론 제목만 보고도 대략 어떤 내용이겠거니 짐작하면서, 내가 그런 ‘이름 없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좋아해서 문학을 좋아한 것은 맞지만, 그렇지만 그게 내 이야기처럼 읽히지는 않았다. 그렇게 조금 답답한 상황에서 도망치듯 미학을, 미술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학을 공부하는 일 또한 즐거움과 답답함의 반복이었다. 진리에 가닿을 것만 같은 행복감에 젖는 순간과 책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돌아봤을 때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 현실에 대한 답답함 사이를 오가는 시간이었다. 진리에 가까워질수록 지금 여기에 대해서 말하기는 어려워졌다. 그건 철학이 원래 그런 학문이어서라기보다는 아마 내 능력이 부족해서였을 거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논문을 쓰고 졸업을 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도망치듯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동시대 소설을 다시 읽으니 믿을 수 없게 재미있었다. 한국소설이 원래 이렇게 재미있었나? 전에 없던 발랄하고 유쾌하면서도 여운이 남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읽다보니 몇몇 새로운 점이 눈에 띄었는데, 그중 하나는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많아진 것이다. 문학은 늘 노동과 일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구조적 문제를 말하기 전에 ‘2019년 서울’에서 일하며 사는 삶의 고단함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매일 한 시간가량 숨 막히는 지하철에 갇혀 출근하는 삶, 상사의 황당한 개인적 고민을 억지로 들어줘야 하는 사회생활, 가끔씩 친구를 만나 실컷 욕을 하거나 아니면 ‘덕질’에 나머지 마음을 모두 쏟아야 그제야 살아있는 것 같은 생활, 서울에서 일하는 삶이란 그런 것이다. 요즘의 소설에는 그런 삶의 모습들이 생생하게 이야기되고 있었다.

그러한 ‘일’의 이야기를 다룬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은 한국문학으로서 드물게 문단을 넘어서 일반인(?)에게까지 화제가 되었다. 판교 스타트업과 한국형 대기업의 부조리함이 묘하게 뒤섞여있는 이 소설은 수없이 리트윗되면서 공감의 댓글을 받았다. 실속도 없이 어디서 본 것만 많은 스타트업 대표, 자기 비위를 상하게 했다고 직원에게 부당한 처우를 하는 대기업 CEO. 양질의 일자리라고 할 수 없는 스타트업과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는 대기업에서 일하는 두 여자는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무의미한 육교를 오르고 내리고, ‘덕질’로 일상을 버틴다. 정세랑의 「옥상에서 만나요」의 ‘나’는 스포츠신문 광고사업부에서 일한다. 상사의 성희롱을 참고, 접대라는 명목으로 아저씨들을 술집에 데려다주는 업무를 견디면서, 옥상 에어컨 실외기에 앉아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김세희의 「가만한 나날」의 경진은 ‘작은 마케팅 회사’, 실은 일반인을 사칭하며 블로그에 리뷰를 올리는 회사에서 일한다. 업무에 적응하지 못해 비난의 눈초리를 받는 입사동기 옆에서 그녀는 ‘나는 저러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일한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 누구나 일을 하고,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상의 힘겨움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처럼 가깝게 읽힌다. 이러한 이야기는 그동안 문학에서 일과 노동을 다루던 방식이 구조적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비정규직’,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인물들을 만들어냈던 것과는 분명 다른 맥락에 있다.


눈에 띄는 또 다른 점은 여성의 이야기가 점차 많아지고,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황정은의 여성 화자는 점차 다양한 독자를 만들어 왔고, 이후 『82년생 김지영』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여성 서사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냈다.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부를 수 있는 2016년 이후의 흐름에서 문예지들은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을 주제로 내세워 비평과 좌담을 시도했고, 이러한 관심이 단발적인 행사나 특집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련 주제를 다루는 소설가와 비평가의 글을 실었다. 이에 부응하듯 여성 소설가의 여성 서사는 점차 가시화되었고, 또 점차 다양해졌다.

그중에서도 여성 사이의 관계와 연대, 공감과 차이를 다루는 소설들이 인상적이었다. 최은영은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에서부터 여성 간의 관계와 연대를 세심하게 다뤄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지난해 발표한 「몫」은 대학 내 교지 편집부의 세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90년대 운동권 서사를 여성의 관점에서 새롭게 쓴다. 이때 「몫」은 단지 ‘후일담’에 머무르지 않고 그 당시의 문제를 동시대적 문제로 연장하면서, 여성의 문제를 작은 문제로 치부하거나 도구화하는 태도,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여성들의 감정과 관계를 다룬다. 또한 박민정은 과거 유명 아이돌이었지만 삼십 대가 되어 아르바이트로 삶을 이어가는 리사(「나의 사촌 리사」), 제국주의적 폭력의 희생자가 분명한 할머니를 전쟁 영웅으로 기억하는 세실(「세실, 주희」) 등의 인물을 통해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상황에 놓인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한편, 그 이야기를 하는 소설가 자신의 갈등을 드러냄으로써 재현의 윤리적 문제를 고민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숨 막히는 회사 생활이 펼쳐지는 정세랑의 「옥상에서 만나요」에는 여자 동료 사이의 특별한 우정이 그려진다. ‘나’는 같이 일하는 언니들과 옥상에서 잠깐 만나는 시간, 한 달에 한 번씩 같이 외출해서 외식을 하고 웃고 떠드는 시간 덕분에 지옥 같은 회사 생활을 버틴다. 그리고 마침내 지옥 같은 회사를 탈출한 ‘나’는 앞으로 자신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다른 여자, 아마도 불행할 여자를 위한 편지를 남긴다. 이처럼 여성의 이야기가 다양해지고, 생동감을 갖게 된 것은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를 아우르는 문학 공동체 전반의 노력의 산물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변화는 퀴어 서사의 변화다. 그동안 한국문학에도 퀴어 서사는 드물지만 존재해왔고, (어떤 작품은 처참한 와중에도) 몇몇 좋은 작품도 나오고 있었다. 2014년에 윤이형의 「루카」를 읽을 때만 해도, 한국문학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좋은 퀴어 문학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원이 다른 퀴어 문학이 등장했다. 커밍아웃한 첫 게이 소설가가 나왔고, 그의 소설이 여러 문학상을 받고 주목을 받았다. 더불어 이제 막 등단한 젊은 비평가들이 퀴어 문학에 대한 통찰력 있는 비평을 써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박상영의 소설에는 “웃고 떠들고 술 먹고 섹스하다 죽을 줄이나 아는 동성애자들”이 나온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나’는 ‘진짜’ 퀴어 영화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영화감독이 되었으나 제대로 된 영화 한 편 없고, 오히려 게이인척 하는 이성애자 감독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바라보며 배 아파한다. 그러다 또 게이 친구 왕샤넬과 술을 진탕 먹고 노래방에서 유채영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춤을 추다가 갑자기 울다가 다시 웃다가 또 운다. 이때 박상영의 소설 속 화자 ‘나’에게서 게이 정체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야말로 ‘정체성’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게이라는 사실로 모든 사건이 함몰되지 않는다. 「재희」에서는 그러한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 소설에서 ‘나’와 그의 여자 친구 재희와의 관계가 성립하는 데에 그가 동성애자라는 점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 관계는 동성애자라고 해서 특별할 것 없는, 시간을 함께 쌓아간 두 사람이 느끼는 두터운 감정의 켜다. 이처럼 박상영의 퀴어 문학은 대체불가능한 퀴어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것을 퀴어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풀어낸다. 한편 『여름, 스피드』에서 김봉곤은 글쓰기를 통해 수행적으로 게이로서 자신의 존재를 지속한다. 그의 소설에는 작가를 연상시킬 수밖에 없는 동성애자 소설가 혹은 영화감독이 반복해서 등장하면서 자신의 삶을 재현한다. 그리고 그렇게 ‘쓰는 행위’,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삶을 반복해서 재현하는 행위 자체가 곧 자신의 삶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이들 퀴어 소설가는 본인의 삶과 밀착되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정형화된 퀴어도, 대상화된 퀴어도 아닌 그저 퀴어로서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한편 레즈비언 서사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최은영의 「그 여름」은 고등학교 때부터 연인으로 지내왔으나 졸업 이후의 달라진 상황으로 인해 갈등하고 헤어지는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를 통해 계급적 격차가 젠더적 동일성을 앞서는 상황을 다룬다. 김혜진은 「아는 언니」, 「동네 사람」, 「자정 무렵」 등에서 레즈비언이 세상의 편견과 마주하고 이에 대응/대처하며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한다. 「동네 사람」의 ‘나’와 ‘너’는 “신분이 확실한 사람들”, 그러니까 “신혼부부나 애 키우는 가족들”한테 세를 놓고 싶다는 집주인 때문에 결국 더 멀고 낯선 지금의 동네로 이사했다. 그런 부당하지만 강력히 항의하기도 어려운 차별을 받은 ‘나’는 이 동네에서 “눈에 띄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다수 안의 타자로 살고 싶다. 그러나 ‘너’는 자꾸만 동네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나’는 그 마찰이 우리에 대한 부당한 시선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면서도, 조용히 사건을 무마시키고 싶어 한다.

이처럼 퀴어 문학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그에 대한 비평의 차원도 풍성해지고 있다. 한국문학에서 퀴어 서사의 변화와 최근의 특징을 고찰하는 김건형의 비평(「2018, 퀴어 전사」)이나 김봉곤의 소설을 ‘퀴어-되기’의 여정으로 읽으면서 글쓰기와 소설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인아영의 비평(「퀴어-되기를 위한 주제와 변주」)은 좋은 작품에 적확한 비평 언어를 제시함으로써 작품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나아가 그들은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여성 퀴어에 대한 논의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 그에 적합한 비평 언어가 부족한 것에 대해서도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 좋은 소설과 좋은 비평은 그렇게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좋은 문학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과거의 문학에 이런 이야기가 전혀 없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이전에도 문학은 소외된 이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처럼 읽히지 않았다. 문학이 ‘타자로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는 것은 알겠으나, 이야기하는 이와 이야기되는 이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새로운 문학이, 화자와 작가를 동일시하여 자기 이야기에 빠져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더 이상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작중 인물을 그려내지 않는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촌 리사를 소재로 소설을 쓰면서 끊임없이 자괴감에 빠지는 소설가 ‘나’(박민정, 「나의 사촌 리사」), 게이로서 나의 이야기를 진실되게 써야한다는 고민에 빠지는 소설가 ‘나’(김봉곤, 「Auto」)는 모두 그러한 고민의 발로일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몇 년간, 한국 문단에 있었던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신경숙 표절 사태, 문단 내 성폭력 고발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한국문학은 휘청거렸다. 그러한 사건을 통과하면서, 진통 끝에 한국 순문학계는 일부분 달라진 것 같다.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는가, 어떤 인물을 그려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어떻게든 예민하게 반응했고, 젊은 문인들은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문학계의 긍정적인 움직임은 아마 그러한 자기혁신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한 사건 이전과 지금 사이, 삼사 년이라는 짧은 시간의 ‘시차’를 말하는 젊은 비평가들의 말은, 그 이전과 이후의 문학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제는 ‘미술’에 더 가까이 들어와 버린 사람으로서, 문학 공동체가 변화한 모습을 멀찍이서 보고 있으면 여러 생각이 든다. 미술은 2016년 10월 이후 얼마나 달라졌는가? 오히려 한국미술의 상황은 더욱 부정적인 전망이 지배적이게 된 것 같다.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건 일부 전시의 성과는 분명하지만, 미술계 전반의 형질이 변하였다고,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젊은 작가의 성장 경로는 여전히 불투명하고, 전시 기관의 행보는 여전히 구태의연하며, 전시 기금 제도는 더욱 불합리해졌다. 새로운 미술을 제시하는 작가도, 그에 대응하여 비평을 전개하는 비평가도 부족하다. 지난 몇 년간 한국사회 전반에 큰 변화가 요청되었을 때, 문학계라고 해서 미술계보다 딱히 더 나은 상황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는 어떤 변화가 가능했다. 이로부터 우리가 보고 배울 수 있는 점을 무엇일까? 좋은 게 있으면 보고 배우는 게 발전적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미술에는 어떤 변화가 가능할까?


김봉곤의 「Auto」에는 ‘나’와 친구가 소설 습작 과정의 고단함을 토로하면서, 취업이나 하지 않고 문학의 길을 택한 것을 자조적으로 한탄하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나’는 짧은 후회 뒤에 생각한다. 자신에게는 글을 쓰는 행위가 이제는 삶을 살아가는 한 수행 방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상상하는 여러 종류의 미래 중 어느 것에도 문학이 없는 순간은 없다고 말한다. 일이 없어서 소설이나 읽던 나는, 돈벌이는 없지만 사실 늘 전시를 보고 글을 쓰는 것으로써,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나에게, 그리고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에게, 미술이 사라진 미래는 없을 것이다. 나의 어떤 미래에서도 함께할 미술이 더 재미있고, 더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언급한 글
소설
김봉곤, 「Auto」, 『여름, 스피드』, 문학동네, 2018.
김세희, 「가만한 나날」, 『창작과비평』, 2017년 겨울호.
김혜진, 「아는 언니」, 『현대문학』, 2016년 8월호.
_____, 「동네 사람」,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_____, 「자정 무렵」, 『릿터』, 2018년 12월/2019년 1월호.
박민정, 「나의 사촌 리사」, 『창작과비평』, 2018년 겨울호.
_____, 「세실, 주희」, 『문학동네』, 2017년 가을호.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문학동네』, 2017년 가을호.
_____, 「재희」, 『자음과모음』, 2018년 가을호.
윤이형, 「루카」, 『자음과모음』, 2014년 여름호.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창작과비평』, 2018년 가을호.
정세랑, 「옥상에서 만나요」, 『문예중앙』, 2012년 여름호.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최은영,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2016.
_____, 「그 여름」, 『21세기 문학』, 2016년 겨울호.
_____, 「몫」, 『한국문학』, 2018년 하반기.


비평
김건형, 「2018, 퀴어전사—前史, 戰史, 戰士」, 『문학동네』, 2018년 가을호.
인아영, 「퀴어-되기를 위한 주제와 변주」, 『문학과사회』, 2018년 가을호.

“요즘 무슨 일 하세요?”의 4개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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